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된 노래, 상처 입은 노래,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노래일 수도 있겠지만 전인권이 천, 천, 히, 그리고 비장하게 이 노래를 부르자 광화문광장은 일순간에 강한 열기로 가득 찼다.
1년 전 지난해 겨울, 나는 이 지면에서 “부를 노래가 없다”고 했다. 그 무렵 뜨거운 시위가 있었고 격렬한 진압이 있었다. 물대포가 시위대를 향해 잔인하게 퍼부어졌고 그 바람에 백남기 농민이 쓰러졌다. 그 자리에 있었던 집회·시위 경력 25년이 넘는 사람을 나중에 만나서 그 자리의 비상사태를 들었는데,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그 다음주, 다시 집회가 열렸고 행진이 시작됐다. 물대포가 난사되는 집회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해서인지 경찰은 소극적 진압을 했고, 집회와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시위대를 향해 ‘복면을 쓰지 말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오히려 많은 시민들이 각양각색의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 시위는 말하자면 ‘평화적’이었다. 시청에서 대학로까지 행진을 했는데, 그때 나는 그 행렬에 참여한 후에 이 지면을 통해 “길 위에서 들려오는 노래, 그것이 그날 없었다. 물론 구호는 있었다. 그러나 노래는 없었다. 함께 부를 노래가 없었고, 어떤 노래를 함께 부르는 광경이 없었다”고 썼다.
가수 전인권씨가 11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4차 범국민행동’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4절까지 못 부르면 국민도 아니라고?
그랬는데 1년여 만에 광장은 노래로 가득차 있다. 뜨거운 노래들, 뜨거운 합창들, 뜨거운 함성들이 한 달이 넘도록 서울의 광화문광장을 비롯하여 전국 대도시의 광장과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있을 수 없는 가정이지만, 진실로 노래가 없었더라면 이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이 열기를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한 달여의 광장이었다. 광장의 노래, 노래의 광장이었고, 그 열기의 한 장면을 통해 지난주 이 지면에서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특별히 기억하고자 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애국가’다. 국민의례 시간의 애국가가 아니고 전인권의 애국가다. 이 노래는 오염된 노래다. 우리의 국가를 오염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리 애국심이 많다고는 할 수 없을 내 마음으로도 썩 내키지는 않는 일이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근현대사가 수많은 상처와 시련으로 얼룩졌듯이 오랫동안 관가에서나 민간에서나 공식 행사장에서나 시위 현장에서나 쉼없이 불려진 이 애국가 또한 땀과 눈물과 피가 배어 있다.
이를테면 황교안 국무총리가 2015년 4월 28일, 총리 후보자이자 법무부 장관 신분으로 신임 검사 임관식에 참석해서는 신임 검사들이 애국가를 4절까지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고 “나라 사랑의 출발은 애국가”라고 강하게 질타했는데, 그렇게 애국가는 사람들 마음속에 스며드는 노래가 아니라 오로지 ‘국가주의적 충성 서약’으로만 축소되고 만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애국가를 싫어한다거나 그래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냐고 제발들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애국가 4절까지 다 외울 뿐만 아니라 내 나름대로 이 나라를 사랑하여 집회에도 나간다. 권력이 강제하는 애국, 국가가 매를 들고 혼을 내는 충성, 4절까지 못 부르면 국민도 아니라는 식의 맹목에 대해서는 단연코 거부하기 때문에 나는 누가 시켜서 부르는 것을 거부할 뿐이다.
1983년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그해 봄에 교외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받게 되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교과서에 이름이 나오는 기라성 같은 국어학의 대가들, 국문학의 거성들이 까까머리 중·고등학생들을 격려해주기 위해 나와 계셨다. 사회자가 말했다. ‘그럼 식순에 의하여 애국가를 제창하겠습니다, 애국가는 4절까지 제창하겠습니다.’ 곧이어 참석자들의 애국가 제창이 이어졌는데, 국어국문학계이 원로와 대가들의 애국가는, 느렸다. 천, 천, 히 불렀다. 4절까지. 그런데 숙연했다. 그 연원이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이라든가, 우리말본이라든가, 조선어큰사전 편찬 같은 역사책에 나오는 사건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원로와 대가들이 마치 만주 벌판에서 한글큰사전 앞에 놓고 장중하게 부르듯이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하는데, 엄숙하였다. 이 정도 되면 나는 기꺼이 함께 부를 수 있다.
