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만의 말러와 임헌정의 말러는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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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만의 말러와 임헌정의 말러는 같을까

입력 2017.02.14 10:14

하긴 말러 자신도 스스로의 역사적 경로, 문화적 기억, 복잡한 감수성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2번’ 교향곡 같은 불가해한 비극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인물로 다윗이 있다. 모세, 아브라함, 야곱 등 수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다윗은 유럽의 기독교 문화에 다양하고 복합적인, 때로는 이율배반적인 상상과 기도와 회개의 원천이 되는 인물이다.

‘성 금요일’, 즉 예수가 혹독한 심판과 고난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거룩하지만 참담하게 죽어간 인류사적 순간을 기독교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깊은 참회와 거룩한 기도의 순간으로 삼아왔다. 그로부터 사흘 뒤의 부활절 미사도 엄수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예수의 죽음의 순간에 치르는 ‘성 금요일’의 전례야말로 가장 신실한 종교적 열망의 순간이다.

이를 위해 수많은 음악가들이 거룩한 음악을 오랫동안 만들어왔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음악을 익히고 로마의 거룩한 성당에서 평생 헌신한 알레그리의 ‘미제레레’일 것이다. 해마다 성 금요일의 거룩한 참회의 밤에 바티칸에서는 교황이 친히 미사를 주관하며 스스로 무릎을 꿇어 속죄를 하는데, 그때 울려퍼지는 음악이 바로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다. 가장 비참한 순간에 부르는 가장 거룩한 노래다.

같은 다윗을 묘사한 조각상이라 해도 시대와 예술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사색하는 표정의 미켈란젤로 다윗(좌)과 역동적인 베르니니의 다윗(우). / 정윤수

같은 다윗을 묘사한 조각상이라 해도 시대와 예술가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사색하는 표정의 미켈란젤로 다윗(좌)과 역동적인 베르니니의 다윗(우). / 정윤수

그런데 그 대본이 뭐냐 하면 다윗의 참회가 실린 ‘시편 51편’이다. 내용인 즉, 부하 장군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갖은 궁리를 하고 심지어 전장을 누비는 당당한 부하를 죽이기까지 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수많은 ‘치정살인’ 후에 다윗이 참회한 내용이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는 진실로 너무도 거룩해 ‘치정 막장극’의 주인공이 참회한다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다.

다윗상의 외적 재현이 서로 다른 이유

이 곡뿐만 아니라 다윗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여러 작품을 보면, 각 시대마다 유럽의 여러 지역마다, 특히 아예 문화와 습속을 오랫동안 남북으로 나눠온 알프스 남쪽과 북쪽마다 다윗을 재현하는 방식이 매우 상이함을 알 수 있다. 지면 특성상 음악으로 설명하기보다는 미술로 예를 들면 쉽겠는데, 서양 미술사의 고전이 되는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과 베르니니의 다윗 상을 비교해보자.

르네상스 전성기인 1504년에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다윗 상은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을 필두로 해 오랫동안 드높은 수준의 평가를 받아온 걸작이다. 견실하고 의연한 형상을 한 다윗은 무게 중심을 약간 뒤쪽으로 한 상태에서 괴력의 골리앗을 응시한다. 반면 베르니니의 다윗 상(1623~24)은 한달음에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면서 거침없이 용맹한 힘을 펼치는 형상이다. 역동의 힘을 강렬하게 뿜어내기 위해 베르니니의 다윗은 몸을 약간 숙인 상태이고 금방이라도 투석전을 승리로 장식할 듯 온몸의 힘이 뒤에서 앞으로 약진한다. 미켈란젤로의 다윗은 사색하는 표정이고, 베르니니의 다윗은 입술을 꽉 깨물고 전진하는 형상이다.

