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의 ‘바다’를 들으면 멀미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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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바다’를 들으면 멀미가 난다

입력 2016.03.15 13:41

이 곡을 그는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아름다운 프랑스 해변, 일렁거리는 파도,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 이런 풍경을 직접 보고 그 ‘인상’을 오선지로 옮긴 것인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명색이 음악에 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살면서도 나는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한다. 아니, 동네 피아노 학원의 조무래기 아이들보다도 못 친다. 뭘 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나이가 들어 손이 너무 굳어버렸고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피아노 학원에 가야 하는 아이들보다는 일상이 분주하고 복잡하다, 고 변명을 해보기는 하는데, 사실은 수학적 사고와 응용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음악은 수학이다. 음악은 고도의 감각예술이지만 동시에 엄밀성의 수학적 체계다.

조금 얘기를 확대해 보자.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즉흥적이고 감각적이고 흥분 잘하고 감정에 치우치는 모습이다.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갑자기 격렬하게 연주를 하거나 오선지에 휘갈겨 쓰는 영화 속 이미지가 익숙하다. 그러나 자료로 살피거나 내 주변의 음악가들을 보건대 이렇게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격렬한 흥분상태로 작품이라든지 대인관계를 하는 음악가들은 거의 없다.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 산악 지방의 별장에서 작곡
우리는 황석영이나 신경숙을 읽을 때, 작품 속의 치밀한 구조와 미세한 감정을 읽는 것이지 부스스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글을 쓰는 작가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음악 연주의 특성이 있다. 다른 예술들은 작가들이 자신의 집필실이나 스튜디오에서 완성한 것을 출판하거나 전시하고 이를 우리가 소비하고 체험한다. 반면 음악은 수용자 바로 앞에서 동시성의 운명으로 생성된다. 관객 앞에서 탄생하자마자 사멸하는 시간예술이 음악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격렬하게 피아노를 두드리는 연주자에게 각별한 감정을 부여하며 듣게(보게) 되는데, 그러나 그 표정이 음악은 아니다. 귄터 반트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같은 거장의 지휘 모습을 보면, 브람스나 브룩크너 같은 심오하고 침통한 교향곡을 할 때조차 그들은 흡사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듯한 간결하고 단순한, 조금 의미를 부여하면 음에 집중한 경건한 모양인데, 그러나 온몸을 던지는 두다멜 같은 젊은 지휘자가 아직은 도달할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연주다.

예술, 특히 음악이 아무리 우리의 감정을 어루만지거나 격동시키더라도 정작 그것을 창작한 예술가, 즉 음악가들이 그 창작 과정에서 오로지 감정의 격렬함에만 의존하여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고정된 이미지를 버릴 필요가 있다.

가령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을 보자. 인상주의 그림을 ‘인상적’으로만 설명하면, 어두컴컴한 화실에서 벗어나 야외의 자연과 빛을 순간적으로 격렬하게 격정적으로 묘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들의 그와 같은 격정의 작품들은 치밀한 연구와 탐색과 논의, 특히 현대 대도시의 시공간 변화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소산이다. 그들은 마을이 아니라 도시를 그렸고,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철도로 대표되는 질주하는 시간을 그렸으며, 단조롭게 반복되는 원형의 삶이 아니라 어디론가 부산하게 이동하고 두리번거리고 좌우를 살피며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렸다. 그래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로 유명한 하우저는 바로 그 책의 인상주의 대목에서 이 화가들을 ‘빛을 그린 화가’라는 식의 ‘인상기’로 적지 않고 현대 도시의 목격자요 증언자요 다큐멘터리 제작자라는 관점으로 묘사한다.

가츠시카 호쿠사이 목판화 ‘파도’

가츠시카 호쿠사이 목판화 ‘파도’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인 클로드 모네의 기차역 연작이 그 증거다. 그는 1874년의 전시회에 출품한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으로 화단을 넘어 예술계, 나아가 지성계 전체에 충격파를 던졌는데, 인상주의라는 하나의 사조가 그의 작품 제목에서 비롯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런던 국회의사당’이나 ‘루앙의 대성당’ 같은 걸작은 사물 곧 세계는 정지해 있고, 예술가 즉 서구인이 다가가서 얼마든지 취급할 수 있다고 하는 인식체계 자체를 흔들었다. 사물 곧 세계는 예술가 즉 서구인과 별개로 일렁거리고 독자적으로 운동한다는 것, 사상가들이 그런 사유에 도달할 때 모네는 그것을 위의 작품들로 증명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지되었던 세계가 쉼없이 유동하는 세계로 인식·재현된 것이며, 이것이 곧 근대적 사유의 뿌리가 된다.

