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스토리 파괴하는 껍데기 토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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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스토리 파괴하는 껍데기 토건문화

입력 2016.05.31 11:06

전국 곳곳에는 프랑스 마을, 스위스 마을, 지중해 마을 등 외국의 모습을 재현한 세트장 같은 마을들이 계속 건설되고 있다. 콘텐츠는 없이 그저 외국풍의 건축물들만 지어놓은 껍데기뿐인 토건형 문화사업의 전형이다.

전북 군산에 며칠 동안 머물다 왔다. 일제강점시대 수탈의 아픈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바로 그 도시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적산가옥,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사찰,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건설된 터널과 철길, 권력 기관들이 자리 잡고 있던 여러 근대식 건물 등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공간이 이곳 군산이다. 그리고 그 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이제는 군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자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어떤 이는 이런 역사의 흔적을 되짚어 보기 위해서, 또 다른 어떤 이는 근대 초기의 이색적인 분위기를 느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과 기대를 품고 군산이란 도시를 찾는다.

군산 경암동 철길 독특한 풍경 사라져
몇 년 만에 다시 방문한 군산은 그 사이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군산이 날것 그대로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군산이란 도시는 마치 잘 다듬어진 거대한 세트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낡은 적산가옥들과 근대식 건물들이 산재해 있던 거리에는 새로 단장한 깔끔한 상가 건물들이 일렬로 들어서 있었다.

그런데 이 신축 건물들은 하나같이 일본의 온천마을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모양새였다. 이곳이 근대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그 도시가 맞는지 아니면 새로 단장한 일본의 전통마을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군산에 온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 거리는 수탈의 역사적 흔적이나 근대 초기의 이색적인 분위기보다는 잘 재현된 ‘작은 일본’처럼 변모해 버리고 말았다.

군산의 경암동 철길 마을은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길이라는 역사적 상흔과 철길을 바로 앞에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어선 서민거주지가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이었다. 그 마을을 철거하고 완전히 상점으로 대체되면 그저 폐철길 앞의 평범한 상가 골목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민경배

군산의 경암동 철길 마을은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길이라는 역사적 상흔과 철길을 바로 앞에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어선 서민거주지가 만들어낸 독특한 풍경이었다. 그 마을을 철거하고 완전히 상점으로 대체되면 그저 폐철길 앞의 평범한 상가 골목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 민경배

게다가 어이없게도 이렇게 일본풍으로 지어 놓은 신축 건물 중 한 곳은 ‘군산 항쟁관’이란 간판을 달고 일제하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건물 외관과 건물 안 전시물 간의 극단적인 이율배반이다. 이런 이율배반은 다른 건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근대 역사의 유물이나 기록들을 만나리라 기대하고 들어갔던 근대식 건물 안에는 당혹스럽게도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거나 미니어처 건물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그 대신 근대 역사의 유물이나 기록들은 2011년에 개관했다는 최신식 건물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과거의 공간 안에는 현대가, 반대로 현대의 공간 안에는 과거가 전시되고 있는 타임슬립의 패러독스이다.

군산에서 아주 이색적인 공간 중 하나로 꼽히는 경암동 철길마을 모습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건설된 철길이라는 역사적 상흔, 그리고 이 철길을 바로 코앞에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어선 서민들의 애환 서린 거주지가 함께 만들어 낸 이곳만의 독특한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철길은 가로수와 벤치가 늘어선 공원으로 바뀌었다. 한쪽에서는 서민들의 거주지를 철거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다른 한쪽에는 이미 철거된 자리에 카페와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새로 들어서 있었다. 이 철길이 완전히 상점들로 대체되면 경암동 철길마을은 그저 폐철길 앞의 평범한 상가 골목으로 전락하여 원래의 역사성과 희소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말 것이다. 군산은 아주 많은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다. 그리고 그 스토리들을 말해 주는 인프라도 풍부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것들을 문화 콘텐츠로 만드는 일에는 아직 부족함이 커 보인다.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은 재개발 논란
물론 이는 군산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화 융성이 정부의 4대 국정기조 중 하나로 채택되고, 문화융성위원회라는 정부 기관까지 운영되고 있지만 정작 문화가 제대로 융성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의 온천마을을 모방한 군산처럼 전국 곳곳에는 프랑스 마을, 스위스 마을, 지중해 마을 등 외국의 모습을 재현한 세트장 같은 마을들이 계속 건설되고 있다.

콘텐츠는 없이 그저 외국풍의 건축물들만 지어놓은 껍데기뿐인 토건형 문화사업의 전형이다. 한강에 흉측한 모습을 한 영화 <괴물>의 거대 조형물이 설치되더니 강남 코엑스 앞에는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말춤’ 안무를 형상화한 손목 조형물이 새로 들어섰다. 모두 수억대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하지만 빠르게 유행이 변화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이런 철 지난 문화상품의 조형물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시민들의 여론도 흉물스럽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 역시 콘텐츠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껍데기를 중시하는 관료적 문화정책이 빚어낸 결과다. 일산에는 축구장 46개 넓이의 거대한 K-컬처밸리가 조성될 계획이라고 한다. 한류 콘텐츠의 요람이 되리라 기대한다는데, 정작 정부의 발표 내용을 보면 규모와 시설, 그리고 경제적 기대효과에 대한 상세 계획만 있을 뿐이다. 정작 그 공간이 어떤 콘텐츠들로 채워질지에 대한 내용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서도 성과 중심적 문화정책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 중에 일제하 독립운동부터 독재정권 시절의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중요한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은 재개발을 위한 철거 논란에 휩싸여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개입으로 일단 강제철거는 중단됐지만 아직 뚜렷한 해결책이 나온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미 뜯겨져 폐허가 되어 버린 집들도 상당수다. 이렇게 스토리와 역사성이 담겨 있는 진품은 자꾸 사라지고 키치 냄새가 진동하는 모조품만 계속 늘어난다.

문화융성이란 새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채워넣는 방식만으로는 절대로 이뤄질 수 없다. 문화융성을 위해 정작 필요한 핵심 자원은 시설이 아니라 콘텐츠다. 그리고 정말 가치 있는 콘텐츠는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진정한 문화융성은 개발보다는 보존을 지향해야만 가능하다. 물론 보존이 낡고 오래된 것을 단지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현대적 삶을 누리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는 진품 프랑스 마을, 스위스 마을, 지중해 마을처럼 군산도 옥바라지 골목도 그렇게 잘 가꾸고 다듬으면서 진짜의 모습으로 보존되어야 마땅하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IT디자인융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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