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의 ‘거리에서’가 이명처럼 들려오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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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거리에서’가 이명처럼 들려오는 까닭은?

입력 2016.12.13 13:43

이 노래는 여지없이 사랑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자의 청승맞은 소리이건만, 왜 이 지극히 사소한 실연의 노래가 자꾸 떠오른 것일까.

올해 가을은 광장에서 다 보냈다. 딱 한 번, 1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무슨 일로 지방에 내려갔다 오는 바람에 불가피하게 한 주를 건너뛰기는 했으나, 비록 몸은 군산에서 익산으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광화문광장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열기는 잠시 광화문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으로 이동해 있는 중이다. 아마도 이번 주말 역시 광화문광장은 어떤 의미로든 활활 타오르는 열기로 가득찰 것이다.

꽤 오래전에 김광석의 노래 ‘거리에서’를 좋아했는데, 올해의 차가운 가을에 이 노래가 광화문광장에 어울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강렬한 집합적 열기가 사방에서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때이므로 김광석의 조금은 청승맞고 조금은 사적인 노래가 광장의 한복판에서 울려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제6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3일 청와대 앞 100m 지점인 서울 종로구 궁정동 효자치안센터와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박근혜 대통령 퇴진촉구 ‘제6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3일 청와대 앞 100m 지점인 서울 종로구 궁정동 효자치안센터와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거리에 가로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검붉은 노을 너머 또 하루가 저물 땐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그런데, 지난 주말의 광장에서, 시청앞에서, 청운동 네거리에서, 이 노래 소리가 이명처럼 자꾸만 들려왔다. 누가 곁에서 불러주는 듯했다고 하면 실은 너무 심한 과장일 것이고, 내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그 곳으로 떠나버린 후
사랑의 슬픈 추억은 소리없이
흩어져 이젠 그대 모습도
함께 나눈 사랑도 더딘 시간 속에 잊혀져가요

엄청난 인파 속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광장에서,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구호와 노래가 도심을 가득 채우는 밤의 용광로 속에서, 나는 왜 김광석의 노래 ‘거리에서’를 떠올렸을까. 이 노래는 여지없이 사랑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자의 청승맞은 소리이건만, 지금 이 광장에는 100만이 200만이 되어 마침내 그 숫자를 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질 정도로 차고 넘친 집합적 열광의 광장이 되었는데, 왜 이 지극히 사소한 실연의 노래가 떠오른 것일까.

짐멜 “도시인은 자극 통한 순간 충족 추구”

19세기 중엽 이후 형성된 사회학의 거두들 중에서 현대 도시의 정서와 감각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진 학자는 짐멜인데, 그는 ‘대도시와 정신적 삶’에서 도시인은 “영혼의 한가운데 확실한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자극과 센세이션, 외적 행위를 통한 순간적 충족을 추구”한다고 썼다. 강의를 바탕으로 한 이 글이 발표된 해가 1903년인데, 이때 이미 유럽의 대도시들은 온갖 이미지로 범람하였고 이에 짐멜은 수많은 외적 자극과 내적 갈등에 의해 현대인은 ‘신경과민 증상’에 걸린다고까지 표현하였다.

위의 글에서 짐멜은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오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썼다. 이러한 시각 경험에 의하여 현대인은 “사물 자체를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증상에 함몰된다고 짐멜은 썼다.

벤야민은 짐멜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대도시를 배회하고 그 거리에서 서성거리는 ‘산책자’라는 경계선 바깥의 존재를 상정하였다. 이 산책자는 문화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전반의 유럽 도시 곳곳에서 나타난 유형으로, 그 초기에는 개인적으로 무능하고 사회적으로 무용한 자, 하릴 없이 빈둥거리는 자, 맹렬한 속도로 전진하는 산업사회에서 이탈된 자 정도로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몇몇 사상가와 작가들에 의해 별도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이 산책자인 작가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쓴 바 있으며, 에드가 앨런 포는 <군중 속의 사람>에서 “음울하고 넋 나간 듯한 모습”의 산책자를 묘사했다. 짐멜 또한 현란한 도시의 리듬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내적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개인을 상정한 바 있다.

‘김광석 다시부르기1’ 앨범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광석 다시부르기1’ 앨범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벤야민의 산책자 역시 기본적으로는 “위험한 교차로에서는 신경의 자극들이 마치 건전지에서 나오는 에너지처럼 잇달아 그의 몸속을 관통”하는, 그런 상태에 내몰리는 도시인이다. 그런데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집중적으로 검토한 끝에 산책자란 도시의 광포한 속도에, 현란한 이미지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마치 “전기적 에너지가 축적된 곳 속으로 뛰어들 듯” 도시 한복판으로, 거대한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 충격을 스스로 견뎌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자 하는 자라고 명명하게 된다.

다음의 문장은 벤야민이 말한 산책자가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평상시에는 군중들로 붐비던 광장이 가두투쟁에서 인적이 끊긴 모습으로 산책자의 눈앞에 펼쳐질 때 비로소 산책자는 대도시의 현실을 왜곡되지 않은 모습으로 직시하게 된다.” 여기서 벤야민이 말하는 군중의 가두투쟁이란 광화문광장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대도시의 거대한 소비문화에 이끌려 도시를 배회하고 구경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따라서 벤야민의 산책자는 이러한 무리로부터 조금은 벗어나서 대도시의 속도와 이미지와 굉음을 사유하는 자를 말한다.

광장 가득 채운 사람들은 우중이 아니다

물론 이 가을의 광장, 그곳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결코 군중이나 우중이 아니다. 단순히 숫자를 세서 판별하고 마는 대중이 아니다. 낱낱의 사람들이 그곳을 가득 채운 것일 뿐, 그 낱낱의 기호·성향·감각·취향은 서로 다르며, 또한 마땅히 다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광장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청와대를 향해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한다.

그 흥미로운 증거가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독특한 깃발들이었다. 이번의 광장에도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혹은 각 대학의 총학생회 깃발이 위엄 있게 펄럭였지만 동시에 풍자와 유머의 독특한 깃발들 또한 곳곳에서 이목을 끌었다. ‘장수풍뎅이연구회’를 시작으로 하여 범야옹연대, 햄네스티, 트잉여연합, 민주묘총, 어부바연합, 전견련(전국견주연합회), 사립돌연사박물관 같은 깃발들은 100만, 200만의 광장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를 말해준다. 인터넷 시대에 맞게 ‘ㄷㄷㄷ’나 ‘으어’ 같은 깃발을 흔든 사람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혼자 온 사람들’이라는 깃발이 있었다. 이 질식할 듯한 헬조선에서 지극히 나약한 개인이 되어 혼밥을 먹고 혼술을 마신 사람들. 마땅히 어떤 모임이나 연합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그들도 혼자서 거리로 나와 광장으로 청와대로 걷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참에 혼자 온 사람들끼리 모여보자는 것이 그 깃발의 뜻이었다. 이렇게 하여 광장은 가득 채워지게 되었고 더욱 아름답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전철을 타기 위해 경복궁역으로 걸어가면서 내 귓가에 들려오던 김광석의 노래는 실연한 ㅈ사람의 처연한 노래이기도 했지만 이 거리에 혼자 나온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이기도 했다.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왠지 모든 것이 꿈결 같아요
옷깃을 세워 걸으며 웃음지려 하여도
떠나가던 그대의 모습 보일 것 같아
다시 돌아보며 눈물 흘려요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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