혹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성서를 읽은 것일까. 미켈란젤로의 판본에는 다윗이 사색하는 젊은이로 묘사됐고, 베르니니의 성서에는 다윗이 용맹전사로 묘사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읽은 성서는 똑같은 내용인데 100여년의 시차, 즉 르네상스 전성기와 초기 바로크가 그 묘사들의 외적 재현을 서로 다르게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이 이 점에 주목해 미켈란젤로의 다윗이 중세를 벗어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근대를 응시하며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고자 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적 모색을 담아냈다면, 마침내 중세가 종막을 고하고 유럽 곳곳에서 군주들이 출현하여 30년 전쟁을 전후로 하여 강력한 군사력과 팽창하는 산업의 역량을 도모하는 17세기가 된 이후, 베르니니는 거침없이 앞으로 맹진해야만 하는 근대 초기의 인간적 상황을 재현한 것이라고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요컨대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가 들려줬고 다윗과 베르니니의 상이한 다윗 상이 보여준 것처럼, 같은 소재일지라도 시대와 지역과 문화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무수한 재현과 변용이 벌어지는 게 역사적 지평 위의 문화예술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는 왜 서양 예술을, 그 미술을, 그 음악을 듣는가 하는 질문을 지난주 내내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지난주에 몇몇 사람들이 인도와 쿠바로 여행을 떠났고, 그 시간에 나는 시내 어디에서 유럽의 도시 문화와 예술에 대해 강의를 했다. 인도와 쿠바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그리고 내가 베를린이나 드레스덴 같은 도시의 역사와 예술에 대해 강의를 하는 내용들이 과연 델리 사람들, 아바나 사람들, 드레스덴 사람들의 지식이나 감성과 어느 만큼 일치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일제시대까지 소급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유럽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환상’은 문화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전쟁 직후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던 예술가들이 고국의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이나 뮌헨의 슈바빙 거리에 대한 짙은 애착의 묘사들을 볼 수 있다. 그 도시들이 실은 제국의 심장이며 온갖 이념으로 격렬한 전투장소가 됐음을 모를 리 없겠지만, 전후 세대의 감각은 그런 지평까지 살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진 못했다. 1970~80년대를 청년기로 지낸 예술가나 지식인들이 1990년대 이후 유럽이나 인도에 가서 쓴 여행기는 전후 세대와는 또 다른 감수성을 보여준다. 이념이 휩쓸고 간 1990년대 이후의 유럽 정황 속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투영하는 인상기 혹은 인도나 티벳을 부유하며 포착한 일종의 명상일기 등은 그 지역의 혼잡한 역사성이나 격렬한 정치상황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게 사실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에 들어 유럽 배낭여행이나 맛집 여행은 물론 오지 체험이나 순례기행 같은 글들이 쏟아져 나오는 형국이다. 과연 이러한 체험과 글들은 유럽을 포함한 각지의 상황이나 정보와 얼마나 흡사한 것일까.

재해석되고 덧붙여지는 사건과 인물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이런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금 쓰는 중이다. 거꾸로 묻건대, 과연 현지 사람들도 자기들의 도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나날이 변하니 누구도 잘 모를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갈 때마다 맛집도 달라지고 명소가 생겨난다는 식의 정보 얘기가 아니다. 수많은 책과 다큐멘터리는 현지 사람들조차 자신들의 역사적 경로나 문화적 기억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함을 증명하고 있다. 샤를마뉴는 과연 프랑스 왕인가 독일 왕인가?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동상과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베토벤 동상은 과연 같은 사람인가?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가 주도한 ‘기억의 장소’ 연구는 프랑스의 수많은 기념비와 행사와 음식과 사건들이 다양한 상황과 정보의 해석에 의해 일종의 ‘기억 투쟁’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밝힌다. 재해석되고 덧붙여지고 재평가되면서 특정한 장소와 기념비와 사건과 인물의 의미가 끝없이 생성되고 구성되는 것이다.

지난주 내내 말러를 들었다. 이달 말, 임헌정 지휘의 코리안심포니의 말러 교향곡 2번을 예약했기 때문에 여러 음반을 들었는데, 특히 여느 지휘자와 달리 매우 빠른 속도로 강직하게 끊어내는 체코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에게 거듭 충격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찾아보니, 체코 출신의 드보르작이나 스메타나, 그리고 말러에 대해 전후 세대는 ‘동구라파의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고, 1980~90년대 이후의 감상자들은 유럽의 현대사를 활용한 감상평을 많이 썼다. 복잡하기로 따지면 체코 일대야말로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 인종, 언어, 국경, 문화 등에 뒤엉킨 곳도 없을 것이다. 노이만의 말러와 임헌정의 말러는 같은 사람일까. 하긴 말러 자신도 스스로의 역사적 경로, 문화적 기억, 복잡한 감수성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2번’ 교향곡 같은 불가해한 비극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들은 것일까. 우선 ‘동유럽의 우수가 짙게 배어 있는’이라는 식의 희뿌연 묘사는 버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우환이 유학 시절 파리에서 본 것은 파리가 아닌가? 전혜린이 뮌헨에서 본 풍경은 뮌헨이 아닌가?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쓴 유럽 사상기행은 또 어떠하며, 지금 인도나 쿠바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본 인도나 쿠바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자의 ‘환상’일 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조건, 우리의 심성, 우리의 문화적 맥락에서 김수영도 읽고, 카프카도 읽고, 전인권도 듣고, 말러도 듣는다.

우리의 이러한 오랜 문화적 기억의 흐름과 맥락이 무엇이며, 왜 당대마다 파리를, 베를린을, 아바나를 달리 받아들였으며, 카프카나 말러를 재해석해 수용했는가, 요컨대 우리의 문화적 기억으로 형성된 드레스덴과 베토벤이 어떠했는가를 더듬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겨울 내내 유럽의 도시 문화와 예술에 대해 강의하며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한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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