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



주간경향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백남기 농민,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

입력 2016.10.11 11:25

[비상식의 사회]백남기 농민, 애도 받지 못하는 죽음

사인을 가리기 위해 굳이 부검을 하는 것은 백남기씨를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물대포를 맞고 뇌사상태가 되어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던 사람이다. 사망 직전에 다른 합병증이 무엇이 있었는지 검찰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마지막에는 아들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를 찾아간 프리아모스 왕의 얘기가 나온다.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킬레우스와의 대결에 나섰던 헥토르는 결국 창에 맞아 숨진다.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게 복수의 원한이 사무쳤던 아킬레우스는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끌고 돌아다니며 욕보인다. 그러자 프리아모스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아들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아들 잃은 아버지의 간절한 얘기를 듣던 아킬레우스도 함께 통곡하고 말았다. 프리아모스는 아들 헥토르를 위해 꺼이꺼이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때로는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슬피 울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고 호메로스는 썼다. 프리아모스의 부성애에 감동받은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깨끗이 씻고 좋은 옷으로 덮어 짐수레에 싣고 진영을 몰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장례를 치르는 기간 동안은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고 나서 아킬레우스는 소리내어 울면서 파트로클로스의 이름을 불렀다. 원수 헥토르를 그의 아버지에게 내준 자신을 원망하지 말라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

이 서사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복수의 증오심마저 무너져 내리고 함께 슬퍼하는 인간에 대한 얘기이다. 인간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미워하던, 심지어 전쟁에서 서로의 목숨을 겨냥하던 상대였다 해도 일단 타자의 죽음 앞에서는 예를 표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런데 그 예를 받지 못한 채 죽어서도 서러운 망자(亡者)가 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317일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결국 숨진 농민 백남기씨. 그가 했던 시위가 준법이었는가 불법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지금 할 일이 아니다. 불법 시위를 하면 죽여도 좋다는 법은 대한민국에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지금은 책임을 물을 때이다. 하지만 백남기씨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으로 남아있다. 아직까지 진상조차 가려지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아니, 진상은 고사하고 사과 한마디 한 번 하지 않고, 조문 한 번 가지 않는 것이 이 나라 정부이다. 그들은 이 죽음을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유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부검을 하겠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사인을 가리기 위해 굳이 부검을 하는 것은 백남기씨를 두 번 죽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물대포를 맞고 뇌사상태가 되어 한 번도 깨어나지 못했던 사람이다. 사망 직전에 다른 합병증이 무엇이 있었는지 검찰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른 합병증을 이유로 사망원인에 대한 물타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만 살 뿐이다. 그토록 부검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물대포가 아닌 다른 이유로 사망한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수사의 논리를 들이대기 이전에, 아버지를 죽인 쪽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시신을 넘겨주고 싶지 않은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일이다.

마침 서울대병원 백선하 교수가 ‘병사’라는 사망진단서를 작성해주었다. 고인의 사망이 물대포에 의한 ‘외인사’가 아니라, 병에 걸려 죽었다는 의미인 ‘병사’라니. 이 기막힌 도피구에 어찌 경찰과 검찰의 눈이 번쩍 뜨이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여당 정치인들의 입에서는 부검하기 전까지는 사인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들이 나온다. 물대포를 맞아 뇌사상태가 된 환자가 결국 신부전증으로 사망한 것이 병으로 죽은 것이라니. 게다가 사망의 이유를 연명 치료를 원하지 않은 유족에게 떠넘기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의료인의 윤리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탄식을 낳는다. 백 교수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까지 하면서 ‘외인사’라는 진단을 극구 피하려 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어떤 이유로든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어도, 한 가정의 아버지가 물대포에 맞아 비통하게 갔는데 가는 길에조차 곳곳에서 잔인한 정치적 물대포를 쏘아대서야 되겠는가.

가는 길에조차 잔인한 정치적 물대포

사람이 죽으면 가까웠던 사람들이 애도를 하면서 그를 떠나 보낸다. 슬픔의 시간을 갖고 고인을 잘 보냄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치유하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죽음의 원인이 사회에 있는 경우에는 특별히 사회적 애도가 필요하다. 세월호 참사가 그러했다. 세월호는 이윤에 눈먼 사회와 무능한 국가가 초래한 죽음이었다. 그렇다면 세월호에 갇혀 죽어간 어린 학생들의 가엾은 죽음 앞에서 이 사회는 함께 슬퍼하고 책임을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참사가 있은 지 2년 반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던가. 어째서 단 한 명도 구해내지 못했는가를 밝히려 했던 진상조사 작업은 권력이 세워놓은 벽 앞에서 막혀버렸다. 물론 제대로 된 책임조차 물은 적이 없다. 권력은 세월호라는 말 자체를 더 이상 입에 올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월호는 단지 하루라도 빨리 잊고 지나가기만 바라는 지겨운 족쇄일 뿐이다. 이 사회는 어린 학생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죽어간 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생각했던 많은 국민들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슬퍼했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국가는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가족들은 치유 받을 수 없었고 아픔을 이겨내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비극은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가두고 있다.

백남기씨의 죽음 앞에서 우리 사회가 보이고 있는 모습은 세월호의 죽음 때 보였던 광경과 다르지 않다. 물대포에 맞아 쓰러져 죽은 사람을 놓고 병들어서 죽은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버젓이 활개치는 미친 세상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모든 인간에 대한 조건없는 환대를 말했다. 외모, 능력, 빈부, 생각의 차이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환대 받을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세상을 떠나가는 길에서 애도 받을 자격이 있다. 애도 받을 자격을 심사하는 차별은 인정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환대 받으며 세상에 왔다가 애도 받으며 가는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국가폭력으로 인한 죽음 앞에서도 그 예를 갖추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끝내 애도를 거부하는 사회.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이 곳이 사람들 사는 곳이 맞느냐고.

<유창선 시사평론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