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을선 선생의 ‘산천초목’이 주름치마처럼 펼쳐진 한라산 남단의 여인들이 살아내야만 했던 억센 생애를 대번에 떠올려 준다면, 이를 바탕으로 한 강권순 선생의 ‘산천초목’은 노랫말 사이사이로 한라산의 바람이 스며든다.
다시 제주도. 2년 만이지만 이즈막의 도회지 사람처럼 마음은 늘 제주도를 지향해왔다. 천운이랄까, 겨울의 한복판에 예정했던 길인데, 번잡한 일을 핑계 삼아 2월의 비행으로 미뤘는데 그 사이에 제주도는 수십 년 만의 대설 탓에 도로와 공항이 제 기능을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상황에 의하여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얘기지만 제주도의 대설에 의하여 대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외감은 훨씬 더 막중해졌다.
자연, 그리고 동요. 이 두 단어는 며칠 전 안국동의 어느 문화재단에서 김우창 선생님을 뵙고 귀한 말씀을 들으면서 며칠 동안 머릿속에 머물고 있는 말이다. 고1 때, 황동규 시인의 시선집 <풍장>을 읽었고 그 시선집의 뒤에 실린 김우창 선생님의 해설을 몇 번이고 탐독했었다. 그때는 누구나 그렇듯이, 마음 속에 시인 하나가 들어 있어서 시중의 서점에 앉아 거의 모든 시집을 읽고 또 읽었는데, 창비라든가 문지, 민음사 등의 시집들이 대체로 뒷부분에 평론가의 해설이나 지인의 발문을 수록했다. 그 글들은 어떤 경우에는 시집의 주어를 위한 형용사 역할에 머물기도 했지만 그래도 동사 내지는 명령어의 기능 즉 ‘이 해설이나 발문을 읽기 전에 먼저 앞에 수록된 시부터 읽어라!’ 하는 소임으로 실렸는데, 황동규 시인의 <풍장>, 그 단단한 시선집에 수록된 김우창 선생님의 해설은 금강석처럼 견고한 것이었다. 메슈 아놀드를 전제함으로써 현대적 삶과 시의 운명에 대해 논하고 이어 황동규의 빈 들에 펼쳐진 시들의 힘에 대해 논하였는데, 잊을 수 없는 글이었다.
제주도 한라산의 설경
대설이 펼쳐친 제주도의 아름다움
그 무렵에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으로 학도호국단 대신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학생의 날’도 새로 기리게 되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근처의 고려대에서 큰 행사를 치른 적이 있다. 이름하여 전국의 고교생들이 고려대에 운집하여 학생의 날을 기념하고 아울러 나름의 시대적 소청을 외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1000여명의 고려대생들이 고등학생 열댓 명을 맞이하여 대운동장에서 문화 행사를 치르고 무슨 까닭인지 정문 돌파를 감행하는 시위까지 이어졌는데, 나는 김영춘이라든가 허인회, 박승현 같은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 주요 간부들의 보호를 받으며 대운동장 위에 서서 1000여명의 대학생과 수백명의 전경들이 필사적으로 맞싸우는, 격렬하고 비극적인 스펙터클을 내려다 본 적이 있다. 곧이어 페퍼포그 차가 밀려들고 1000여명은 수백명에 밀려 대학 건물 곳곳으로, 또 저 뒤편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도 한참이나 달렸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학생회관에 모여 정리 집회를 하는 중에 사회를 보는 어느 대학생이 ‘고려대를 대표하여 김우창 교수님께서 격려 말씀을 하시겠다’고 하여 나는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학교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고, 고등학생들도 와 있다고 해서 몇 마디 하려고…’ 하며 몇 말씀을 하셨는데, 기억은 그렇게 한 줌뿐이다. 다만 내가 옆에 있는 대학생 형에게 “아, 저 교수님이 <지상의 척도>를 쓰신 김우창 교수님이신가요?”라고 물었고, 그 대학생은 “아, 그렇지. 직접 이런 곳에 오시는 선생님은 아니신데…” 하다가는 나를 힐끗 보며 “대체, 넌… 넌, 고 1 아니니?“ 하던 일이 생각난다.
난 그때 황동규 시선집 그 뒤에 실린 강력한 글에 이끌려 <궁핍한 시대의 시인>과 <지상의 척도>를 읽던 중이었다. <지상의 척도>의 맨 앞에 실린 글이 ‘산업시대의 욕망과 미학과 인간’이다. 고향의 상실, 산업화의 압력, 마을 공동체의 상실, 거대하고 획일적인 도시, 그 밑에 웅크리고 있는, 고향을 상실한 왜소한 인간, 그리고 문학.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산업화의 문명적 그늘을 묘파한 그 글은 오늘의 세태에 있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화두다.
