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플로이드의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중에 핑크 플로이드라고 있다. 30여년 전이 그들의 전성기였으므로 지금은 그저 ‘레전드’ 같은 수사로 가물가물하게 기억되는 그룹이지만, 바로 그 무렵, 그러니까 30여년 전, 고교생이었던 나는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를 외우다시피 들으며 살았다. 1960~70년대 영국 사회의 모순들, 교육·빈곤·소외 등을 높은 수준에서 다룬 <더 월>(the Wall)은 물론이고, 특히 산업사회의 잔인하고 쓰라린 면모를 다룬
30여 년 전 전성기 때의 핑크 플로이드
그랬지만, 솔직히 가사는 잘 모르고 들었다. 외국 문화였고 상당히 긴 가사들이었으며 풍자와 비유가 쉼없이 등장하기 때문에, 고교생이 그것을 다 새겨서 듣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얼마 전 포크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보도를 접하고는 이내 기억해냈다. 아직 밥 빌런이 그 상을 받겠다고 하는 보도가 없어서, 혹시나 수상을 사양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을까 하는 세간의 은밀한 기대도 있으므로 일단은 ‘선정’이라고만 하겠다.
20년 만인 2014년에 새 앨범
밥 딜런의 선정 소식에 핑크 플로이드를 왜 떠올렸냐 하면, 만약 내가 스웨덴 한림원이라면, 그래서 대중음악의 가사 중에서 노벨문학상을 선택해야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핑크 플로이드라고 선언할 작정이기 때문이다. 밥 딜런의 노랫말이 시대적 가치가 있고 상흔이 묻어 있으며 격조 있는 어휘에 읊조리는 듯하면서 라임이 적절하게 전개되는, 시와 비슷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높은 수준의 시라는 것은 웬만큼 팝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지해온 바 있고, 따라서 스웨덴 한림원에서도 밥 딜런의 이름이 수년째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한국의 시인 고은을 비롯하여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 최근에 박경리문학상 수상자가 되어 내한한 아프리카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 몇 년째 유력자로 거론되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등에 더하여 밥 딜런은 최소 5순위 안에서 늘 거론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아 이러다가 밥 딜런이 타면 어떡하지, 핑크 플로이드는 기회가 없겠구나, 하고 생각해 왔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명반
개가 짖는다. 공허하게 짖는다. 울부짖는 개의 소리도 들린다. 기타는 대도시의 황량한 밤거리를 잔인하게 베듯 흐른다. 창백하고도 음산한 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시커먼 런던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정신나간 개 몇 마리가 여기저기서 피냄새가 나는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중에 밴드 리더 로저 워터스의 바싹 마른 음성이 들려온다.
나의 기대(?)와는 별개로 밥 딜런이 대중음악의 가사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을 훑어보니 한림원이 지나치게 대중적인 전략을 구사했다는 비판도 있고, 노랫말 하나 잘 쓰면 이젠 시인이 되는구나 하는 푸념도 있지만 대체로는 신선한 선택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비판하든 긍정하든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는데, 대개들 ‘노랫말이 뛰어나서 시에 흡사한’ 것을 두고 선정한 듯 생각한다. 한림원의 결정은 밥 딜런의 노랫말이 ‘시의 형식에 흡사’하다거나 ‘대중음악 가사도 문학의 일부’라는 정도가 아니다. 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 형식은 비교적 긴 시간대를 버티긴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역사적 주기를 따라 변화한다. 똑같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세르반테스와 발자크와 카프카는 적어도 그 형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예술의 옷을 입고 있다. 미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빈치와 세잔과 백남준은 당대를 대표하는 미술가이지만 그 표현의 옷은 전혀 다르다. 중요한 것은 거시적이긴 하나 틀림없이 변화하는 어떤 예술의 옷, 즉 ‘형식’이 아니라 그런 차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철되는 예술 그 자체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와 사회적 의미, 그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스웨덴 한림원은 판단했다. 이른바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선정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문학적인 것’이란 ‘문학과 형식상 흡사한’이란 뜻이 아니라, 기존의 제도와 관습으로 보면 장르로서의 문학은 아닐 수 있지만 문학이, 혹은 문자가 역사상 해온 예술적 본질과 사회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면 그 겉옷, 즉 제도로서의 형식이 기존 문학에 부합하느냐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결정이다.
밥 딜런의 앨범
2015년, 영국의 최고 권위 미술상인 터너상 수상자로 리버풀의 낙후한 주거단지에서 활동해온 18명의 20대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선정된 적이 있다. ‘어셈블’(Assemble)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유서 깊은 항구도시이자 산업도시인 리버풀의 오래되고 낡은 공공주택단지를 개조하는 프로젝트 ‘그랜비 포 스트리츠’(Granby Four Streets)로 수상을 했다. 무려 100여년 전, 1900년대 초에 산업노동자들의 집단주거단지로 형성된 그랜비 포 스트리츠는 악명 높은 대처 시절에 수많은 유혈사태를 부른 1981년의 폭동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맹맥이 끊긴 바 있다. 지방정부가 대대적인 재건축을 위해 낡은 집들을 사들였고, 이에 따라 주민들은 모두 흩어져서 거리 자체가 황폐한 낙후지역으로 남아있었다.
18명의 젊은 예술가들은 여전히 황폐한 빈민가에 남아 마을을 지키려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낡은 집을 수리하고 놀이터를 만들고 시장을 활성화하는 미술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폐자재들을 모아서 책장도 만들어 자활과 재생의 모범을 선도했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도시의 고급주택화로 원래 살던 주민이 대책 없이 떠나야만 하는 현상)에 맞서 예술이 실제의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것이 심사평이었다. 오늘날 누군가는 여전히 새로운 조형미학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일련의 미술가와 디자이너는 이렇게 미술이라는 방법과 시선으로 공동체를 재건해내는 것이다. 이게 미술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밥 딜런을 선정한 의미
최근의 소식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하는 ‘2016 올해의 작가상’에 같은 맥락의 작업을 해온 ‘믹스라이스’의 조지은과 양철모가 받았다는 것이다. 무자비한 재개발로 공동체가 파괴된 한국 사회를 인간이 만든 도시와 그 밑에서 자생한 식물의 황량한 교직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들의 주요 작업은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한 문화활동이다. 오랫동안 그들은 경기도 마석 가구단지 같은 곳에서 제3세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겪었고 따라서 문자, 사진, 공연, 영상 등 수많은 기록물을 갖게 되었다. 이를 선별하고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그들의 ‘미술작업’이다.
예술의 경계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한다. 그것은 시대가 급변하고 따라서 그 당대의 삶의 형질이 바뀌게 되며 이로 인하여 당대의 고통과 기쁨과 상흔과 눈물은 새로운 형식을 예술가들에게 요구한다. 예술 형식의 끝없는 변화는 조형적 탐미의 결과도 있지만, 바로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삶이 새로운 형태의 옷을 원하기 때문이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선정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아래에 보듯이, 그의 걸작 음악에 담긴 가사들은 틀림없이 시이며 그것도 출중한 시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고정불변의 문학 형태가 아니라 끝없이 유동하는 삶의 격렬함 속에서 문학의 문학다움, 예술의 예술다움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뇌할 것을 이번 문학상 선정 결과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g in the wind
How many times must a man look up
before he can see the sky
How many ears must one man have
before he can hear peaple cry
친구여, 묻지 말아요 오직 바람만이
알고 있는데. 얼마나 더 우러러 보아야
푸른 하늘이 보일까?
얼마나 더 많이 귀 기울여야
울음소리가 들릴까?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