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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 다 털린 주민번호 그대로 쓰라고?

입력 2016.05.23 17:38

국회서 ‘뒷자리 일부 변경 가능’ 개정안 통과… 시민사회단체 “졸속 개정안이다”

한국인의 주민등록번호는 ‘공공재’나 다름없다. 주민번호를 포함한 개인정보가 유출된 건수는 2011년 7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5년 동안만 해도 9218만건에 달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1990년 이후 유출된 주민번호만 4억건 이상으로 추정했다. 가장 대표적인 개인정보인 주민번호가 전 세계에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형편이었다. 유출돼 피해를 입어도 바꿀 수 없었던 주민번호가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주민등록법을 개정하면서 아주 ‘살짝’만 바꿀 수 있게 됐다. 생년월일과 성별, 출신지역까지 유추할 수 있는 주민번호 체계의 문제점은 그대로 둔 채 주민번호 뒷부분의 자릿수 일부만 변경 가능하게 된 것이다.

19대 국회 마지막날인 5월 19일 본회의에서 주민등록법 개정안(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대안)이 통과됐다. 지난해 12월 23일 헌법재판소가 주민등록번호 변경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주민등록법 제7조는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데 따라 법을 개정한 것이다. 주민번호가 도입된 지 47년 만에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막기 위한 번호 변경이 가능하게 됐지만,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졸속 개정안 처리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기존의 주민번호 체계가 갖고 있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남겨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월 27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주민등록번호 성별 표시는 차별이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월 27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주민등록번호 성별 표시는 차별이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정근 기자

진선미 의원의 ‘임의번호’는 수용 안 돼
이번에 통과된 주민등록법 개정안 중 주민번호 변경에 관한 부분은 사실상 정부가 제출한 안이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앞부분 6자리의 생년월일과 뒷부분 첫째 자리의 성별 코드는 그대로 남는다. 주민번호가 개인의 중요한 신상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남성과 여성으로만 구분하는 주민번호 성별 구분 코드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현실도 그대로 남게 됐다. 반면 국회 안행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진선미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의 ‘임의번호’로의 전환 내용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민번호 13자리를 무작위의 임의번호로 부여해 주민번호를 통해 연령과 성별, 출신지역 등 개인정보를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방안에 정부가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임의번호 도입을 주장해 왔던 진선미 의원과 시민사회단체 등에서는 헌재의 주민등록법 제7조 헌법 불합치 결정에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취지가 있음에도 정부가 행정비용 등을 핑계로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고 주장했다. 헌재는 결정을 내리기 전 정부에 사실조회를 하는 과정에서 헌법소송의 판단대상인 주민번호 변경 문제 외에도 개인정보로 구성된 현행 주민번호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대책에 대해 정부에 답변을 요구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에 대한 정부의 답변은 군색했다. 5월 11일 안행위 법안심사소위에 출석한 김성렬 행자부 차관은 “(주민등록제도의 발전에 관해) 전문가들도 사회적 비용에 대한 정확한 추계가 쉽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추가적 검토와 연구가 좀 더 필요한 부분”이라면서 “20대 국회가 열리면 국회와 함께 연구하겠다”고 밝혔다.

헌재가 주민등록법 개정시한으로 못박은 것은 2017년 12월 31일까지다. 김성렬 차관의 발언처럼 정부에서도 주민번호 개편에 관해 추가적인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고, 아직 개정시한까지는 1년6개월 이상이 남아 있다. 20대 국회에서 처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19대 국회 막바지에서 무리하게 개정안을 통과시킨 양상이다. 이에 대해 진선미 의원도 “이대로 정부안으로 통과되면 (주민번호 체계의 문제에 관한) 논의 자체가 힘이 빠진다”며 “근본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그 취지 자체가 무산된다고 보기 때문에 차라리 20대로 넘기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권위도 “피해 심각할 수밖에 없다”
현행 주민번호 체계의 문제점은 단지 생년월일과 성별 등 개인정보를 보여주는 데만 있지 않다. 그동안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금융기관과 인터넷 상의 다양한 분야 서비스기업 등에서 주민번호를 바탕으로 개인을 식별해온 탓에 현재 광범위하게 유출된 주민번호가 주소나 전화번호, 신용거래정보 등 다른 개인정보에 접근하는 ‘키 데이터(key data)’ 역할을 해온 것이다. 법 개정으로 주민번호 일부 자리가 변경되더라도 개인정보를 노리는 세력이 과거 유출된 주민번호 및 기타 개인정보와 대조해 새로운 주민번호를 탈취하려 들면 전혀 막을 도리가 없는 셈이다. 게다가 새로 도입되는 주민번호 변경절차도 까다롭다. 변경이 가능한 경우가 주민번호 유출 때문에 생명·신체의 위해 또는 재산상의 중대한 피해를 입거나 입을 우려가 있는 경우 등으로 한정되고, 그 입증 책임이 변경 신청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반쪽짜리로 통과된 데 대해 인권위도 아쉬움을 표했다. 인권위는 “생년월일과 성별 등을 포함해 개인정보를 통합시키는 주민등록번호는 유출과 오·남용이 되면 피해가 지속적이고 심각할 수밖에 없다”며 “인권위가 권고한 목적별 자기식별체계 도입과 임의번호로 구성된 새로운 번호체계 등은 개정안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앞서 2014년 8월 ‘임의번호로 구성된 신규 주민번호 체계 채택’과 ‘주민번호의 제한적 사용’, ‘목적별 자기식별체계 도입’ 등을 핵심으로 하는 권고안을 국회와 정부에 보낸 바 있다.

임의번호를 적용한 주민번호 체계는 주민번호에서 개인정보를 드러나지 않게 하는 조치이자 이미 유출된 주민번호를 악의적으로 사용되지 않게 하는 방안이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지난해 10월 ‘마이넘버’로 불리는 개인식별번호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개인을 식별하는 임의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임의번호 부여만으로는 유출 시의 피해를 온전히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때문에 개인식별이 필요한 곳에서 주민번호 대신 ‘목적별 자기식별체계’를 통해 사용자를 식별하게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훈민 변호사는 “목적별 번호제는 행정·조세·의료·연금 등 각 영역별로 번호를 부여하여 개인정보의 집중을 방지하고 정보 유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목적이 있다”며 “주민번호의 가치를 낮추고 유출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목적별 번호제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20대 국회에서 임의번호식 주민번호 체계와 목적별 자기식별체계 등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는 쪽으로 새롭게 법 개정 논의가 지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이라는 강제성 있는 수단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그간 개인정보 유출의 책임이 있는 기업 등에서 보안비용 상승 등을 들먹이며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경실련과 민변,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공동논평을 내고 “19대 국회는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된 국민들 앞에 공청회 한 번 열지 않고 정부 주장을 주로 반영한 법안을 통과시켰다”며 “20대 국회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민등록번호의 근본적 개선을 위해 입법청원 등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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