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큰 울림, 광장을 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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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큰 울림, 광장을 적시다

입력 2016.12.06 15:54

100만, 200만이 운집하는 주말의 광화문광장은 물론이려니와 11월 4일부터 서로 긴밀히 연락하여 뜻을 모은 예술가들이 평일 내내, 아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 차디찬 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면서 광장의 예술, 예술의 광장을 만들고 있다.

격변의 시대에는 세상 모든 것이 격변하고, 당연히 예술 또한 격변한다. 예술은 집요한 탐미의 산실인 예술가의 스튜디오나 집필실에서 탄생하지만, 거리에서 광장에서 깃발 아래에서도 탄생한다.

상기해 보라. 프랑스혁명 이전과 이후, 그들의 예술은 확연히 달라졌다. 베토벤은 또한 어떠한가. 가슴 속에 뜨거운 불구덩이를 안고 있던 이 청년은 한편으로 자기 삶의 획기적인 갱신을 위하여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을 지속적으로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공화주의적 신념의 소유자로 파리에서 들려오는 혁명의 소식, 왕을 처형했노라는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또한 몸을 던지고자 했다. 그 파열의 결과가 ‘5번 교향곡’ 아니었던가. 혁명의 광장에서 울려퍼진 케루비니의 노래를 인용하는 한편, 그 자신이 직접 확인한 프랑스 민요의 낙천성에 기반하여 베토벤은 5번 교향곡이라는 ‘혁명의 드라마’(존 엘리엇 가디너)를 썼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난청을 앓는 ‘고독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절망과 희망’이라는 식으로 협소하게 들리고 있지만 말이다.

굳이 이렇게 역사적인 혁명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이를테면 1차 세계대전 직후의 파리나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뉴욕은 인류사에 기록된 미증유의 사건 이후 예술가들이 그 정신적 공백이나 까닭 모를 불안을 누구보다 먼저 감응하여 날카로운 상상력으로 인식과 감정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냈음을 잘 말해준다.

1917년, 그러니까 러시아혁명 이후의 모스크바는 말할 것도 없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파격적인 실험의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차르 체제에 신음하던 모든 예술가들이 러시아혁명을 환영하고 나왔다.

가수 안치환씨가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수 안치환씨가 11월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거리는 우리들의 붓, 파레트는 광장

혁명에 대한 첫 보도가 파리에 날아왔을 때, 우수 어린 긴 머리의 여인을 그리던 모딜리아니는 붓을 내던지고 곧장 러시아의 작가 에렌부르크에게 달려갔다. 에렌부르크의 회고에 따르면 모딜리아니는 ‘마치 독수리처럼 고함을 질러’대며 러시아혁명을 환호하였다. 로망 롤랑도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공식 서한을 띄웠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속박의 사슬을 깨버리고 일약 프랑스혁명의 뒤를 이었습니다. 바라건대 당신들은 프랑스혁명이 못다 이룬 한계를 넘어서서 당신들의 일과 우리의 일을 완성해 주기 바랍니다.”

서유럽의 예술을 일찍 받아들인 전위예술가들은 혁명을 누구보다 선호하였다. 그들은 부르주아의 금기와 억압과 무의식적인 고통을 맹렬하게 거부하였던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러시아혁명은 새로운 삶의 지평이었다. 1918년 10월 25일에 열린 제1회 혁명기념일. 전위예술가들은 온 힘을 모아 대대적인 예술축전을 열었다. 그들은 도시 하나를 캔버스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들은 모스크바의 거리와 건물을 대담하게 장식해 버렸다. 모스크바의 정통 교회들이 들어선 광장에는 차르 체제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건물이 많이 있다. 이 건물들을 도전적인 전위예술가들이 다채로운 장식과 색깔로 뒤덮어버렸다. 거리 곳곳의 나무와 화단에도 물감을 뿌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비들도 전위화가들의 새로운 소재였다. 그들은 알렉산드르 황제를 위한 오만한 기념비를 원형과 다각형으로 해체하여 새로운 색채와 장식으로 바꾸었다. 국립예술공방의 화가들은 거대한 깃발과 다양한 장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선전열차도 등장하였다. 젊은 예술가들은 예술과 선동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달리는 기차를 또 하나의 소재로 삼았다. 그들은 차량에 갖가지 혁명찬가와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 선전열차는 광대한 러시아 평원을 달리면서 군소도시의 사람들에게 혁명의 열기를 전달하였다. 파리에서 고향 비테브스크로 돌아온 샤갈은 그 마을 미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혁명기념일에는 마을 사람들이 샤갈의 그림을 크게 흉내내서 그린 다음 이것을 뒤집어쓰고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축제 행진을 벌였다.