클로드 모네 작품인 ‘생 라자르역에 도착하는 노르망디발 기차’

클로드 모네 작품인 ‘생 라자르역에 도착하는 노르망디발 기차’

현대음악의 시발점으로 언급하는 이유
이런 관점에서 모네는 파리 북역(생 라자르 역)을 자주 그렸다. 1837년 완공된 이 역은 모네 시기에 이미 파리 교통의 중심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프랑스 및 유럽 교통의 거점이 된 곳이다. 이 역에는 하루 종일 증기기관차에서 뿜어내는 허연 연기가 역사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지곤 한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환영 같은 세계. 그것은 흐린 날씨에는 제대로 볼 수 없는 해돋이보다 훨씬 더 쉽게 찾아갈 수 있고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인상주의 음악 역시 같은 맥락이다. 드뷔시가 이를 대표하는데, 그의 작품 중에 교향시 <바다>가 있다. 이 곡을 그는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아름다운 프랑스 해변, 일렁거리는 파도, 따스하게 비치는 햇살. 이런 풍경을 직접 보고 그 ‘인상’을 오선지로 옮긴 것인가. 천만에, 그렇지 않다. 물론 드뷔시는 우리가 그렇듯이 살면서 배를 타보기도 했을 것이고 해변에 놀러 갔을 수도 있다. 파도의 장난, 해변의 사랑, 저녁의 놀 같은 풍경이 주는 감정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교향시 <바다>는 이런 경험의 재현이 아니다. 그는 이 곡을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프랑스 산악지방의 별장에서 작곡했다. 그는 서양음악의 관습에서 벗어나 음악적 재현의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 다른 문명권의 다른 창작방법을 연구하였는데, 그 무렵 세기말과 세기초의 유럽 대다수 예술가들은 일본의 근대미술에 큰 자극을 얻고 있었다.

드뷔시 또한 일본의 세속화이자 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畵ㆍ부세화)를 열심히 찾아 연구하였다. 특히 근대 일본 세속화의 거장인 가츠시카 호쿠사이가 그린 바다, 즉 원경으로 후지산이 장엄하게 솟아 있고 근경으로 거센 파도가 일어나 작은 배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선원들을 금세라도 할퀴고 잡아먹을 것 같은 목판화 연작에 드뷔시는 주목하였다. 아, 대상의 표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내면에 숨어 있는 본질을 직접적 재현이 아닌 인상적 재현으로도 얼마든지 표현해 낼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그는 확인하였고 이를 오선지에 실천한 것이 교향시 <바다>다.

그렇다면 드뷔시도 기차를 좋아했을까?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좋아하고 또 그런 기기로 작품을 하듯이 이 모더니티의 증언자도 철도를 사랑했다.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려오면 일부러 집 밖으로 나가서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기차를 보곤 했다. 기차 소리만으로도 엔진의 성능을 알 수 있을 정도였고, 당연하게도 갑자기 들려오는 기차 소리로 현재의 시각을 판단하기도 했다.

이렇게 근대의 속도와 변화무쌍한 문명 변화에 몰두했던 드뷔시는 음악이라는 간판이 달린 ‘근대문명연구소’의 수석연구위원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의 ‘연구 프로젝트’는 사물이나 대상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도사린,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을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가였다. 그는 자연주의적 재현이나 묘사가 아니라 그와 같은 사물과 대상에 대한 사유와 직관으로 충분히 표현해낼 수 있다고 시도하였고, 이 시도가 금세 발전하여 20세기 초엽의 추상 회화와 추상 음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사가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기이한 불협화음의 작곡가뿐만 아니라 드뷔시를 현대음악의 시발점으로 분명하게 언급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진행된 드뷔시의 연구, 아니 음악이 딱딱하거나 난해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피아노 곡 ‘어린이의 세계’나 ‘달빛’ 같은 곡을 들을 때 우리는 지극히 평온하면서도 미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되며, 교향시 <바다>를 들을 때는 일렁거리는 파도로 인하여 멀미를 느끼게 된다. 음악을 들을 때 갖게 되는 기이하면서도 경이롭고 미묘하면서도 황홀한 감정, 그것은 부스스한 머리칼을 쥐어 뜯는 작곡가의 괴팍한 감정이 전이된 게 아니라 드뷔시 같은 음악가의 냉철한 사유와 치밀한 연구의 결실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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