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신라 선덕여왕과 자주 비교된다. 2009년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박근혜=선덕여왕’ 공식을 굳혔다. 드라마 시청률이 40%를 돌파하자 MBC가 여당(한나라당) 대권주자를 띄워주려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나올 정도였다. ‘박근혜=선덕여왕’ 공식을 지지했던 인사들은 선덕여왕의 장점을 부각한다.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성 지도자였으며,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 대통령처럼 남편도 없었다. 선덕여왕이 한때 덕만공주였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공주’였다. 선덕여왕이 백제군의 침입을 미리 알고 물리친 일이나, 치세 초기 고아와 독거노인을 돌봤다는 기록도 박 대통령 지지자들이 인용하는 단골 소재다.
박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지 4년 가까이 흘렀다. 되돌아보면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는 선덕여왕의 치세와 정말 닮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선덕여왕은 내치와 외치에 모두 무능했다. 그의 재위기간은 전쟁과 혼란으로 점철됐다. 삼국사기를 보면 선덕여왕 재위 초반부터 지진이 일어나고 동해에 적조현상이 생겼다. 재위 후반에는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패했다. 선덕여왕은 당나라와의 외교를 통해 위기를 탈출하려 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백제에 대야성을 빼앗긴 이듬해인 643년 9월,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군을 요청했다. 당나라는 “그대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어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임금의 도리를 잃어 도둑을 불러들이게 된다”며 당나라 왕족을 신라의 왕으로 삼겠다며 조롱했다. 즉위 초반 당나라에서 나비가 없는 모란꽃 그림을 보내 선덕여왕에게 남편이 없음을 희롱한 적도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 / MBC 제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촛불항쟁은 선덕여왕의 말년을 떠올리게 한다. 선덕여왕의 치세는 반란과 함께 끝났다. 647년 1월,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상대등과 귀족 30명이 반란을 일으켜 10여일간 수도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왕은 세상을 떴다. 삼국사기는 반란군의 함성이 천지에 진동해 왕이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치세는 반란이 아닌 시민혁명에 의해 끝장나고 있다. 박근혜의 실패가 여성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점은 안타깝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의혹 제기에 대해 “여성으로서의 사생활” 운운하며 여성혐오를 부추겼다. 한 가수는 이때다 싶었는지 ‘병신년’, ‘닭의 해’를 언급한 신곡을 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선덕여왕에 대해 “여자를 왕으로 세워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한 말이 870년 만에 다시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