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그린 <쾌락의 동산>에는 기묘한 동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낙원과 쾌락, 지옥을 순차적으로 담은 이 세 폭짜리 제단화에는 태초의 인간이 화수분 같은 생명의 샘과 함께하는 장면에서부터 욕정과 유혹, 방탕과 타락이 하나로 어우러진 난잡한 세계, 인간의 죄를 재는 저울과 생지옥으로 인간을 밀어 넣는 괴물의 모습이 차례로 묘사되어 있다. 동물들의 상징적 변이가 적나라하다는 게 특징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 혹은 신화집인 <산해경(山海經)>에도 온갖 기이한 괴물들이 출현한다. 사람과 물고기를 합쳐 놓은 반인반어를 비롯해, 꼬리가 아홉 개 달린 포유류, 뿔 달린 말, 외다리 새, 보행하는 물고기, 외눈박이 인간 등 다양한 상상 속의 존재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하나같이 괴상하게 생겼을 뿐더러 괴기스럽다.
디황, 죽은꽃. 캔버스에 유채. 130x161.5cm. 2014
<쾌락의 동산>과 <산해경>은 제작된 시기도 다르고 의도와 목적 역시 동일하지 않다. <쾌락의 동산>이 자연 그대로란 인간에게 매우 위험하기에 절제와 교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사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한다면, <산해경>은 비범한 공상의 세계를 통해 선인들의 지혜와 혜안을 담아내려 했다.
하지만 <쾌락의 동산>과 <산해경>은 상상의 세계를 관통한다는 동일점이 있다. 그럼에도 결코 현실 외적인 것이라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도 하나의 공통분모다. 즉, 참됨을 저버린 채 가짜 낙원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어 아수라로 떨어지는 인간사를 리얼하게 적시한 게 <쾌락의 동산>이라면, <산해경>에 자릴 잡은 각각의 괴물은 어쩌면 무진(無盡)한 변종으로 치닫는 작금의 인간들과 닮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도 괴물들이 활보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탐할 수 있다고 믿는 망종의 생태가 그러하고, 성별이 곧 사회적 차별이 되는 유무형의 폭력들이 그렇다. 여기에,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실제론 자신들의 끝없는 욕망의 발화인 정치, 소수의 올리가르히들이 공적 담론을 통제하는 사회, 약자에게 무차별적으로 분노를 배설하는 개인도 빼놓을 수 없는 괴물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물론 미술계에도 괴물이 산다. 이곳에도 각양각색의 괴물이 기생하고, 이 기생물들은 가난·질병·추문을 만들며, 작가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잔인함을 갖고 있다. 사익을 위해서라면 부정따윈 솜처럼 가볍게 여기는 파렴치, 욕정을 채우기 위한 유린, 최근 밝혀진 한 중견작가의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처럼 간혹 윤리적 타락이라는 끔찍한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종교는 부패했고 사회는 썩었다. 예술은 돈의 노예화가 진행 중이며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인들 역시 자신의 공덕을 위해 학문을 파는 거짓 선각자이거나 키보드 루저일 뿐 지성의 명령에 따르지 못한다. 우리 시대의 괴물은 바로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다. 무서운 것은 이것이 그림 속 허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가는 실체라는 데 있다. 반면 사회든 미술계든 도처에서 출몰하는 암흑과 죄악에 우린 대부분 망연할 수밖에 없다는 데 진정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현실의 괴물로부터 도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구원도 없다. 엄혹함과 도가의 풍도를 재현하는 참학한 문밖세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언제 어느 때 변이를 일으킬지 모를 잠재적 괴물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홍경한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