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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도 블랙리스트 있었나?

입력 2017.01.24 17:41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서양사학회 등 주요 학술단체들 정부 지원서 빠져

2015년 10월 30일 서울대 캠퍼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58회 전국역사학대회 때문이었다. 전국역사학대회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국내 역사학계의 최대 학술행사다. 제58회 대회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소통’을 공동주제로 택했다.

‘국정교과서 반대’ 적극 동참해 보복 의혹

대회에 참여한 28개 학술단체는 대회 첫날 오전 공동주제 발표를 마치고, 오전 11시50분쯤 문화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엄중히 요구하고, 국정교과서 제작 불참을 촉구한다.” 28개 학회에는 미술사, 경제사, 과학사, 여성사학회 등 여러 분과사학회와 지방사학회(호남사학회, 영남사학회 등), 시대사학회(한국중세사학회, 고대사학회 등) 등 다양한 학술단체들이 포함돼 있었다. 성격과 관심사가 다른 여러 학술단체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례적 일이었다. 학자들은 “교과서 국정화는 역사 해석과 교육을 독점하고 사유화하려는 정치권력의 의도”라고 밝혔다. 방해를 시도하며 아수라장이 됐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반대여론이 본격화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학자 90%가 반대한다는 점은 여론 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5년 10월 30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58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양호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날 역사 관련 28개 학술단체는 교과서 국정화를 비판하고 국정교과서 집필 불참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 연합뉴스

2015년 10월 30일 서울대에서 열린 제58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양호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개회사를 하고 있다. 이날 역사 관련 28개 학술단체는 교과서 국정화를 비판하고 국정교과서 집필 불참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 연합뉴스

2016년 12월 16일 한국연구재단은 2016년도 학술지 지원사업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역사연구회, 서양사학회 등 주요 학술단체들이 빠져 있었다. 학계에서는 석연치 않다며 혹시나 역사학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역사교육연구회는 제58회 대회의 주관 단체였다. 이 학술단체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4년 연속 학술지 발행 지원에 선정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2015년 12월부터 서양사학회장을 맡은 강성호 순천대 교수는 학계의 국정교과서 반대 움직임에 적극 동참했다. 지난해 11월 30일, 국정 역사교과서 현장검토본이 PDF 파일 형태로 공개된 뒤 서울 종로구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 긴급 토론회에 참여해 세계사 서술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난 11일 긴급토론회에도 참여했다.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연구회, 한국사학회 등은 역사학대회 주관 단체들이다.

교육부에서 한국연구재단을 통해 지원하는 학술비 지원사업 금액은 학회당 150만~800만원 선이다. 기금은 학술지 편집, 발행, 배포 용도로만 쓰게 돼 있다. 학회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1년에 네 번 발간하는 학술지의 경우 절반가량을 지원사업 금액으로 충당할 수 있다. 지원 금액이 나오지 않는다고 학회 활동에 타격을 입을 정도는 아니다. “역사 관련 15~17개의 학술단체들이 지원금에서 배제됐다. 지원신청을 하지 않거나 전년도 성과물이 미진하거나 평가지표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선정에서 배제된다. 한국사연구회(회장 정태헌 고려대 교수)의 경우 지난해에는 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한 중견 사학자는 “지원이 배제된 학술단체의 경우 실제 성과가 미진한 곳들도 있지만 여기는 활동이 괜찮았는데 왜 떨어졌지 의심스러운 경우도 있다. 공교롭게도 학회장들이 국정교과서 반대 활동을 활발히 한 단체들은 지원을 받지 못해서 역사학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슈추적]역사학계도 블랙리스트 있었나?

<주간경향>이 2013~2016년도 교육부와 동북아재단의 인문학 연구지원 내역을 분석한 결과 ‘블랙리스트’라고 부를 만한 단서는 확실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추진과정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겪은 국내 학계가 의심할 만한 정황은 있었다. 지난해 학술지 발행지원 신청 공고는 2016년 8월 30일에 나왔다. 신청기간은 9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였고, 선정공고일은 12월 16일이었다. 청와대에서 교과서 국정화 관련 적극적인 여론 대응을 지시했다는 정황도 학자들이 의구심을 품는 이유다.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여론전이 민감할 때 선정 및 심사가 이뤄진 것이다. 검찰이 확보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에도 박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계획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메모에는 ‘국정화저지네트워크 민중총궐기 대비’ ‘학부모 설득’ ‘전교조 12월 초 선거, 과잉진압 유도’ ‘교과서 쟁점사항 대응논리 개발’ ‘교학사 사례 사소한 실수 방지. 비판세력 빈틈없이 관리’ ‘언론, 유력인사 사전준비’ 등 국정화 반대여론에 대한 구체적 관리지침이 포함돼 있다. 교육부는 실제로 해당 지침을 하달 받은 적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경향신문> 1월 4일 보도에 따르면 시인 겸 소설가 원재훈씨는 “지난해 7월 지역의 한 교육기관에서 강연을 맡았지만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을 한 것을 출판진흥원을 통해 문제 삼았다”고 밝혔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한 문화예술인도 블랙리스트가 되는 마당에 반대여론을 직접 주도하고 논리를 제공한 역사학자들이 과연 비켜갔을까 의구심을 품는 이유다.

