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을 심연으로 몰아넣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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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을 심연으로 몰아넣는 음악

입력 2016.05.23 16:07

이 모든 무속의 음악들을 정돈하되 과감히 흔들리게 하면서 그 앞과 뒤로 둔중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영규/달파란’의 음악이 스크린의 나약한 인간들을 한없는 심연 속으로 몰아넣는다.

영화 <곡성>을 봤다. 다들 너무 무섭다고, 잔인하다고, 두 눈 질끈 감게 된다고 해서 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봤는데, 더러 잔인하고 구역질 나는 장면이 있는 정도였고, 그저 마음만 단단히 먹는 정도로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였다.

그렇다고, 잔인하지 않고 무섭지 않으니 기대 이하라는 얘기인가. 그렇지는 않다. 영화는 다른 장르의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그렇듯이 열린 텍스트다. 감독이 어떤 장면을 특히 강조하여 찍었다 해서 관람객 모두가 바로 그 시간에 몸을 움찔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일종의 브리지 숏으로 이 시퀀스와 저 시퀀스를 부드럽게 잇기 위하여 살짝 집어넣은 기술적인 짧은 한 커트에서도 어떤 관객의 심장은 잠시 강직될 수도 있다.

남도의 여러 곳을 나름대로 돌아다니면서, 곡성 하면 슬픈 표정을 한 아름다운 보성강을 나는 먼저 떠올리는데, 이 영화에서 브리지 숏으로 강이 나올 때, 나는 그곳이 보성강이 아닌가 하며 잠시 멀미를 했다.

영화 의 한 장면

영화 <곡성>의 한 장면

또 이런 장면.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이 함께 느꼈을 법한데, 바로 영화 시작 1시간20분쯤이 되어서야 등장한 황정민이 7분여에 걸쳐 살의의 굿판을 벌이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영화가 거의 KTX 속도로 질주하는 바람에 사전에 정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정작 1시간20분쯤 되어서야 황정민이 고갯길을 질주하며 등장했을 때, 아 맞아, 했을 정도였고, 이어지는 두 번의 굿, 특히 두 번째의 굿판은 영상도, 연출도, 연기도 충격적이었지만, 내가 느낀 충격은 보다 심연에 드리워지는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고, 힘들어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온정신을 산산이 부쉈다가 다시 정돈하는 살풀이 굿판을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존재구나, 그런 생각을 그 순간 나는 했다.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상당히 세련된 실험을 해온 ‘장영규/달파란’은 이 영화에서, 특히 굿판에서 득의의 사운드를 들려주는데,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음악이 화면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해석들이 일고 있지만, 정직하고도 단순하게 보면 영화는 일회적인 인간의 삶을 거침없이 유린하는 가공할 공포와 그것을 묵인 방조하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이것은, 실은 또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아예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감독이 자막으로 제시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장 37절)

곡성, 슬픈 표정을 한 아름다운 보성강
나홍진 감독이 도스토예프스키를 탐독하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의 수많은 대작들, 그 무수한 러시아 인물들의 담론과 고뇌와 죽음은 대체로 맨 앞에 제시한 성경의 한 구절로 수렴된다. 직접적으로 러시아 정치 상황과 혁명주의자들의 죽음을 다룬 <악령>은 누가복음 8장 32절, 즉 돼지떼의 악령 이야기이며, 쾌락과 욕망이 흥건한 광장 위로 슬라브 정신과 혁명 정신이 피를 흘리며 난투하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역시 맨 앞에 적은 성경의 한 구절, 즉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는 메시지를 향하여 광기의 춤을 춘다.

나홍진 감독이 영화 맨 앞에 제시한,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묻는 심오한 장면은 서양미술사의 영원한 주제이기도 하다.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화가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제자들 앞에, 특히 의심 많은 제자 도마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알프레드 뒤러, 페테르 루벤스, 마티아 프레티, 조반니 바르비에리 등의 수많은 작품이 남아 있거니와 특히 명암의 대비가 선명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카라바지오의 작품이 불멸성을 획득하고 있다.

카라바지오는 심오한 체념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예수의 오른쪽 어깨로 강렬한 빛을 투사한 후 이 빛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의심을 하고 있는 세 명의 제자들을 거쳐 다시 예수의 옆구리에 난 끔찍한 상처로 떨어지도록 그렸다. 그 상처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던 특히 의심 많은 도마는 전율에 휩싸여 급히 손가락을 빼는데, 예수가 왼손으로 완강하게 그의 손목을 잡고, 다시 한 번 상처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보라고 한다. 카라바지오는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하여 큰 상처 입은 예수의 옆구리 살이 일단 한 번 집어넣었던 도마의 손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 나오도록 그려놓았다. 바로크 미술의 절대적 과제였던 ‘완벽한 디테일’의 백미다. 도마는 손을 빼지도 다시 넣지도 못한 채 등 공포와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다. 성경의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영화 의 굿판 촬영 장면

영화 <곡성>의 굿판 촬영 장면

황정민의 굿판을 울리는 무속의 소리
영화의 맨 앞에 이를 적시한 나홍진 감독은 그래도 부족하였는지 영화의 말미에서 “보고도 믿지 못하느냐”는 장면을 거듭 집어넣었고, 급기야 관객 300만 돌파 시점에서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까지 말하였다. 영화 속에서 광기어린 죽음이 전개될 때 만약 “내가 처음 물었던 질문은 인간이 피해자가 되는 데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겠는데, 왜 피해를 입었는지는 모르겠더라. 이건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데, 내 존재와 직결된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감독의 이러한 자문과 자답은 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나 관객의 다양한 반응 여부와 상관없이 소중하다. 사실 이 질문은 무신론 시대에, 신이 사라진 시대에 과연 인간은 누구에게 기도를 해야 하며, 어떤 힘에 의지하여 험난한 생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말러의 교향곡 주제이기도 하며, 아무리 신이 죽었다 하더라도 인간의 내면에 한 줌의 선이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메시지, 즉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맨 앞에 제시한 한 톨의 ‘밀알’이라는 주제와 겹쳐진다.

나는 그것을 역설적이게도 황정민이 살의의 굿판을 벌이는 7분여의 장면에서 통렬하게 느꼈다. 죽임의 장면에서 생의 강렬한 힘을 말이다. 이때, 음악은 광기어린 황정민의 연기를 때로는 압도하며 스크린 밖으로 넘쳐난다. 황정민이 신칼을 뒤흔들 때 대신방울은 정신없이 흔들리고 타살칼을 던질 때 엎어놓은 징과 제금을 두드리는 소리는 내 심장을 뒤흔든다. 그리고 이 모든 무속의 음악들을 정돈하되 과감히 흔들리게 하면서 그 앞과 뒤로 둔중하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장영규/달파란’의 음악이 스크린의 나약한 인간들을 한없는 심연 속으로 몰아넣는다.

나홍진 감독은 말한다. “신에게 물었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진짜 존재는 합니까. 존재한다면 왜 방관합니까. 여러 참사나 이유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피해를 당하는 겁니까.” 황정민의 굿판을 울리는 무속의 소리들과 ‘장영규/달파란’의 음악은 그 질문을 더욱 처참하게 찢어버린다.

답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약한 우리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존재론적 권리, 즉 질문조차 없을 수는 없다. 답 없는 질문에 의하여 영화는, 영화 속의 음악은, 수많은 해답들을 낳고 있다. 답 없는 질문을 거듭 던짐으로써, 또한 나약한 우리 인간은 운명의 가혹하고도 절대적인 힘에 맞서 살아간다. 답은 없다. 그러나 질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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