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안에서의 민주주의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 전반의 민주적 역량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구나 궁극적으로는 먹고살기 위해 부딪혀야 하는 일자리 민주주의의 문제에 가닿을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이라 들었다. 그렇지만 삶의 유비(analogy)로 사용하면 그럴 듯하다. 그것이 사랑이건 우정이건 사람을 만나고 정들다가 헤어지는 과정이 그렇다. 어느 하루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은 이미 그 안에 관계의 전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알랭 드 보통이 사랑과 여행의 공통점을 지적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떠나기 전의 설렘, 떠났을 때의 지침, 지루함, 그리고 마침내 헤어짐, 그 뒤에 남는 회한, 그러나 다시 떠남을 계획하는 것, 하나의 큰 순환 속에 여러 개의 비슷비슷한 작은 순환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이루어진 큰 순환은 더 큰 순환 속에서 하나의 작은 구성부분을 이룬다.
넋두리가 길어졌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권력교체의 과정에 관해 얘기하려 함이다.
미래라이프대학이라는 낯선 이름의 단과대학 신설문제로 시작된 이화여대 사태는 뜻밖의 인물과 연결되면서 최고 정치권력의 스캔들로 옮아갔다. 문화니 미용관리니 양자를 이어주는 가십거리도 한 둘은 아니다. 그렇지만 권력의 질주와 그에 대한 저항, 다시 집착을 연상할 정도로 끈질긴 권력의 대응, 끝내 권력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국가권력을 둘러싼 드라마의 결말을 예고하는 듯하다.
권력의 힘을 꺾는 것은 물리적 힘뿐
학내 문제에 경찰을 불러들인 대학총장이 이른바 86세대(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나를 포함한 그 또래들에게 있어 캠퍼스 구내에 상주하다가 여차하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던 사복경찰의 모습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던 만큼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야만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물질적 이해관계, 그 모든 것을 떠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총학생회를 배제하고 지도부 없는 ‘느린 민주주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사결정방식은 신선했지만 답답한 느낌을 주었는데, 바로 야만적 폭력에는 체계적으로 때로는 대항폭력으로 맞서야 비로소 정당한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경험칙이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정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학내에 진입한 경찰들에 맞서며 걸 그룹의 노래를 합창하는 어린 여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규모와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촛불집회의 모습 또한 매우 비슷하다. 코앞에 100만명이 모여 물러가라고 외쳐도 꿈쩍도 않는 권력을 보면서 역시 힘을 꺾는 것은 물리적 힘뿐이라고 생각한 것이 나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촛불은 꺼지게 마련이라는 논평 때문에 치도곤을 당하다시피 한 집권당 의원도 물론 침몰하는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이기도 했겠으나 어쨌거나 나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연히 시청한 종편 프로그램에 나온 한때 좌파로부터 전향했다는 어느 정치인 출신의 평론가도 역사적으로 어떤 혁명도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성공한 적이 없다고 알은체를 했다.
여기에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multitude)이 주체가 되는 혁명, 요컨대 수많은 자율적 개인들이 스마트폰이나 분산적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중심 없이 수행하는 혁명에 관한 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담이지만 이번 권력스캔들의 조연급 등장인물 중의 한 분은 학자시절 네그리의 이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을 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정에 무지하지만 어쨌건 전 총리 살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었던 마르크스주의자 네그리가 오랜 망명과 구금 생활을 겪으면서 도달한 결론이라는 점에서 일단 그 어떤 도덕적 권위 같은 것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아니, 네그리까지 들먹이는 현학을 버리더라도, 적어도 낡아버린 기성세대와는 다른 소통과 저항의 방식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됐다는 사실만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재벌 총수들이 한꺼번에 불려나와 앉아 있는 청문회 장면을 보면서 나는 문득 기업권력 문제를 생각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자리에 앉은 회장님들은 각자가 수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들, 나아가 중소 협력업체의 생살여탈권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더구나 28년 전의 5공 청문회에 나왔던 회장님들의 자녀들이 그동안에 더 커진 권력을 물려받아 독점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 커진 권력을 물려받은 재벌 총수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울프는 2011년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을 다룬 <경제를 점령하라>는 책에서 “민주주의가 어딘가에 존재해야 한다면, 삶의 큰 몫을 차지하는 노동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가 저절로 주어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상점, 공장, 사무실 등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의 모든 민주적 권리와 책임을 포기하고 맙니다”라고 말한다.
예의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의 어설픈 유비가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30년 전 막강한 물리력으로 무장한 권력자는 재벌 회장들을 위협하여 막대한 돈을 뜯어냈다. 그의 권력은 사라졌지만 그 재벌들의 권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작은 순환은 한 세대 만에 다시 반복되고 있지만,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큰 순환은 마무리되지 않는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 감동적인 승리를 엮어냈던 우리의 미래 세대들도 결국 학교를 마치면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일터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아니 어떤 방식으로 짓밟히고 왜곡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촛불이 만들어내고 있는 시민혁명이 정치적 반동으로 탈취될까 걱정하는 것은 변화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율적 개인의 영역을 만들어내기가 훨씬 더 어려운 일자리 안에서, 모종의 촛불혁명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 대학의 문제가 그보다 더 큰 사회의 모순과 연결된 것처럼, 일자리 안에서의 민주주의 또한 그것을 둘러싼 사회 전반의 민주적 역량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이 실릴 때면 이미 정치권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또 한 단계 사태가 진행되어 있을 터이나, 그 진행의 방향이 무엇이건 본질적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고, 그 흐름을 쫓아가면 궁극적으로는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부딪혀야 하는 일자리 민주주의의 문제에 가닿을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