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에서 이 곡만큼은 널리 유포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시스티나 성당에만 한정해야 한다고 했고, 훗날에 모차르트가 이곳을 방문하였다가 잠깐 한 번 듣고는 그대로 암기하여 나중에 악보로 옮겼다.
종교음악을 ‘종교음악’으로만 들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의 일상 문화로 정착한 것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인류의 수많은 종교음악 중에서 ‘도시일상 음악문화’로 정착한 것은 서양의 기독교 음악인데, 이를 ‘교회음악’으로 한정하여 듣게 되면 인류의 문화유산 절반을 좁은 항아리 안에 넣어두는 격이다. 개인의 신앙 여부와 상관없이 서양의 클래식 문화, 그 역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종교음악은 ‘기독교 음악’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제의와 열망 속에 담긴 당대 사람들의 집합적 의지와 내면의 풍경이라고 봐야 한다. 지극한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페르콜레지의 ‘슬픔의 성모(Stabat Mater)’ 같은 곡은 특정 종교 여부를 떠나서, 심지어 무신론자조차도 죽음의 참담함과 삶의 엄숙함을 느끼게 된다. 예술의 초월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교음악을 그것을 낳은 종교적 환경, 전례, 당대의 종교 사상과 떼어내서 순전히 ‘음악적 광휘’로만 섬기는 것도 위험하다. 특정한 칸타타나 미사곡이나 애도의 노래가 ‘왜, 어떤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향하여’ 불렀던 것인가를 좀 더 찾아보고 헤아려봐야 그 음악의 지극한 순도에 이를 수 있다.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Miserere)가 대표적이다. 초기 바로크 시대, 당대 유럽의 정신적·종교적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활동한 음악가다. 로마에서 태어나 9살 때 로마의 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음악생활을 시작했고, 1630년에는 로마 교황청 성가대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니 그의 음악에는 서유럽의 화려한 궁정음악이나 동유럽의 지극히 단순하여 경건한 정교음악과는 다른 로마악파의 대부 팔레스트리나를 정점으로 하여 발전해온 르네상스 다성음악의 최고 전성기 성과들이 농축되어 있다.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벽
클래식 문화 절반 차지하는 종교 음악
자, 이 같은 내용은 음악사의 장르적 성격이고, 종교 전례의 관점에서 그의 걸작 ‘미제레레 메이’를 들어보자. 종교음악은 특정한 목표에 따라 엄격하게 부르는 곡이다.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불렀다가는 지탄을 받고 파문을 당할 수도 있다. 종교음악은 엄밀히 말하여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형식을 띤 ‘기도’이고 ‘예배’이기 때문에 이를 세속의 취향대로 작곡하거나 부를 수는 없다.
이 곡, ‘미제레레’는 가톨릭의 전례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엄숙한 주간에 드리는 기도의 음악이다. 바로 ‘성 금요일’이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수모와 고난을 당한 후 십자가의 길을 걷고 부활하는, 종교을 넘어서 인류 모두가 기억하는 가장 절박하고도 엄숙한 주간, 그 절대적 순간인 부활절 직전의 금요일이 바로 성 금요일이다.
알레그리는 1638년 부활절을 앞둔 성주간을 위해 ‘미제레레’를 작곡했다. 로마 교황청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의 곡은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엄수되었다. 시스티나 성당? 그렇다. 로마의 바티칸 시국, 그곳의 교황 관저인 사도 궁전, 그 안에 있는 성당이다. 구약성서의 솔로몬 성전에 근거를 두고 지어졌다고 하는 장엄한 공간이며,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비롯하여 라파엘로·보티첼리 같은 예술가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곳곳에 그려져 있는, 로마 교황청의 보옥이며 전 세계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의 장소다. 비단 가톨릭 신자들의 성소일 뿐만 아니라 종교 여부와 상관없이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 바로 그 자리, 그 성소, 그 거룩한 공간의 불빛이 하나둘 꺼져간다.
자, 잠시 상상해 보자. 전기 조명이 없던 시절, 1638년 성 금요일의 저녁 예배. 이를 ‘테네브레’(Tenebre)라고 한다. 라틴어로 ‘그늘’ 또는 ‘어둠’을 뜻한다. 무시무시한 ‘암흑’이라기보다는 세속의 죄를 완전히 씻고자 하는 경건한 ‘어둠’이다. 말 그대로 극도의 엄숙함을 더하기 위해 그나마 밝혀두었던 촛불도 하나씩 꺼져간다. 완전한 어둠이 시스티나 성당을 압도하면 추기경들이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지상의 대리인 교황은 엎드린다. 경건한 어둠 속에 교황과 추기경마저 최고 수준의 속죄를 위하여 엎드린 바로 그때, 알레그리의 ‘미제레레’가 어둠 속으로 경건하게 번져나간다.
