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들어오고 나간 오디오가 집 한 채 값이다, 고급 승용차 값이다 하는 물량 투입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물량 투입으로 반드시 천상의 소리가 나지는 않는다, 하며 ‘옆그레이드’를 해온, 일종의 비겁한 변명자에 가깝죠.”
“생각보다는 어둡네요”
질문자는 그렇게 물었다. 생각보다? 무슨 뜻일까? 나는 손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티팟의 찻물을 작은 잔에 따르다가 잠깐 멈추었다. 생각보다 어둡다니?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낮잠이라도 자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긴 밖은 초봄의 햇살이 운동장을 적시고 있었다.
“밝은 거보다는 그저 뭐, 조금은 어두운 게 좋지요.”
오디오를 듣는 행위는 스스로 욕망해온 이상적인 소리를 재현하는 것이다. 한 음악애호가의 연구실 풍경. / 정윤수
수천 만원대의 앰프에 스피커는 다섯 개
건성으로 대답하며 나는 질문자와 마주앉았다. 비좁은 연구실, 절반을 뚝 잘라서 출입문 쪽으로 작업 테이블을 놓고, 그 나머지를 오디오 세팅을 위한 최소한의 영역으로 남겨 두었다. 질문자는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공간이 좁아 보이는데, 소리는 좋습니다.”
“…… 소리,라기보다는 음악이죠.”
“…….”
“그렇지만 낮에는 맘대로 틀기 어렵습니다. 양 옆으로 공부하시는 선생님들 계시는데 음악이나 틀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수는 없지요. 게다가 제가, 뭐 그리 시간의 양으로, 늘 음악을 틀어놓고 지내는 쪽은 아닙니다.”
“그럼 언제?”
“아무래도 밤이죠. 황현산 선생의 말대로 밤이, 선생이죠. 참고 참았다가, 밤 10시 넘어서 한두 곡 집중해서 듣습니다.”
“오랫동안 음악을, 또 오디오를 뭐라 해야 할까요? 들어오셨는데요.”
“둘 다 맞습니다. 어떤 때는 내가 음악을 듣는 건지 오디오를 듣는 건지 종잡기 어려울 때도 있지요. 그렇기는 해도, 장안의 고수들에 비하면 저는 이제 막 가갸거겨를 뗀 정도죠.”
“그래도 30년 세월이고 그동안 교체하며 들은 오디오들, 셀 수 없을 정도 아닌가요?”
“일반적인 경우에 비하면 그렇지요. 그러나 그동안 들어오고 나간 오디오가 집 한 채 값이다, 고급 승용차 값이다 하는 물량 투입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물량 투입으로 반드시 천상의 소리가 나지는 않는다, 하며 ‘옆그레이드’를 해온, 일종의 비겁한 변명자에 가깝죠.”
“그러니까 물량 투입이 일단은 전제조건이다?”
“최소 조건이라고 해두죠. 오디오는 공학기술이고 공학기술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나름의 관점과 철학이 절대적이다, 이 점을 강조합니다. 김갑수라는 분이 있지요. 제 고교 은사님이셨고 문화판에 있으면서 멀리서나마 늘 뵙는 분인데, 고교 1학년 때 뵌 그 분의 오디오에 대한 욕망은 30년이 넘도록 여전하고 오히려 더 풍부하면서도 집요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을 두고 물량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 분은 그때 이미 수천 장의 음반과 두어 개의 오디오 세트에 희귀한 커피 머신으로 저를 감화시켰던 분이라서, 오늘날 이 분이 마포의 ‘줄라이홀’이라는 널찍한 지하 작업실에 3만 장 가까운 음반과 일곱 개의 서로 개성이 다른 오디오 세트로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뭐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커피향으로 그 지하에서 흠향하는 것은, 결코 물량 투입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서 그리 된 것도 아니고 돈으로 또 그리 한 것도 아닙니다. 유한한 존재가 평생 욕망하고 집착하여 일군 창백한 도시의 비좁은 해방구이지요.”
“아하!”
“그러나.”
“그러나?”