“연구비 통해 학자 길들이는 방식 만연”

블랙리스트의 존재 여부에 신중한 의견도 있다. 지원에서 배제된 한 학회 관계자는 “유력 학술지라고 해서 항상 지원금을 타는 것은 아니다. 이번 경우는 모호하기는 하지만 아예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역사연구회는 2016년 하반기 진행된 학술지 발행 지원에서는 배제됐지만 같은 해 11월 28일 경제사학회와 공동주관한 학술대회 ‘한국경제부흥론과 경제개발계획의 연속성’은 연구재단의 후원으로 진행했다. 지원금액은 390만원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 등의 연구지원 사업도 특정 학회가 배제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는 정해진 기준과 지표대로 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주어진 예산에서 신규 학술지, 관심을 덜 받는 분야 학술지의 지원을 위해 예산을 나누다보니 비교적 성과가 낫더라도 항상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는 2013년과 2016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은 2015년과 2016년에 학술지 발행기금 선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최상훈 역사교육연구회 회장(서원대 교수)은 “지표가 부족하니 일단은 그렇다고 보고 이의신청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를 위한 전국 역사·역사교육학자 1562명이 2016년 12월 26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 역사교과서 검토본 분석결과를 발표한 뒤, 즉각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읽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를 위한 전국 역사·역사교육학자 1562명이 2016년 12월 26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정 역사교과서 검토본 분석결과를 발표한 뒤, 즉각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읽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정부가 학계를 주시하고 통제하려고 한다는 데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서울의 한 대학 사학과 교수는 “인문사회학자들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화이트리스트로 관리할 가능성이 높다. 각종 위원회에서 정부의 논리에 권위를 만들고, 특히 교과서 국정화의 경우 역사학계의 90%가 반대하기 때문에 국정화 작업에 찬성하는 10%를 지원하고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유리하다. 학술단체가 아닌 개인이나 대학 연구프로젝트로 지원되는 경우는 알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미화뿐 아니라 과도하게 민족주의·집단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경우가 ‘화이트리스트’에 있을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세월호 참사 때 시국선언을 준비했던 한 연구자는 “정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교수들은 참여를 꺼렸다. 굳이 이슈가 있지 않더라도 연구비를 통해 학자를 길들이는 방식은 만연해 있다”고 말했다.

제58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끌어올린 국정교과서 반대여론은 현재까지 별다른 흔들림이 없다. 교육부는 2017년 모든 학교에 국정교과서를 도입한다는 데서 한 발 물러서 연구학교를 지정해 일부 도입한다고 했지만, 1월 20일 교사 등 기존 고등학교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진 50여명은 집필 거부를 선언했다. 교육부가 국정교과서를 폐기하지 않고 눈 가리기식 국·검정 혼용체제를 운영하는 데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도종환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역사교과용 도서 다양성 보장에 대한 특별법’(국정교과서 금지법)이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통과했다. 교문위는 이와 함께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중단’ 결의안도 가결 처리했다. 이 과정에서 새누리당·바른정당 의원들이 “야권의 일방적 추진”이라고 반발해 퇴장하면서 야권 의원 15명만 전원 찬성으로 의결했다.

정부의 고대사 학술대회 지원내역 알아보니…

학술대회나 사업의 일회적 지원으로 정부가 관리하는 ‘리스트’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관심사는 보인다. 교과서 국정화 당시 정부는 고대사 서술 비중 강화를 예고했다. 학계에서는 고대사에 관한 다양한 연구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지원내역은 어떨까.

지난해 동북아재단의 학술회의 지원내역을 보면 고조선단군학회의 ‘고조선 문화와 사상의 재조명: 동북아시아 지역문화의 접변과 확산을 중심으로’가 선정됐다. 고조선단군학회는 1997년 창립됐다. 한민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학제적으로 탐구하고 민족의 통합과 발전이라는 실천적 과제에 대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표방한다. 국정교과서 집필진인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78)는 2001년 고조선단군학회를 통해 ‘바람직한 상고사 교육방안에 대한 토론문’ 등을 게재했다. 이 학회는 개천절 학술대회를 열고 있으며 북한과 단일민족사를 위한 학술교류도 추진한다. 교육부의 학술회의 지원사업에도 2013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고조선연구 세계화 및 강화도 참성단 세계문화유선 등재를 위한 학술회의’에 1260만원이 지원됐다. 복기대 융합고고학과 교수가 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교육부에서 고대사 연구에 가장 관심을 많이 보이던 해는 2013년이었다.

2015년 경희대 인문학연구원의 ‘고조선 연구의 신지평’에도 동북아 역사재단 학술회의의 지원을 받았다. 민족의 조상으로서 고조선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대국가로서 고조선을 인식하고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토대로 한 연구로 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초 <역사비평>을 통해 전개된 ‘상고사 논쟁’을 촉발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고구려·발해학회도 해마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유목세계와 농경세계의 만남’(2013), ‘고구려와 발해의 경계’(2014), ‘고구려 유산 활용계획’(2015) 등의 학술회의를 개최해 지원을 받았다. 백제와 신라 연구는 고구려 연구에 비해 주목도가 덜함을 알 수 있었다.

[이슈추적]역사학계도 블랙리스트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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