오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부드러운 자비의 충만함으로 나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이 순간, 개종의 유혹까지 느껴질 만큼 강렬한 법열의 이 순간, 믿는 자는 물론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심지어 그 어떤 종교인보다 성실하고 순박하여 마음 속에 티끌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도 깊은 참회의 어둠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그러니 주의해야 한다.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을 때 이 곡을 듣게 되면 정말 아무나 붙잡고 울게 된다.
(시계방향으로)바흐 마태수난곡의 명반으로 꼽히는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음반, 필리페 헤르베헤 지휘 음반, 해리 크리스토퍼스 지휘 '더 식스틴'의 명반 알레그리 미제레레, 킹스칼리지의 알레그리 미제레레
다섯 성부의 합창단 사이로 잔잔하게 밀려드는 4명의 솔로, 특히 비브라토를 쓰지 않는 소프라노가 종교적으로는 경건하고 세속적으로는 유혹적이기까지 한 높은음 C를 부를 때 요즘 하는 말로 ‘소름’이 돋는데, 그 미묘한 가창에서 세속의 전율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내가 종교 바깥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는 그런 곡이다. 교황청에서 이 곡만큼은 널리 유포되어서는 안 되고 오직 시스티나 성당에만 한정해야 한다고 했고, 훗날에 모차르트가 이곳을 방문하였다가 잠깐 한 번 듣고는 그대로 암기하여 나중에 악보로 옮겼다는 등의 얘기는 사족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곡에 매달려 있는 음악사의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이러한 종교음악은 어떤 공간에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종교적·음악적 조건에서 울려퍼진 것인가를 살펴보고 또한 그 정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개종의 유혹까지 느껴질 만큼 강렬함
거듭하여 ‘상상해 보자’고 썼는데, 왜냐하면 서양의 종교음악 그 정수는 우리가 쉽게 접하기 어렵고, 어쩌다 공연을 본다 해도 그 음악이 전례되는 공간이 아니라 대규모의 음악홀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 지극한 경건함 대신 ‘아, 노래 잘한다, 합창 잘한다’는 식의 인상만 남기 쉽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대규모 공연장에서 접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경건한 성당이나 고졸한 교회에서 울려퍼진 곡임을 상상하면서 들어야 한다.
다름 아닌 바흐의 ‘마태 수난곡’ 때문이다. 바흐 음악인생의 전성기는 라이프치히의 1729년, 그해의 성 금요일인 4월 15일에 그가 악장(칸토르)으로 봉직한 성토마스 교회에서 초연된 곡이다. 예수의 고난이 절실하게 기록된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의 시인 피칸더의 비통에 찬 시와 바흐 자신의 작사가 어우러진 무려 4시간가량의 대곡이다. 한때 잊혀졌다가 1829년 멘델스존이 발굴하여 초연되었고, 그 후 서양 클래식 음악문화의 ‘성서’로 통하는 곡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이프치히 성토마스 교회, 시인 피칸더, 그리고 전례의 세속화 경향을 비판한 경건파의 비판까지 받았던 바흐라는 요소들이다. 이 세 요소는 음악에 있어 루터교의 원리에 따라 최고 수준의 작곡으로 인간 내면의 깊은 곳까지 속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지향한다. 그 웅대한 결집이 ‘마태 수난곡’이다. 이 장대한 곡을 내내 압도하는 비참한 죄의식은 기본적으로 세속의 일상적 죄는 물론이요 속죄양 예수 이후의 종교적 죄의식을 씻어내야 한다는 교리의 측면이지만, 지옥 같은 30년전쟁과 그 이후의 사회적 대혼란을 가까스로 수습한 독일 전역의 마음 상태, 즉 일상 곳곳에 드리워진 죽음의 비참함과 실낱같은 구원의 기도라는 간절한 열망이 응축된 것이다.
나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만 할 때 주여, 내게서 떠나지 말아 주소서!
내가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할 때 주여 내 곁에서 지켜 주소서!
이를 감안하여 들어야 한다. 어디서? 그렇다고 갑자기 독일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바로 그 독일 라이프치히 바로 그 성토마스 교회의 합창단과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15일(대구)과 16일(서울) 내한한다. 26일에는 비유럽 종교음악 문화의 정점을 찍은 마사아키 스즈키 지휘의 ‘바흐 콜레기움 재팬’이 통영국제음악제에서 ‘마태 수난곡’을 들려준다. 가서 들을 만하다. 듣되, 상상하여, 들을 만하다. 300년 전쯤의 숨 막히는 종교적 장소를 상상하면서 깊이 들을 만하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 곡은 시쳇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 불안과 공포가 일상화된 우리의 삶을 잠시나마 거룩하게 어루만져 줄 것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