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대신 벨라 바르톡을 듣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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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대신 벨라 바르톡을 듣는 이유

입력 2016.03.29 11:43

브람스의 후세대 음악가인 벨라 바르톡은 동유럽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녔고, 채집했고, 그를 바탕으로 작곡을 하였으니, 그 결실은 주류 음악 문화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충격적인, 신선한 음악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면 젊은 독자들은 “아, 이 양반 ‘개저씨’에 ‘꼰대’구나”라고 할지 모르나, 내 삶의 작은 축복은 소백산 깊은 산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려서 마음만 먹으면 아침 먹고 갔다가 점심 때 올라올 수 있을 정도지만, 나 태어나던 때의 풍기읍 순흥면 태장리는 산촌이었다. 이 마을에 슬레이트 지붕이나 전기가 들어온 게 초등학교 2학년 때였고, 이듬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 한 줌의 유년의 기억 속에 책보, 호롱불, 초가, 깡보리밥 같은 고색창연한 흔적이 묻어 있다. 성장하여 서울 도회지를 배회하며 살게 되었고, 도시의 인연에 따라 더러 사람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어 그런 자리에서 한가로운 정담을 나누다 보면 의외로 이 같은 장소적 기억이나 물질적 기억이 드물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호롱불 밑에서 가나다라를 쓰고 깡보리밥을 먹고 초가를 나와 책보를 둘러메고 순흥초등학교에 다녔던 기억이야말로 부모님이 주신 문화사적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의 얘기다. 내 성장기의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의 깔끔한 학교로 전학을 와서 겪은 음악시간이었다.

음악시간의 문화적 충격이란 이런 것이다. 음악을 통하여 아이들의 심성을 맑고 곱게 키울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마땅히 익혀 부를 만한 동요나 가곡을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대부분의 도회지 아이들은 그 곡을 자주 접한 듯 곱고도 상냥하게 불렀으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생전 처음 듣는 곡들이라 가사조차 알 리가 없었다. 여러 아이들이 합창으로 정겨운 가곡이나 따사로운 동요를 부를 때, 나는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벙긋하면서 창밖을 힐끗힐끗 내다보았다. 내가 알 수 없는 노래들을 나만 빼놓고 모두가 열렬히 합창을 하는 그 순간에 나는 ‘문화적 소외’를 처음 느꼈다.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브람스 대신 벨라 바르톡을 듣는 이유

음악적 모국어를 찾아헤맨 음악가
그래서 어찌되었냐고? 성정이 반듯한 아이라면 그 노래들을 어느 순간에 잘 따라부르면서 곱게 자랐겠지만, 나는 그 아리따운 노래들 대신에 집 근처 편물공장에서 흘러나오던 최헌·조경수·윤수일 등의 고고 트로트를 따라 불렀고, 갑자기 화산처럼 터진 산울림 노래를 흥얼거렸으며, 오락시간에 주판을 기타 삼아 들고 흔들면서 그런 노래들을 연달아 불러서 도회지 아이들에게 흥겨움을 선사했다. 동시에 나는 문득 구경거리가 된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보았으나 어린 소년에게 그런 결핍감보다는 아이들이 나의 노래에 즐거워한다는 사실을 또한 나는 즐겼다.

그 무렵에 가장 기이한 노래는 ‘진주 조개잡이’나 ‘동무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 노래들은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노래라서 낯설고 이상했을 뿐이고, ‘밀양 아리랑’, ‘울산 아리랑’ 같은 노래였다. 기본적으로 이 노래들이 신민요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학교 교실에서 민요, 즉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은 두 손을 배꼽에 모으고 복식호흡을 해가며 서양식 창법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른 노래들은 내가 순흥면 태장리에서 들었던 진짜 민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노랫말도 얼추 비슷하고 가락도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지만, 글쎄, 도회지 교실의 민요는 저 시골 논바닥에서 동네 할아버지들이 부르던 노래가 결코 아니었다.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랄까, 아무튼 이 기억 때문에 훗날 나는 성장하면서 턱시도나 드레스 차림에 과도한 표정을 지어가며 서양식 창법으로 부르는 민요를 전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요하네스 브람스 대신 벨라 바르톡을 듣는다. 물론 교향곡이나 실내악에서는 브람스가 저 험준한 고봉 위에 올라간 자다. 하지만 그의 ‘헝가리 무곡’은 비록 그가 가난하게 성장하긴 하였으나 독일계 전통의 여행자 음악의 산물이다. 1852년, 그의 나이 19살 때 고향 함부르크에서 헝가리계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드 레메니의 연주를 듣게 되는데,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는 절친이 된다. 3살 많은 레메니는 이미 직업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람스는 레메니와 동행하면서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도 만나게 되고, 운명의 인연이 되는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도 만나게 된다.

