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들의 재벌 개혁 공약, 대기업 위주 경제구조 개선 강조
2012년 대선의 최대 화두가 경제민주화였다면, 이제는 재벌개혁이다. 4년여 전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민주화 약속은 결국 정경유착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는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과 맞물려 ‘대통령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끌어내린 이유가 됐다.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파면으로 열리게 된 조기 대선에서 재벌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재벌의 경영권 세습을 위한 정경유착의 민낯이 드러나며 대기업의 불공정행위 근절 수준에 머물렀던 경제민주화 요구가 기업 지배구조 개선 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 제공 혐의를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역시 정치권의 재벌개혁 논의에 불을 붙였다.
최근 여야 대선주자들이 앞다퉈 내놓는 재벌개혁안은 2012년 대선 때보다 수위가 높다는 것이 대체적 평이다. 재벌개혁에 대한 촛불민심이 표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각론은 달라도 대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공정거래를 확립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역대 정권 내내 불거졌던, 선거철의 지키지 못할 약속에만 그쳤던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복권 불가론도 동일하다. 다만 가장 뜨거운 쟁점인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 및 경영권 세습 문제에 대해서는 주자별로 온도 차가 있다.
야3당이 1월23일 국회에서 개최한 재벌개혁 관련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주제토론을 하고 있다. / 최운열 의원실 제공
민주당 대선주자 재벌개혁안 ‘기싸움’
탄핵정국에서 대세론을 굳혀온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자신의 경제공약 1호로 재벌개혁을 발표하며 일찍이 의제 선점에 나섰다. 지난 1월 싱크탱크인 국민성장이 주최한 포럼 ‘재벌적폐 청산, 진정한 시장경제로 가는 길’에서 재벌기업 지배구조 대수술을 천명하는 등 관련 공약을 발표했다. 그는 “재벌개혁 없이는 경제민주화도, 경제성장도 없다”면서 재벌 가운데서도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기업의 지배구조부터 손보겠다고 말했다. 30대 재벌의 자산 중 범삼성가의 자산이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고, 4대 재벌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만큼 핵심 환부를 집중적으로 손보겠다는 것이다.
이밖에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기 위한 집중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하고, 노동자 추천 이사제를 공공부문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해 견제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 같은 정책은 상법 개정안 등 국회에서 입법절차가 논의됐던 경제개혁 법안과 일부 내용이 겹친다. 아울러 “무늬뿐인 지주회사로 전락해 재벌의 문어발 확장의 수단이 되고, 3세 승계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주회사의 요건과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반기문 카드의 조기 퇴장으로 중도표 흡수를 노리고 있는 안희정 충남지사 역시 지주회사에 대한 규제 재정비 및 순환출자 금지 등 재벌의 지배구조 개혁을 주장하지만, 특정 기업을 겨냥할 것이 아니라 불공정 경제구조를 깨는 일이 중요하다며 문 전 대표를 견제하고 있다. 안 지사는 “정부 주도형 시장개입, 개혁 주체와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서 적폐 청산 차원에서 4대 기업부터 개혁하겠다고 한 문 전 대표와 차별화 전략에 나섰다.
민주당 주자 중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는 이재명 성남시장은 아예 ‘재벌체제 해체’를 전면에 내세우며 선명성 부각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야말로 ‘해체’라고 부를 만한 극단적인 조치를 통해 재벌기업이 재벌가문으로부터 독립해 정상적인 경제원리에 따라 경쟁력을 키워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게 핵심”이라며 개혁을 넘어선 ‘재벌체제 해체’를 주장한 것이다. 법인세 인상 및 재벌의 부당이익 몰수법인 한국형 ‘리코법’ 제정 역시 예고하며 당내 1위 주자인 문 전 대표가 법인세 증세에 소극적이라고 공세를 퍼부었다.
안철수 “공정위 강화”, 심상정 “재벌 세습 금지”
문 전 대표는 “증세에는 순서가 있으며 법인세 실효세율을 높이는 것도 증세”(더불어민주당 대선주자 2차 합동토론회)라는 입장을 밝혔다. 세법상 규정된 법인세 명목세율을 높이는 것에 앞서 대기업의 각종 비과세·감면제도를 축소해 실효세율을 높이는 것을 먼저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법인세 명목세율을 30%로 높인다면 세수는 늘어날지 몰라도 오히려 우리 경제를 크게 위축시키고 해외기업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500억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는 대기업에 적용하는 법인세율을 현행 22%에서 30%로 올리자는 이 시장의 의견을 반박했다.
한국 경제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동물원’에 빗댔던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아직 구체적인 재벌개혁 관련 공약은 내지 않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를 ‘경제 검찰’ 수준으로 강화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공정위가 기업의 불공정 관행을 집중조사해 엄벌하고, 필요 시 계열분리 명령 같은 강한 제재조치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주자인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재벌의 3세 경영세습을 금지하고, 계열분리 명령제도 및 기업분할제를 도입해 총수 일가의 독식을 막겠다고 밝혔다.
유력한 보수후보가 없는 초유의 대선 판도에서 범여권 후보들도 재벌개혁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총수 일가의 개인 기업 설립을 금지해 일감 몰아주기를 원천 금지하고,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는 한편 징벌적 손해배상제 및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당 남경필 의원은 ‘시장친화적 규제’를 강조하며 현행 공정거래법, 금융 관련법, 세법 중 재벌개혁에 필요한 규정을 모아 대기업집단법을 특별법으로 제정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금산분리에 대해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금산분리는 굉장한 걸림돌”이라며 완화를 주장했다. 이는 문재인, 안희정 등 야권 주자들의 입장과는 상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