러시아혁명은 예술의 혁명이기도 하였다. 온갖 예술적 주장이 도처에서 움터 나왔다. 타트린은 “회화로서의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했다. 그는 물감 대신 나무, 유리, 종이, 발전기 등을 사용하였다. 마야코프스키는 혁명적 예술을 진두지휘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진실이냐 허위냐에 대해서 더 이상 다투지 말라
낡은 것은 모조리 가슴으로부터 사라져버렸다
거리는 우리들의 붓
우리들의 파레트는 광장이다

문화예술인들이 11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텐트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정윤수

문화예술인들이 11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텐트 농성을 벌이고 있다. / 정윤수

예술 각 분야에서 예술적 성과가 터져나왔다. 메이예르홀트와 박탄코프는 연극 분야에서 일대 혁신을 꾀하였다. 그들은 표현주의와 극장주의를 융합하였으며 여기에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극론이 대립적인 보조를 이루었다. 영화에서는 에이젠슈타인이 몽타주 이론을 들고나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지금, 광화문광장이 바로 그런 광장이 되고 있다. 100만, 200만이 운집하는 주말의 광화문광장은 물론이려니와 11월 4일부터 서로 긴밀히 연락하여 뜻을 모은 예술가들이 평일 내내, 아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 차디찬 바닥에 텐트를 치고 밤을 새면서 광장의 예술, 예술의 광장을 만들고 있다.

무대 오른 안치환, 양희은도 기억해야

그들이 어떤 자의식의 돌발이나 조형적 표현의 추구를 위하여 광장을 일종의 ‘오브제’로 삼아서 기이한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은 아니다. 뉘라서 이 차가운 시절에 광장에서 밤을 지새우고 싶겠는가. 낮에는 그런 대로 버틸 만하지만, 밤이 되면 차량의 소음과 뒤틀리는 콘크리트의 둔중한 마찰음과 취객의 시비와 영하로 내려가는 체감온도로 좀처럼 버티기 힘든 곳이 이 무렵의 광장이다. 송경동, 신유아, 노순택, 이윤엽 등의 작가를 시작으로 하여 11월 5일 시작된 광화문 캠핑촌 농성은 12월이 되어서도 지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는 날까지 지속하겠다고 했으니, 어쩌면 한겨울을 텐트에서 보낼지도 모를 일이다. 위엄 있는 행동이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하여 걱정이 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은 고립되어 외로운 존재들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성직자들, 일반 시민들이 함께 노숙 농성을 한다. 그들 모두가 더불어서 매일같이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사진, 음악, 시, 영화, 만화 등의 작업이 벌어진다. 매주 ‘광장신문’을 발행하기도 하며, 토요일 밤 촛불집회와 행진이 마무리되면 ‘하야하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록, 포크, 힙합, 레게, 국악 등의 뮤지션들이 광장의 무대를 앞다퉈 찾았다. 11월 17일의 광장에는 갤럭시익스프레스, 킹스턴루디스카, 허클베리핀, 모노톤즈, 엠씨메타 등이 제 몸의 에너지를 연소시켰다. 26일에는 크래쉬, 폰부스, 안녕바다, 말로 등이 밤의 광장을 지켰다. 어디 서울의 광장뿐인가. 제주시청 앞에서 강산에·권순익·김신익밴드 등이, 춘천의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 사무실 앞에서는 소보·일곱시반·노는삼춘 등이 분노의 노래를 불렀다. 100만의 무대 위에 오른 정태춘, 전인권, 양희은, 안치환뿐만 아니라 이 밤의 콘서트에 참여한 뮤지션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1960년대 일본 전공투 시대의 도쿄대 학생들이 외친 슬로건을 번역한 것이라서 조금은 우리 말의 흐름에 어색한 면도 있지만, 어쨌거나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이 광장 속에서 실천되는 풍경이다.

언젠가 광장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원컨대 그 시간은 빨리 와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탄핵을 중심으로 한 박근혜 정권의 퇴진은 멈칫하거나 유보할 수 없는 목표로 실천되어야 한다. 나는, 그 후, 우리의 예술이 광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만한 격변의 작품들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마치 열렬한 사랑의 기억처럼, 광장의 사랑, 광장의 연대, 광장의 기억은 그 자리에 참여하였던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화인처럼 남을 것이다. 좀처럼 그 사랑의 열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또한 그로부터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서 예술가들은 필사적으로 작업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광장 이전에는 볼 수 없었고, 읽을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던 작품이 될 것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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