들국화가 1985년 발매한 1집 ‘행진’의 앨범 사진.
그가 부르면 똑같은 노래도 전혀 다르다
물론 음악평론가 강헌은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가 나치 치하의 1942년 베를린에서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했다는 사실, 자신의 스승이자 후기 낭만주의의 대가이며 나치 체제의 음악분야 수장이었던 리하트르 슈트라우스의 일제 찬양 작품 ‘대일본축전’을 일본에서 지휘한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을 거론하며 현재의 애국가 대신 다른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4년 내한 공연을 가진 불가리아의 지휘자가 애국가를 듣고는 자국의 민요와 흡사하다는 이른바 ‘애국가 표절 파문’까지 있었으니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음악학적 근거와 역사적 증거가 충분하다.
그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맞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보다 더 장엄하고 보편적으로 이 헌법의 정신을 표현한 노래가 또 있을까? 이 노래는 자유와 평등을 희망하는 세계의 깨어 있는 시민의 노래로 널리 불리고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나도 언젠가 이 지면을 통해 이 나라가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이 되면 지금의 애국가 대신 ‘그날이 오면’을 통일된 나라의 새 노래로 해야 한다고 쓴 바 있지만, 솔직히 그 노래가 현재의 애국가나 ‘임을 위한 행진곡’만한 역사적 대중성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조심스럽게, 통일이 이뤄진다든지 해서 남북한의 새로운 역사적 지평 위에 새로운 노래를 헌정해야 할 엄청난 역사적 국면의 전환이 있지 않은 한, 현재의 애국가를 그냥 불러도 된다고 생각한다. 일제 흔적이 배어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드리워진 노래가 된 까닭이다.
애국을 강요하고 그 증거로 애국가로 강제하는 것에는 분명하게 거부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이 노래는 바로 그 일그러진 애국, 강요된 충성, 파렴치한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순간에 불려지기도 했다.
지난주말, 광화문광장에서, 전인권이 바로 그렇게 불렀다. 그가 천, 천, 히 애국가를 불렀을 때, 집회·시위 참여 경력 25년이 넘는 그 사람도 그 자리에서 그 노래를 들었는데, 애국가가 그렇게 들려오는 순간은 처음이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오염된 노래, 상처 입은 노래,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기억으로 남아 있을 노래일 수도 있겠지만 전인권이 천, 천, 히, 그리고 비장하게 이 노래를 부르자 광화문광장은 일순간에 강한 열기로 가득 찼다.
전인권은 옛날에도 그랬다. 그가 부르면 똑같은 노래도 전혀 다른 노래가 되었다. 음반을 발매하면 정부의 문화 통제 방침에 따라 반드시 ‘건전가요’가 음반 끝에 수록되어야만 했는데, 이 또한 일제의 식민 잔재다. 일제의 ‘가정가요운동’, ‘가요정화운동’, ‘국민개창운동’이 해방 이후에도 ‘건전가요운동’으로 이어져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내내 지속되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의 ‘애국가요 권장방안’이 그 대표 사례다. 박정희 작사·작곡의 ‘나의 조국’, 박목월 작사·김성태 작곡의 ‘대통령찬가’가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전인권도 들국화의 멤버들과 함께 음반을 내면서 어쩔 수 없이 ‘건전가요’를 수록해야만 했는데, 그가 부른 건전가요는 전혀 달랐다. 1집에 수록된 ‘우리의 소원’은 들국화, 그리고 전인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그러니까 전인권은 오래전부터 광장의 가객이었던 것이다. 그가 부른 ‘우리의 소원’, 그가 부른 ‘애국가’는 위엄 있고 아름다웠으며, 진실로 광장에서 울려 퍼질 만한 광장의 노래였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