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사라질 권력은 사라지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낼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양극화 해소니 경제민주주의니 하는 경제학적 수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주기가 찾아온 셈이다.
공자는 나이 50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知天命)고 하였는데, 사석에서 농담 삼아 늘 하는 말이거니와, 그것은 실증적 명제라기보다는 규범적 명제인 것만 같다. 진짜로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깨우쳐야 한다는 당위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언감생심 공자와 맞수가 될 꿈을 꾸겠냐만, 이 나이 정도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우칠 법도 한데 왜 이리 세상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건 항상 그 이상을 보여주는지 좌절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가치없이 잘라내기’와 ‘악착같이 버티기’
인류 역사를 보면 온갖 변혁 속에서도 예외 없이 극에서 극으로 흐르는 정치성향의 주기적 변동 같은 것이 있었던 법한데, 어쩌면 경제만 주기적 경기변동을 겪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이라 부르건 사회가 지닌 자의식이라 부르건 간에 하여튼 그 무엇도 시계추처럼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움직이는 듯하다.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소통의 부재라든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일방적 행사라든지 하는 것들이 키워드라도 된 느낌이었다.
정치적으로 진보냐 보수냐, 혹은 더 단순명료하게 말해서 뉴스에 나오는 최고권력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운가 짜증나는가에 따라 이들 문제에 대한 견해는 달라질 것이다. 이를테면 ‘잃어버린 10년’ 동안 이른바 좌파 대통령을 온갖 언어로 조롱했던 이들이 모두 진정한 의미의 우파나 보수라고 하기 어렵듯이, 최근 10년 동안 역시 온갖 언어로 이른바 우파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들 역시 진정한 의미의 좌파나 진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헛된 이념의 계급장을 떼어내고 생각하자면, 물론 내 기억의 무의식적 착오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말하거니와, 우리 시대의 정신인즉 ‘가차없이 잘라내기’에서 ‘악착같이 버티기’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연례행사로 되풀이되곤 하는 고위공직자 후보 청문회에 등장하는 갖가지 추문과 그 뻔한 귀결을 예상하며 언뜻 드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민주화운동의 잔영이 진하게 남아있던 시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버티고도 남을 만한 과거의 실수에도 임명 뒤 몇 주일을 못 채우고 물러나는 고위공직자들이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보수정권인 문민정부 하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광경이기도 하다. 지금은? 굳이 지면을 축내며 얘기할 필요도 없다.
사실 정치조직의 논리는 종종 죽고 살기의 싸움을 무릅써야 한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범죄조직의 논리와도 매우 비슷하다. 때로는 하수인들을 처절하게 제거해야 하며 때로는 악착같이 버텨야 하되, 일관된 논리는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며 더 따지고 들어가보면 보스를 옹위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가치없이 잘라내기’와 ‘악착같이 버티기’는 서로 다른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똑같은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당장 오늘 하루 먹고사는 일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잔혹한 독재정권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마치 좋았던 옛 시절처럼 기억되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높은 수준에서의 권력의 행사방식은 낮은 수준에서의 그것에도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마치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명제처럼이나 일상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권력에서 그 모습을 복제한다. 대학이건, 종교단체건, 슬프지만 비판적 지식인이나 시민운동가로 알려진 이들이 이끄는 크고 작은 조직에서도 보스는 축자적으로 해석된 규범에 따라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밀어붙인다. 반대의 목소리는 조직 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묵살되거나 제거된다. 이것은 좌나 우의 문제도 아니고, 자본주의냐 아니냐의 문제만도, 권력자의 캐릭터 탓만도 아니라는 것을 진작 깨달았어야 할 나이가 된 내게 요즘 희미하게 그 윤곽을 비춰주는 천명의 실체인 듯도 하다. 그러하니 너무나 진부한 얘기지만 항상 깨어 있고 항상 감시하는 시민사회의 존재야말로 크고 작은 조직들이 조금이라도 더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기 위해서는 불가결한 조건이 되며, 바로 그 때문에 정말로 위험한 것은 정치적 견해의 양극화라는 현실이다.
또 하나 잊기 쉬운 진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좇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사실 정치인들의 극적인 전향, 이를테면 골수 주사파에서 극우파로, 존경할 만한 노동운동가에서 보수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이들을 ‘내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만약 내가 열악한 중소기업에 다니던 회사원인데 어느 재벌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는다면, 재벌체제의 해악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며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결국 정치인들의 도덕성을 탓하기 전에 민중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그들 자신의 물질적 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먹고사는 일과 직결되지 않는 정치권력
폴란드 출신의 케임브리지 경제학자 미할 칼레츠키는 1943년에 완전고용이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임을 간파한 ‘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이라는 논문을 쓴 바 있다.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지출 등을 통해 유효수요를 만들어냄으로써 고용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조만간 적당한 수준의 실업을 통해 노동자를 길들이려는 비즈니스 리더들과 건전재정을 강조하는 경제학자 등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다시 긴축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아마도 칼레츠키가 살아서 보았다면 “바로 저들이 내가 말한 그들이야”라고 했음직한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의 발언권은 어느 정도 위축되었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심지어 IMF 같은 기관조차 보고서를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해진 분배 불평등의 심화라는 현실이 놓여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실이 곧바로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사실은 예컨대 브렉시트나 도널드 트럼프 선풍에 작용라는 정치적 허무주의와 공격적 차별의 어두운 그림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누군가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우리가 정확하게 언제 죽을지는 몰라도 죽는 날에 하루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사라질 권력은 사라지고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낼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다시금 양극화 해소니 경제민주주의니 하는 경제학적 수사가 모습을 드러내는 주기가 찾아온 셈이다. 가운데로 수렴하던 경제적 수사가 선거 뒤에는 다시금 양극화된 정치지형을 따라 일시에 흩어지는 악순환, 칼레츠키가 얘기했던 정치적 경기변동의 한국 버전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그 악순환을 깨는 것, 요컨대 다시 정치인의 것이니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천명일는지도 모르겠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