그렇게 동유럽 일대를 돌아다니는 중에 브람스는 ‘헝가리 무곡’을 작곡하게 된다. 이 곡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자 레메니는 브람스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간 것이라고 고소까지 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두 사람은, 특히 브람스는 헝가리 일대를 전전하는 집시들의 음악에서 ‘헝가리 무곡’의 뼈대를 완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6살에 발표한 이 곡은 큰 인기를 얻었다. 물질적으로 다소 안정이 될 수 있었다. 그 무렵 독일계 문화권에서 집시 음악은 꽤나 잘 팔리는 문화 코드였다. 리스트, 사라사테 같은 사람도 집시 음악에서 도출된 음표들을 독특하게 배열했고, 1875년 작곡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도 스페인의 집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런데, 그것들은 당시 개별 작곡가들의 열렬한 창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유럽 중산층 문화의 관점에서 선별되고 채집된 집시 문화였을 뿐이다. 19세기 주류 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집시 여인은 늘 외로움에 몸을 떨면서도 고혹적인 미소를 갖고 있으며 마음까지 순정하다. 실제로 개별적인 집시 여인들이 그러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유럽 주류 문화 소비자들이 비주류 소수인종의 여성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인데, 맥락은 다르지만 이렇게 형성된 집시 문화에 대한 소비적 감성은 훗날 우리나라에서 이치현과 벗님들의 ‘집시 여인’이라는 곡으로까지 이어진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역시 현란하게 넘실대거나 애상적으로 비틀거리는 선율로 너무나 매혹적이지만, 그것이 헝가리의 민속음악이거나 실제의 집시 음악인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빈의 아늑한 음악당이나 카페에 어울리는 곡이다. 성악가들이 다소 괴이하게 부르는 ‘울산 아리랑’처럼 말이다.

에디슨 축음기로 슬로바키아 민속 음악을 녹음하고 있는 벨라 바르톡.

에디슨 축음기로 슬로바키아 민속 음악을 녹음하고 있는 벨라 바르톡.

동유럽 전역의 민속 음악 수천 곡 채집
벨라 바르톡은 브람스의 후세대 음악가이자 실제 헝가리에서 태어난 인물로, 유럽 주류문화가 편집하거나 때로는 왜곡한 자신들의 음악적 모국어를 찾아헤맨 음악가다. 그는 헝가리의 작은 마일 토론타일(지금은 루마니아 지역)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헝가리·루마니아·유고·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전역의 민속음악을 채집하였고, 터키를 시작으로 튀니지·알제리 같은 북아프리카 일대까지 그 작업의 폭을 넓혔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수천 곡의 민요를 악보로 필사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하였으며, 관련된 논문을 집필하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 방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그만의 독창적인 곡들을 만들었다.

1903년 6월, 부다페스트 음악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모든 이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바르톡은 그러나 이듬해 헝가리 북부 휴양지에서 몇 달 머물다가 그곳에서 그 어떤 ‘첨가물’도 배어 있지 않은 헝가리 전승 민요를 들으면서 음악가의 새 길로 나섰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후기 낭만파 스타일의 작곡자로 촉망받았지만 그는 그 안정된 길을 포기하고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를 들고 헝가리를 시작으로 슬로바키아 지역까지 순례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동유럽의 전통적인 작은 마을에서 고대 그리스 선법이나 교회 선법의 여러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1907년 여름에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오늘날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민요 수집작업을 진행하여 한동안 서구 클래식계에서는 잊혀진 고대의 5음계를 확인하게 된다. 그에 의하여 동유럽에 산재한 종족의 문화와 역사가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다. 1907년에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된 바르톡은 이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더 많은 수집과 연구 및 작곡을 병행하게 된다.

만약 그가 원래의 행로대로 독일계 주류음악의 언저리에서 피아노를 잘 치고 작곡도 곧잘 하는 길을 걸었더라면 몸은 20세기에 있으나 스타일은 19세기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그런 음악 자체가 있는 줄도 모르는 가운데, 바르톡은 동유럽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녔고, 채집했고, 그를 바탕으로 작곡을 하였으니, 그 결실은 주류음악 문화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충격적인, 신선한 음악이 되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그의 공포와 저항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음악가’가 되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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