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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면피

입력 2016.12.13 16:48

중국 송나라 때 인물인 왕광원은 하급 관리직 시험격인 진사에 합격할 정도로 학식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늘 권력욕이 많은 게 탈이었다. 왕광원이 권력을 얻기 위해 택한 방법은 ‘실세’들에게 잘 보이는 일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실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하루는 술에 취한 한 고위직 관리가 “내가 때리면 어쩌겠는가”라고 묻자 왕광원은 “그대로 맞겠다”고 답한다. 매질을 당한 뒤 오히려 “실세에게 잘 보여 나쁠 게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친구들은 ‘쇠로 된 얼굴 가죽을 가졌다’는 의미로 ‘철면피(鐵面皮)’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국정조사 청문회장에 등장한 재벌 총수들의 입에 온 국민들의 이목이 쏠렸다. 평소 한자리에 모이기도 힘든 ‘귀하신 분’들인 데다, 민간경제를 이끄는 주역들이라는 점에서 어떤 발언을 할지 기대하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국정조사장에 나온 재벌총수들. / 강윤중 기자

국정조사장에 나온 재벌총수들. / 강윤중 기자

하지만 총수들의 처지가 왕광원과 다를 바 없다는 건 금방 드러났다. “청와대가 말하면 거부하기 어렵다”, “물러나라고 하니 물러났다”고 태연하게 말하는 총수들의 답변은 “때리면 맞겠다”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왕광원은 권력을 탐한 데 비해 총수들은 재물을 탐했다는 정도다. 평소라면 상종조차 안 할 한 ‘중년 여성’에게 자신들이 이용당하고 망신을 당했음에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나 분노조차 찾아볼 수 없는 낯빛이었다.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나 도의적인 책임이라도 지겠다는 반성도 없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연신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최순실에게 돈이 건네진 경위 등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동문서답을 내놓거나 “검찰에서 밝히겠다”며 답변을 회피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 이인원 부회장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청문회에서 답변할 건강상태가 아님에도 면피성 참석을 강행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과거 재벌들이 그랬듯이 “난 모르는 일”로 일관했다. 한진해운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피해자 행색을 내는 데만 급급했다.
철면피에는 ‘강직하고 당당함’이라는 의미도 있다. 정권에 ‘철면피’가 됐다면 총수들이 불려나올 일도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재벌 총수들은 왕광원만도 못하다. 왕광원은 그래도 제 몸으로 때우면 때웠지 남한테 피해는 주지 않았다. 총수들이 실세에게 잘 보이려 ‘매’를 맞는 동안 주주들은 손해를 봤고, 국민들은 노후자금으로 적립해둔 국민연금을 놓고 불안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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