“이 또한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10여 년 전, 원하는 스피커가 오디오 사이트에 나왔길래 한밤중에 사러 간 일이 있습니다. 돈으로 치면 고작 150만원 정도? 어마무시한 스피커 시장에서 150이면 적절하게 즐길 정도의 소품이지요. 현악을 집중적으로 듣기 위하여 그 스피커를 찾다가 마침 내놓는 분이 있어, 댁을 방문했는데….”
“……했는데?”
“하아, 이 분은 제가 그저 현악이나 쫌 들어볼까 하고 찾던 작은 스피커를 무려 다섯 개나 쓰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거실에 놓고 수천 만원대의 앰프로 대편성 관현악을 듣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재에 놓고 진공관으로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 방에는 또 하나가 있었는데, 웨스턴일렉트릭 같은 고색창연한 저 2차 대전 전후의 진공관 앰프가 아니라 21세기 들어 호평을 받은 이탈리아의 맵시 있는 진공관에 물려 놓았더군요. 아리아를 주로 듣는다고 했습니다. 결이 다르다고 했죠. 나머지 두 개는 일하는 곳에 있고, 거기에는 또 막강한 출력의 앰프들이 주전자만한 작은 스피커를 온통 흔들어대고. 사진작가 윤광준 선생도 그런 경우지요. 몸체는 전혀 다르기는 한데, 이 분은 탄노이 오토그래프를 일산 작업실의 정중앙에 부처님처럼 모셔놓고 꽤 많은 앰프들이 그 앞으로 참배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러기를 30여년이 넘지요. 말하자면 어떤 소실점, 감각의 소실점, 욕망의 소실점. 그 하나를 향해 나머지 모든 비용과 시간과 기계들이 악착같이 맹진하는….”
“도대체 이상적인 소리가 어디 있나요”
“연주자들이 악기 연주하듯이?”
“그런 얘기를 일본의 오디오 평론가 스가노 오키히코가 오래 전부터 피력해왔죠. 자신의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필사적으로, 온갖 스피커와 앰프와 그밖의 전원이라든가 부품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기 욕망의 속도와 감각의 특질을 총동원하여 궁극적으로 갈망하는 음악을 지향한다, 그러니 직업 연주자라 할 만합니다.”
“실제 공연은?”
“물론 중요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저도 그렇고, 대개의 애호가들이 공연장을 찾죠. 그러나 공연장의 어떤 소리를 자기의 공간에서 재현한다, 이게 스가노라든가, 장안의 고수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공연장에 못 가거나 혹은 공연장에서 들은 소리를 자기 방에서 다시 듣는다, 이게 아니라면?”
“서로 다른 별개의 세계지요. 실제 공연장 또한 완벽한 조건이거나 최상의 연주는 당연히 아닙니다. 어떤 지향일 뿐. 오디오를 듣는 행위 또한 실제 공연장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별도의 세계, 즉 스스로 욕망해온 이상적인 소리를 위하여 자신만의 공간에서 필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공연장에 못 가니까 듣는다거나, 오디오보다는 공연장 소리가 근본이고 원천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적인 소리가 실재하는가요?”
“바로 그 점이 맹점이자 무한루프를 돌게 하는 욕망의 원천입니다. 스가노의 말을, 또는 수많은 고수들의 열병을 옹호하자면, 도대체 이상적인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플라톤의 철인국가는 어디 있으며 중세 신부들이 기도했던 낙원은 어디 있으며 헤겔의 국가이성은 또 어디 있습니까? 다만 당대에 그 어떤 이상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가고 뒤집어 업고 또 한 걸음 가는, 그 걸음이 어쩌면…. 우리 삶이 그러하듯, 오디오의 소리 또한 실재하는 것의 물리적 재현이 아니라 스스로 갈망한 궁극의 이상적인 세계를 향한 일상의 기도이고 220볼트 전기를 써서 추상적 욕망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이며 유한한 존재가 초월을 향한….”
…… 문득 대답하다 말고 멈췄다. 질문자는 어디 있는가. 온데 간데 없다. 봄이라고 하나 아직은 3월이나 연구실은 서향으로 물러난 빛을 잃고 더 어둑해졌다. 김우창 선생이 ‘고도의 집중적인 반복과 미묘한 변주에서 오는 초월의 한순간’이라고 했던, 바흐의 평균율이 찰랑대고 있었다. 봄이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벌써 잠결이라니.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