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기업 범죄에 무심한 사회, 너그러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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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기업 범죄에 무심한 사회, 너그러운 정부

입력 2017.05.29 20:20

소비자안전의 절대적 원칙이 필요하다. 안전하지 않으면 제품이 아니다. 기업은 안전하지 않은 제품을 팔 수 없다. 이 원칙을 정부가 확고히 하면 된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기업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면 된다.

시장에서 기업이 벌이는 속임수, 상술 수준을 넘어선 사기, 돈과 권력을 앞세운 폭력에 우리 사회는 너그럽고 무력하다. 심지어 정부는 기업의 영업기밀 보호를 내세워 범죄행위를 덮어주었다. 안전하지 않은 제품을 만들어 유통시키는 행위는 소비자의 건강과 생명을 해치는 범죄(crime)이며 어린이나 노약자,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소비자들에게 폭리를 취하거나 불리한 거래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violence)이다. 사회의 범죄와 폭력은 엄벌을 외치면서 시장에서 다국적기업과 대기업들에 의해 수없이 벌어지는 범죄와 폭력행위에는 벌금과 같은 미약한 행정규제로 대응한다.

2016년 4월 24일 소비자운동단체 회원들이 대형마트에서 철수된 옥시 제품을 카트에 싣고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한국 본사로 이동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2016년 4월 24일 소비자운동단체 회원들이 대형마트에서 철수된 옥시 제품을 카트에 싣고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한국 본사로 이동하고 있다. / 서성일 기자

소비자의 생명과 행복을 앗아간 범죄

휴대폰의 전자파, 머리염색약에 든 중금속, 화장품 속 환경호르몬, 옷 속 포름알데하이드…. 소비자는 돈은 돈대로 내고 위해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입고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웬만해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묵인해주는 제도와 사회 분위기이다. 기업에 책임을 묻고 응당한 처벌을 하지 않는다. 판매순위를 속인 가짜정보로 수십억의 수익을 올린 대기업에 몇천만 원의 과징금을 물릴 뿐 수많은 소비자의 피해는 무시된다. 죽음을 불렀던 가습기 살균제 안전 광고를 한 업체에도 벌금형만 주어졌다.

한푼 벌기 위해 개인 행복을 담보로 살아가는 소비자들의 주머니에 속임수로 부당이익을 취하는 행위는 분명 강탈에 해당한다. 돈만이 아니라 행복과 건강, 생명까지도 강탈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기업들의 속임수, 사기, 폭력에 시달린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이 입는 크고 작은 피해는 셀 수 없이 많다. 개개인 소비자의 불만 상담과 해결에는 정부나 소비자기관이 나서면서 소비자들이 집단으로 위해에 노출되는 상황에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안전하지 않은 제품을 만들어 팔 만큼 팔고는 문제가 드러나면 그때서야 안전기준 운운하는 정부나 사과로 끝내는 기업이나 마찬가지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는 영리를 위해 소비자의 목숨을 앗은 기업의 범죄행위이다. 기업의 안전책임 방기와 정부의 화학물질과 화학제품 부실관리가 함께 만든 재앙이었다. 기업은 제품을 시장에 내놓기 전에 안전검사를 하지 않았다. 안전검사는 기업의 본분이다. 따라서 법의 고의성 잣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판매 이후엔 소비자 부작용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고, 나중엔 피해자조차 외면했다. 정부도 공범이었다. 화학물질 생산과 수출에는 신경을 썼지만 화학물질 독성에 노출되는 소비자와 노동자 안전은 도외시했고, 독성물질이 제품으로 만들어져도 이를 제어하지 못했다.

기업의 범죄와 폭력 밝히는 소비자운동

국가의 기준에 없으면 모든 게 면죄였다. 유엔에서 1980년 말 화장품에 쓰이는 독성 화학물질 목록을 만들어 각국에 조치를 취하도록 경고했지만 정부는 기업 영업기밀이라며 화장품 전성분표시제를 거부했었다. 미루고 미루다 화장품의 전성분표시제가 이루어진 건 불과 몇 년 전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소비자들은 무얼 넣었는지도 모른 채 비싼 값을 내고 화학물질 범벅의 화장품을 써왔는가? GMO 안전 논란이 일어난 지도 20여년이 되어가지만 GMO 표시제가 도입된 것도 최근이다. 비스페놀A가 검출되는 아기젖병을 아기에게 물렸고, PVC로 만든 식품용기와 랩에 뜨거운 음식을 담아 먹었고, 아기에게 형광물질이 든 기저귀와 물티슈를 써왔다. 기업은 위해상품을 팔아 이익을 취하고 몸집을 늘려갔지만 독성물질을 먹어야 했고 써야 했던 소비자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 정부는 기준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면 그만이었고, 기업에는 기준이 없을 때의 일이라고 면죄부가 주어졌다.

소비자 안전의 절대적 원칙이 필요하다. 안전하지 않으면 제품이 아니다. 기업은 안전하지 않은 제품을 팔 수 없다. 이 원칙을 정부가 확고히 하면 된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기업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면 된다. 범죄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고, 막지 못한 범죄는 제대로 처벌해야 소비자 안전이 지켜질 수 있다.