그 글과 그밖의 글들을 통하여 그 무렵에 김우창 선생님은 임의로 축약하건대 ‘꽃은 왜 아름다운가, 그것은 원래 그 식물의 생장과 발현 그대로를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곧 자연이다. 그러나 동요 또는 변화는 불가피하다. 사회적 허용 이상의 이익을 뽑아내려는 욕망이든 그에 맞서 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열망이든, 그 욕망과 열망은 스스로 그러한 상태, 곧 자연을 격렬하게 동요시킨다, 그 동요 또는 변화에 의하여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며 또한 잃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썼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나서야 나는 직접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고1 때의 내 나름대로 ‘김우창 학교’에 입학식을 했음에도 직접 뵙고 귀한 말씀을 듣게 된 것은 30여년이 지난 다음이니, 이 또한 내게는 미묘한 의미가 있다.
하여간 2시간 가까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러한 자연 상태와 격렬하게 동요한 사회에 대한 주의를 다시 환기하셨다. 인간의 품위, 자연계의 이치와 신비, 삶과 문화의 미묘한 관계, 폭넓은 교육과 깊이 있는 사유의 실종 및 그것에 대한 전 사회적 방향 전환 등이 자연, 욕망, 동요 등의 단어와 겹쳐졌다.
2004년 호주 멜버른 아트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강권순 명창. / 연합뉴스
격렬하게 동요하는 제주도의 현황
한라산의 정상까지는 일정 관계로 포기하고 영실기암을 우러르며 걷는 동안 현대의 모순이자 우리 삶의 길항이 되고 있는 이 ‘자연과 동요’를 거듭 생각했다. 의연한 한라산, 그 아래 곳곳의 오름들, 저 멀리 펼쳐진 바다. 그리고 인간의 손에 의하여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이유에 의하여, 아울러 관광자원화라는 신드롬에 의하여, 소박한 해안이 군사 요충지가 되고 중산간 일대가 관광 자본의 노획물로 전락하는 이즈막의 제주도 현황 때문에 ‘아! 과연~’ 하면서 낭만적 숭고의 감정에만 사로잡힐 수는 없는, 그야말로 격렬하게 동요하는 제주도 남단이 아스라이 보였다.
제주도 민요 중에 ‘산천초목’이 있다. 1989년 12월, 남제주의 옛 노래들이 중요무형문화재 95호로 지정되었는데, 표선면 성읍마을의 예능보유자 조을선 선생의 소리로 ‘오돌또기’, ‘맷돌노래’ 등과 더불어 남제주의 노래 문화를 대표하는 민요다. 이 분은 2000년 5월에 타계하셨는데, 그 전 해에 국악음반박물관 측에서 성읍마을의 낡은 집에서 ‘산천초목’을 부르시는 모습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다. 인터넷으로 금세 찾아서 보고 들을 수 있다.
산천초목 속잎이 난디 구경가기가 얼화 반갑도다
꽃은 꺾어 머리에 꽂고 잎은 따다가 얼화 입에 물어
날 오라 하네 날 오라 하네 산골처녀가 얼화 날 오라 한다
한편 이 노래를 중학교 때는 서양 성악을 전공하였고 이후에 국악을 전공하여 김월하, 김경배 같은 대가들을 사사한, 민요와는 다른 창법과 세계에 있는 정가의 명창 강권순 선생이 부른 ‘산천초목’도 있다. 조을선 선생의 ‘산천초목’이 주름치마처럼 펼쳐진 한라산 남단의 여인들이 살아내야만 했던 억센 생애를 대번에 떠올려 준다면, 이를 바탕으로 한 강권순 선생의 ‘산천초목’은 노랫말 사이사이로 한라산의 바람이 스며든다. 혹은 안개와도 같고 혹은 흩뿌리는 는개와도 같고 혹은 장엄하게 내리는 대설과도 같은, 그런 격조로 ‘산천초목’이 펼쳐진다. 삼달리와 성읍마을 쪽에서는 조을선 선생의 소리가 얼핏 들렸는데, 중산간을 넘어 영실로 하여 한라산의 한 자락이라도 밟고 있는 이 순간에는 단순한 ‘퓨전’이 아니라 현대 음악의 극한적 실험을 ‘국악 정가’로 실험하기도 하는 강권순 선생의 정령의 숨결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동백꽃은 피었는데 흰 눈은 왜 오나
한라산 선녀들이 춤을 추며 내려온다
그런 세계, 거침없는 욕망과 격렬한 동요에 의하여 우리가 상실한 것은 이 같은 신비로움이다. 단순히 탈속의 신비가 아니라 자연의 막막한 아름다움 밑에서 겨우 겨우 건사되는 사람살이의 힘겨움, 그런 모순과 뒤엉킴 사이로 스며드는 운명의 힘의 주술적 경지를 상실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니 듣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로서는 상실되었어도 예술이 있어 환영처럼 옛 사실이 재현되니 서둘러 ‘산천초목’을 찾아 들어보자. 바로 그 순간, 당신이 있는 곳으로 제주도 중산간의 바람이 주술처럼 스며들 것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