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이 음반에는 ‘눈!’이라고 할 때처럼, 느낌표를 하나 붙여줘야 된다. <December!>, 이렇게 말이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음반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연말의 어느 해 밤에 아주 조금 눈이 내렸다. 새벽 내내 수은주가 영하로 내려간 덕분인지 아침에 운전을 하려고 보니 차창들마다 하얀 눈이 얇게나마 덮여 있었다. 굳이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 수고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로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기에는 조금 불편했다. 마침 뒷좌석에 종이 쇼핑백이 하나 있어 그것을 반듯하게 펴서는 앞 유리창의 눈들을 치우려고 하는데, 꼬마 아이 두 명이 뛰어왔다.
“아저씨, 그 눈 우리 주세요.”
“……눈?”
“예, 그 눈, 주세요.”
눈을? 눈을 달라고? 아이들은 커다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 눈이 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차창의 눈을 종이 쇼핑백으로 곱게 쓸어서 아이들의 비닐봉지 안으로 밀어넣었다. 아이들은 어른 손으로 두어 줌밖에 되지 않는 눈을 받아들고는 뛰어갔다. 가만 보니, 그리고 보면서 생각해 보니, 간밤에 내린 눈의 양이 너무도 야박하여 그것으로 눈사람은커녕 눈싸움을 할 정도도 되지 않았고, 하여 아이들은 차디찬 바닥에 흩날리는 눈을 모으다가 차량들 위에 그나마 얹혀 있는 눈을 주목했던 모양이다. 그렇긴 해도 남의 차에 올라가서 눈을 긁어 모을 수는 없어 조심하던 차에, 내가 앞유리에 앉은 눈을 치우려는 걸 보고는 냉큼 달려온 것이었다.
“아저씨, 그 눈 우리 주세요.”
그 말을 다시 되새겨본다. 내 차에 잠시 얹혀 있던 눈이지만 내 눈도 아니니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불현듯 스치는 생각은 2016년의 겨울은 눈에 너무도 인색하여 ‘첫눈’이라고 할 만한 기억도 선물해 주지 않았고 대설이니 폭설이니 할 정도는 아니라 해도 동네 조무래기 아이들이 눈싸움할 만한 눈도 전혀 내리지 않은, 그런 2016년이었다. 그래도 2017년의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이 겨울, 머지않아 눈으로 덮이는 풍경이 만들어지긴 하겠으나 2016년의 겨울은 인색한 겨울이었다. 아저씨, 그 눈 우리 주세요, 이렇게 간청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되레 미안한 겨울이었다.
조지 윈스턴이 1982년 발매한 앨범
음반 재킷을 예술품으로 등극시킨 December
눈! 이렇게 말할 때마다 떠오르는 음반이 있다. 조지 윈스턴의 <December>. 이 음반에는 ‘눈!’이라고 할 때처럼 느낌표를 하나 붙여줘야 된다. <December!>, 이렇게 말이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이라면 이 음반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음반을 선물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음반을 선물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 음반에 수록된 곡, 예컨대 ‘Thanksgiving’ 같은 곡을 따로 녹음하여 정성껏 선물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음반에 수록된 곡, 예컨대 ‘Peace’ 같은 곡을 선물받아서 밤새 듣고 또 들었다. 그러고는 아마도? 다들 애틋하게 헤어지고 서로 다른 인연들을 맺어 금세기로 넘어왔을 것이다. 아무튼 조지 윈스턴의 계절 연작인 1980년 작
그 후 조지 윈스턴은 일종의 지독한 음악애호가들로부터 차츰 멀어져갔다. 예술작품에 있어 ‘something else’로 지목된다는 것, 사전적 뜻 그대로 ‘그거 말고 다른 것’, 즉 새롭고 참신하며 충격적이어서 유일무이의 ‘다른 어떤 것’으로 지목된다는 것은 영예로운 일인데, 한때 조지 윈스턴은 그러하였으나 금세기 들어선 이후로 너무나 많은 조지 윈스턴들이 등장하여 그의 음악이 지닌 명징한 독자성은 옅어졌다. 카페나 백화점이나 드라마나 광고들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일종의 ‘수많은 이지리스닝의 조지 윈스턴류’가 파생하면서, 날카로운 눈매로 표독스럽게 ‘새로운 그 무엇’, 이른바 독자적인 세계를 가진 예술에 허용되는 수사, 즉 ‘something else’의 리스트에서 누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지 윈스턴이 필청의 리스트에서 누락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조지 윈스턴은 ‘그밖의 무수한 조지 윈스턴들’과는 달리 끈질긴 구도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무렵의 어떤 유행에 편승하여, 실제로는 그런 삶이나 기도를 하지 않으면서, ‘영성’이니 ‘힐링’이니 ‘사색’이니 ‘자연’이니 하는 키워드를 상업적으로 적절히 유용하는 시류 야합의 조잡하고 경박한 피아노 소리와는 다른 결을 지닌 음악가다.
