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을 하고 있는 학생들 앞으로 진압 경찰이 들어선다.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한다. 그 중 몇 명이 노래 부른다. 걸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다.
지난 3일 이화여대는 극심한 학내 갈등을 빚은 ‘미래라이프대학’ 사업 신설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학생들이 반대 농성을 벌인 지 7일 만의 일. 생각해 볼 만한 사태였고, 음미해 볼 만한 마무리였다.
먼저, 최경희 총장의 전향적인 태도다. 총장은 단순히 학교 행정을 총괄하는 사람이거나 그 무슨 CEO라고 해서 수지타산 맞춰 경영관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총장이다. 학문적 위업, 인격적인 존경, 무한 책임을 진 학자로서의 진중한 고뇌가 총장이라는 단어에 함축되어 있다.
그동안 국내 곳곳의 대학 총장들은 스스로 이 존엄한 이름을 갉아먹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맞게 수지타산 잘 맞추고 재원 확보 잘해서 이른바 ‘학교 경쟁력’을 높이는 것, 그게 총장의 일이라고 십수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파괴해 왔다. 그러다가 물리적 사태라도 생기면 보직교수와 교직원을 방패막이로 세워 그 뒤로 숨고, 그래도 밀리면 경찰에 지원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총장이라는 명패 뒤에 앉아 거들먹거렸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추진하는 '미래라이프 대학(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 설립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2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 앞 벽에 졸업장 복사본을 붙여 놓고 있다. / 이석우 기자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동지가’ 대신
사태 발발 초기의 최경희 총장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주장처럼 이화여대의 역사와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신설 사업을 추진하면서 학내 구성원과 심도 깊은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농성을 하자 이번에는 여지없이 경찰의 힘을 빌렸다. 치안국가의 전형이다. 국가의 물리적인 힘이 사회 각 부문에 일고의 여지도 없이 거침없이 진입하는 사회는 위험하다. 그랬는데, 최경희 총장은 뒤늦게나마 사태를 수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신설 사업을 철회했고, 직접 본관 앞에서 사과의 뜻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했다. 연행된 학생들을 선처해 달라는 공문도 경찰에 보냈다. 이런 사태에 이르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학생들을 윽박지르고 경찰이 잡아가도 모른 체하고, 훗날에 귀교하면 대학 전체의 왕따로 만들어 인생 자체를 망가뜨린 총장과 대학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나마 다행이다.
다음, 사안의 본질, 즉 미래라이프 대학 사업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이화여대가 신설하고자 한 사업은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 고졸 재직자나 30살 이상의 무직 성인이 4년제 대학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가까운 미래를 결정짓는 두 개의 문제가 결합된 사안이다. 먼저 저출산 등으로 머지않아 현행 대학 구조는 급격한 붕괴를 겪게 된다. 1990년대에 우후죽순 늘어난 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라는 압력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하면 대학의 외형이 흔들리고 교육 내용 또한 부실해진다. 이에 종합적인 타개책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교육부는 이를 협소한 정량적 평가로 대학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만 진행한다. 대학은 자신들의 학문적 가치와 공공성을 스스로 추락시켜 왔기 때문에 교육부의 반강제적인 드라이브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보직 교수는 물론 심지어 힘없는 대학의 총장까지도 교육부의 중간간부들 앞에서 비굴하게 읍소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측면만 보면 이화여대의 조치가 이른바 ‘학위 장사’라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반면, 학령인구 감소 못지않게 중요한 변화는 장기화되는 사회 전반의 비정규직화, 급격한 지식 패러다임이 변화, 이에 따른 세대별 교육 욕망 등이다. 대학 때 배운 지식이나 자격증으로 정년퇴직하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20대 때 배운 것으로 20년 살고, 40대 때 다시 배워 20년을 더 살고, 60대 때 또 배워서 스스로 소박하면서도 존엄한 노후를 준비해야만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대학의 공공성이 이 점에서 중요해진다. ‘평생교육’은 곧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것이다. 단, 이를 대비하는 과정에서 교육부와 각 대학들이 지나치게 실용적 분야만을 ‘미래’의 ‘라이프’라고 설계하는 바람에 ‘학위 장사’라는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보다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는 사회에 적응하고 스스로 내면의 자존감을 회복하여 40대 이후의 위험천만한 사태 앞에서 소박하면서도 위엄 있는 생활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실용 분야만이 아니라 학문 전 분야의 전향적인 개혁과 개방이 필요하다. 기술이나 자격증이 없어 생활이 힘든 면도 있지만 외부의 모멸감과 심각한 자기 학대로 자존감을 잃고 목숨을 끊는 게 또한 가까운 미래의 일이다. 이를 대비하는 ‘평생교육’이 절실하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이번에 농성에 참여한 학생들도 20년 후에는 다시 ‘대학생’이 되어 또 배워 더 깊어지는 삶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의 시위 풍경, 생각해 볼 만하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일부 댓글은 ‘들킬까봐 창피하냐’, ‘시위 패션이냐’라고 비난하는데, 그런 측면도 있지만 우리의 대학문화 그 냉정한 현실이 낳은 그로테스크한 단면이다. 모두가 한 편이었던 과거에는 교수와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성원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다른 편이다. 찬반도 아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싸운다. 몇 년 사이 여러 대학에서 벌어진 사태 이후의 사태를 보면, 갈등 봉합은커녕 지속적인 괴롭힘이나 감시나 비난이 횡행했다. 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학생들은 결국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착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패션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위에 참여하고 농성에 가담하는 절박함,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고 있는 소녀시대.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다음으로 귀에 들린 것은 그들의 노랫소리다. 오랜 집회·시위문화에 익숙한 사람들로서는 너무나 낯선 풍경이었다. 인터넷에서는 ‘다만세’라고 했다. 다만세? 궁금하여 검색을 하면 ‘아재’가 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수십년 동안 학생이나 노동자들은 진압 경찰에 끌려가면서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동지가’를 불렀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서로 팔짱을 끼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다만세’? 무슨 노래지? 농성을 하고 있는 학생들 앞으로 진압 경찰이 들어선다.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한다. 그 중 몇 명이 노래 부른다. 걸그룹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다.
전해주고 싶어 슬픈 시간이 다 흩어진 후에야 들리지만
눈을 감고 느껴봐 움직이는 마음 너를 향한 내 눈빛을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만,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노래 소리는 점점 커져간다. 복도 저 끝까지 번져간다. 흡사 라이브 공연 무대의 ‘떼창’처럼 복도 가득히 ‘다만세’가 울려퍼진다.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낯선 풍경,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래전 집회 현장에서 꽤 나이 들어 보이는 분들이 격정에 못 이겨 ‘선구자’나 심지어 ‘애국가’를 부를 때, 한편 뭉클하면서도 옛날 분들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또 한 세대가 흘러 학생들은 진압 경찰에 끌려가면서 걸그룹 소녀시대의 노래를 부른다. 왜 운동가요를 부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는 풍경이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 비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이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그들은 또한 그들에게 주어진 그들의 문화적 스타일로 다른 시간, 나아가 다른 공간을 만들어갈 것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