소비자운동은 소비자를 상대로 한 크고 작은 범죄행위를 밝혀내고 규탄하는 활동이다. 소비자운동은 소비자의 생명·건강·재산·가치를 위협하는 시장에서의 범죄(crime)와 폭력(violence)을 추방하고, 소비자의 주인된 권리(주권)를 찾고 지키기 위한 소비자의 자발적인 활동이다. 소비자단체는 시장의 감시자(watchdog)이다. 동시에 정부 정책의 감시자이다. 소비자단체는 기업 행위를 감시하여 속임수를 밝히는 일을 한다. 또 피해 입은 소비자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졌는지 감시하며, 소비자를 대신해 싸우는 일을 한다. 나아가 소비자의 힘을 결집시켜 반소비자적인 기업 행위와 이를 일삼는 기업을 시장에서 추방하는 일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불매운동이다.

5월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관계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5월 1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관계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가습기 살균제 사건 때 왜 작동 못했나

가습기 살균제를 안전하다고 지나치게 광고할 때 소비자단체는 의심의 눈으로 감시했어야 했다. 안전하다는데 입증하라고 외쳐야 했고 정부에 시험을 요구했어야 했다. 자몽이 처음 수입되었을 때 쉽게 시들지 않는 점을 의심하고 정부에 실험을 요구해 발암물질이 든 것을 밝히고 대대적인 불매운동으로 수입을 금지시켰던 소비자운동이 가습기 살균제 사고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늘 새로운 마케팅, 신제품 뒤에는 안전문제가 뒤따랐던 과거 경험을 상기했어야 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소비자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소비자단체는 분쟁조정이나 소송에 맡기는 것에 우선해서 살인이나 마찬가지의 범죄를 저지른 업체들을 시장에서 추방하는 대대적인 불매운동에 나섰어야 했다. 이들 기업을 소비자들이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다. 이익을 얻기 위해 소비자의 목숨을 앗은 기업을 응징하는 방법은 시장에서 추방하는 것이다. 잃은 목숨과 깨어진 행복, 부서진 신뢰는 사과나 돈으로 보상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습기살균제 Q&A | 피해자들이 왜 다시 광화문 일인시위에 나섰나?

5월24일 낮 12시 광화문광장 사거리에서 진행된 일인시위 / 최예용 제공

5월24일 낮 12시 광화문광장 사거리에서 진행된 일인시위 / 최예용 제공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습기 살균제 피해대책을 요구하는 2주간의 일인시위에 나섰습니다. 첫 날 시위에 나선 피해자는 부인을 잃은 최주완씨입니다.

최씨는 택시운전을 합니다. 아내를 잃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는데 자식들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본인도 여러 가지 질병으로 힘든 날이 계속됐습니다. 사건 초기인 2012년부터 일인시위, 기자회견을 쫓아다닌 지 5년이 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가습기 살균제 피해대책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인의 사례는 ‘관련성 낮음’의 3단계 판정을 받았습니다. 정부에서도, 옥시레킷벤키저 회사에서도 아무런 대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학교도 그만둘 정도로 방황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수십 차례의 일인시위와 집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자 피해자들끼리 언성이 높아지고 등을 돌리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던 여름과 겨울이 몇 번 지나고 그에게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늘 걱정을 끼치던 아들이 병역을 마치고 취직을 했습니다. 장래의 직업에 대한 꿈도 생겨 앞길을 개척해가고 있다고 합니다. 딸은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친정아빠에게 손주를 안겨주었습니다. 아픈 몸도 여러 차례 수술을 받고 많이 좋아졌습니다. 요즈음은 안양천에 나가 한 시간씩 근력운동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표정도 밝아졌습니다. 택시 안에서 틈만 나면 손주 사진을 보고 동영상의 재롱을 보며 웃는다고 합니다.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억울하게 스러져간 부인을 위로해주고 대책을 제시해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5월 24일 수요일 낮 12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가습기 살균제 해결책 제시를 촉구하는 일인시위 2일차에 피해자 이재성씨와 참여연대 장동엽 선임간사 그리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김지원씨 등이 함께 했습니다. 이재성씨는 10여년간 애경 가습기 메이트,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 등의 제품을 사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들은 천식과 기관지염 그리고 중이염, 아토피피부염 등이 발생했고, 이재성씨 본인은 중이염, 피부질환, 면역질환, 갑상선독증, 간독성 등 여러 형태의 건강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정부 판정에서 아들은 4단계 ‘관련성 거의 없음’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재성씨 본인은 판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겨울 광화문 촛불광장에서의 캠페인 때도 자주 참석했고 요즘 매달 한 번씩 진행되는 피해자 워크숍에도 매번 참가합니다. 5월 14일 인천의 국립생물자원관에는 아들 수민이와 함께 했습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양로원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돕는 일을 하는 그에게 2주일에 한 번 평일 쉬는 날이 있는데 오늘입니다. 그가 일인시위를 한 것이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도 희망이 전해지기를 기원합니다.

6월 5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매년 정부는 이날 환경의 날 행사를 열고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환경피해자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는 자리였습니다. 올해 환경의 날은 달라야 합니다. 촛불시민의 힘으로 들어선 새 정부가 사회적 적폐를 하나하나 청산해 가는 요즈음입니다. 새 정부 초기에 열리는 환경의 날 행사에 대통령이 참석해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피해자들을 비롯한 환경피해자들을 초대해 이들을 위로하고 그간의 정부의 잘못을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자리로 만들면 어떨까요?

오는 8월 31일이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알려진 지 7년이 됩니다. 100여일 남았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문제는 새 정부의 개혁과제 1순위로서 반드시 제대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6월 5일 세계 환경의 날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위로하고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 정부가 아래와 같은 피해자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여줄 것을 호소합니다.

피해자들은 이러한 요청을 청와대에 전달하고 실현하기 위해 6월 5일 환경의 날까지 시민단체 회원이 같이 일인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


<문은숙 ((사)소비자와함께 공동대표 / 소비자정책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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