조지 윈스턴 / 정윤수
그의 음악을 섬세한 고려 없이 그저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한데 묶어버리는 일도 무모하다. 뉴에이지 음악이란 1990년대 전후로 등장한 서구의 종교적 음악 문화운동의 하나로, 그 무렵 서구사회를 풍미했던 뉴에이지 종교운동과 연관된 흐름이다. 서구의 기계론적 물질문명을 거부하고 신비주의 혹은 동양사상에 기대어 힐링, 명상, 심리치료 등을 주도한 뉴에이지 종교운동이 애초의 순박한 의도와 달리 기존의 여러 종교들이 가진 역사적 가치들을 거부하고 과도한 신비주의로 흐른 것처럼, 이 명칭으로 분류되는 음악들도 과도한 종교적 열광을 시도하다가 차츰 시들고 말았다.
거룩한 자연성의 위엄 들려주는 윈스턴 음악
조지 윈스턴의 어떤 음악적 표현은 뉴에이지 열풍과 닮아 있긴 하다. 그렇기는 해도 보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그의 30여년 음악 이력을 관통하는 끈질긴 탐미적 태도에 있어, 조지 윈스턴은 뉴에이지 ‘상품’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자연(nature)에서 진실로 배우게 되는 자연성(natural)의 위엄을 들려주는 음악이다. 단순히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연이 지니고 있는 보편타당한 심미적 상태에 대한 끝없는 기도 말이다.
물론 그의 음악은 종교적 차원에서 신비주의 뉴에이지가 아니라 미국의 정통 기독교 문화를 젖줄로 하고 있는데, 그 종교적 바탕과 그의 음악을 반드시 직결하여 들을 필요 또한 없다. 그의 피아노 음악은 뉴에이지냐 정통 기독교냐 하는 물음 이전의 차원에 있다. 그가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인종이나 어떤 나라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꽃이 피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흰눈이 세상을 뒤덮는 풍경에서 하루하루 삶의 고결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음악은 가치 있는 음악이거니와 조지 윈스턴이 오랫동안 그것을 추구해 왔다. 1994년 작 <Forest>를 들어보라. 첫 번째 곡 ‘Tamarack Pines’를 듣는 순간, 당신은 가을에서 겨울 사이 무성했던 잎들을 지상으로 떨군 채 강퍅한 몸으로 겨울을 대비하는 숲의 나무들을 떠올릴 것이다.
「December!」
이 겨울에 이 음반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음반에서 그가 미국 정통 기독교의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담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첫 번째 곡의 제목이 ‘Thanksgiving’인데, 이 곡을 반드시 미국의 ‘추수감사절’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이 세상 어디에서나 사람들은 힘든 일을 하여 마침내 어떤 수확을 하게 되는데, 그 신성한 일에 대한 찬미로서 값진 음악이다. 마지막 곡 ‘Peace’ 역시 특정 교리의 평화가 아니라 모든 평화, 모든 이의 평화, 모든 곳의 평화다.
아, 그런데 아이들은 어디 갔지?
2016년의 겨울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이들은 눈사람도 못 만들고 눈싸움도 못해 보고 겨울의 절반을 보냈다. 2017년에는 눈이 눈답게 내려서 잠시라도 세상의 모든 사물이 흰눈에 뒤덮이고 아이들은 눈밭을 뒹구는, 그런 풍경이 한 사나흘쯤은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그 자연(nature)의 풍경이 인간적 삶의 본성(natural)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