우리 과학의 역사에서 ‘스승’이 서양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배의 각종 모순에도 불구하고 존경할 만한 일본인 스승도 있었고, 그들에게 배운 한국인 과학기술자는 다시 다음 세대의 한국인 학생들에게 스승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식민권력은 근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한국인 고급인력의 양성에 대단히 소극적이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한국인 과학기술자 양성을 의도적으로 훼방 놓고 있다는 불만이 팽배했다.
이태규 박사를 발탁한 일본 화학계 거목
이런 여건에서 재능 있는 한국의 젊은이를 발견하여 과학자로 성장할 기회를 준 외국인 스승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미담으로 회자되고 있다.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한국인 최초의 이학박사 학위를 딴 이원철(1896~1963)은 연희전문 수물과(數物科) 시절의 은사 칼 루퍼스(1876~1946)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미국 유학의 꿈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정의 아들이었던 박서양(1887~1940)이 의사로 입신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세브란스의학교의 캐나다인 의료선교사 올리버 애비슨(1860~1956)의 덕이 컸다. 한국인으로 세 번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근대 의사가 된 김점동(또는 에스더 박, 1876~1910)은 한반도 의료 선교에 헌신한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의 후원 덕택에 미국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미담에 등장하는 외국인 스승들은 대개 서양인이다. 숫자로만 따지면 훨씬 많았던 ‘일본인 스승’에 얽힌 이야기는 구태여 묻지도 소개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다.
한반도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과학기술 연구자나 과학기술 교육자는 식민지배층의 일원이었으니, 이들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대다수의 한국인들로서는 불편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개별 과학기술자들이 누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 조사하고 기록하는 것은 한국 과학기술의 궤적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태규 박사 전기」(도서출판 동아, 1990)에 실린 교토제대 시절의 이태규 박사와 호리바 신키지 교수의 사진. 앞줄 가운데가 호리바, 오른쪽 두 번째가 이태규 박사다. 호리바는 내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조선인인 이태규 박사를 교토제대 교수에 임용하고 미국 유학을 후원했다. / 필자제공
한국 과학기술계의 지도적 인물들을 길러낸 일본인 과학자는 한둘이 아니다. 일본 화학계의 거목 호리바 신키치(1886~1968)는 이태규를 박사로 키우고 나아가 동료 교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토제대 화학과의 교수로 발탁했다. 사쿠라다 이치로(1904~1986)는 리승기의 보좌를 받아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닐론’을 개발하고 리승기를 교토제대 교수로 끌어올렸다. 정규 의과대학을 마치지도 않은 공병우(1907~1995)의 자질을 인정하고 그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여 의학박사 학위까지 딸 수 있도록 후원했던 사람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 사타케 슈이치(1886~1944)였다. 모리 타메조(1884~1962)는 자신의 채집여행에 따라 나선 조수 조복성(1905~1971)의 성실함과 그림 솜씨를 눈여겨보고 그를 연구자로 키워내 뒷날 “한국의 파브르”로 불리게 되는 첫단추를 꿰었다. 민족적 차별 없이 유능한 제자를 발탁하여 성심껏 지도하고 후원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훌륭한 과학자이자 스승이었다.
과학자도 사람이기에 그가 속한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학자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다른 전문가집단에 비해서도 애국주의보다는 세계시민주의에 더 호의적으로 반응한다.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는 명분
일본인 은사들이 한국인 수제자들을 아꼈던 마음은 약 한 세대 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이 식민지 뉴질랜드에서 건너온 영특한 학생 러더포드(1871~1937)를 가상히 여겼던 마음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톰슨(1856~1940)은 러더포드가 제국의 변방인 뉴질랜드 사람인 데다가 케임브리지 출신도 아니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동문 제자들과 다름없이 대우했다. 톰슨의 지지에 힘입어 러더포드는 원자의 구조를 밝히는 여러 가지 선구적 실험에 성공했고, 마침내 1908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교토제대 화학과에서 한국인 이태규를 교수로 뽑는 데 반대한 이들에게 호리바는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는 명분을 내세워 응수했다고 한다. 호리바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일본 화학계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태규가 미국 연수를 통해 당시 세계 화학의 최신 조류였던 양자화학을 익히고 돌아와 일본에 전파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과학의 이름을 내세운 보편주의가 식민지라는 특수성을 완전히 덮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 질서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세계시민주의를 마음 편하게 선택할 수 있지만, 식민지 출신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늘 안고 살게 마련이다.
러더포드는 노벨상을 받은 뒤 1914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귀족이 되어 새로 만든 ‘넬슨의 러더포드 경’의 문장(紋章)에는 마오리족 전사와 키위새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에서 최상의 영예를 누리게 된 뒤에도 러더포드는 뉴질랜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일본인 은사들의 후의를 입고 학자로 성장한 한국인들도 자신들이 일본인이 되었거나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은 없었다. 제국대학의 교수가 된 이태규와 리승기의 수하로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의 실험실은 교수도 한국인이고 대학원생들도 절반 이상이 한국인인, 일본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지극히 예외적인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광복 후 한국 과학계의 재건에 이바지했다(다만 남과 북으로 갈리기는 했다).
우리 과학의 역사에서 ‘스승’이 서양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배의 각종 모순에도 불구하고 존경할 만한 일본인 스승도 있었고, 그들에게 배운 한국인 과학기술자는 다시 다음 세대의 한국인 학생들에게 스승이 되었다. 이들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간단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은 문제지만, 우리는 아직 아는 바가 너무 적다. 일단 어떤 외국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본격적으로 파악할 때까지 평가에 대한 고민은 잠시 접어놓아도 되지 않을까.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