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들의 파워 게임이다. ‘서울대, 하버드, 삼성’의 스펙을 가진 대표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의 혈전이다. 이 조건에서 일개 직원이나 단원들은 사분오열이 되어 반목하고 음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2014년이 끝나가던 무렵에 나는 내 페이스북 계정에 ‘빌어먹을 2014년이여, 다시는 오지 말아라’, 그렇게 썼다. 그해는 너무도 끔찍한 일이 있었고 국가는 없었다. 그랬는데, 2015년을 보내면서도 또 그런 생각을 했다. 메르스 사태로 시작하여 위안부 협정으로 마무리된 올해도 국가의 민낯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 2015년도 두 번 다시 오지 말아라, 그런 마음인데 또 그렇게 쓰고 싶지는 않아서 착잡한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야밤의 산책을 나섰다. 혹시 눈이라도 내릴까 싶어 밤길을 걸었으나 비가 내렸다. 하는 수 없이 편의점 앞 간판 밑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바깥에 매달아 놓은 작은 스피커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양화대~교, 양화대교~’ 자이언티의 노래였다.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 / 어디냐고 여쭤보면 / 항상 양화대교 /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서울시향 지휘자로서 2010년 <경향신문>과 인터뷰 중 고민하는 정명훈./김영민 기자
슈베르트보다 더 애틋한 자이언티의 노래
낮에 강의를 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중·고등학교 음악선생님들이 연수를 하러 모였고, 나는 그 자리에서 서양음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감상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말했다.
휴식시간에 어느 선생님과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에게 서양음악을 가르칠 때마다 미궁에 갇히는 느낌이라고 했다. 교과서도 많이 바뀌고 인식도 많이 개선되었지만 서양 클래식을 최고 수준의 보편적 예술 경지에 올려놓고 나머지 음악들을 그 아래로 위계서열화하는 양상이 여전해서 발라드나 힙합에 자신들의 쓸쓸함과 상실감을 투영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기가 ‘꼰대 노릇’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자괴감을 토로했다. 솔직히 말하여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제 아무리 명곡이라 해도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만큼이나 요즘 아이들의 상실감을 어루만져줄 수 있겠느냐, 라고 그 선생님은 덧붙였다. 나는 공감한다고 말했고, 심야의 산책 중에 우연히 ‘양화대교’를 들으면서 다시 공감했다.
어쩌면 ‘서울시향 사태’의 ‘형이상학적 본질’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이 사태는 정명훈 예술감독이 서울시향을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경찰 수사 추세로 보건대 당분간 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양측의 공방은 가장 저열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정명훈 지휘자는 서울시향을 떠나면서 단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서울시향의) 업적이 한 사람의 거짓말에 의해 무색하게 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거짓과 부패는 추문을 초래하지만 인간의 고귀함과 진실은 종국에는 승리할 것입니다.” 이에 박현정 전 대표는 경찰 조사에서 밝혀진 것이라며 정명훈 측 사람의 문자 메시지를 공개했다. “마에스트로(정 감독)가 말하길 (박현정은) 멍청하게 기자회견을 해서 스스로 자멸의 길로 빠져들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사회가 낳은 가장 극단적이며 비정상적인 카리스마 리더십의 전형이다. 이 ‘카리스마’라는 단어에 나는 단 한 줌의 긍정적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직원이나 단원들보다 극히 우월하고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강자들의 파워 게임이다. ‘서울대, 하버드, 삼성’의 스펙을 가진 대표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의 혈전이다. 이 조건에서 일개 직원이나 단원들은 사분오열이 되어 반목하고 음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누가 형사 책임을 질 것인가는 경찰 수사에 의해 사실이 확인되어야 할 문제이므로 논외로 하건대, 이 지면의 성격을 고려하여 나는 정명훈 지휘자를 좀 더 생각하고자 한다.
그가 비록 ‘세계 정상의 지휘자’이긴 해도, 서울시향 내부의 구체적인 사태와 관련하여 그는 지나치게 ‘음악가적 태도’만을 고집했다. 그 점이 아쉽고 공허하였으며, 어떤 점에서 결국 그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2015년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는 음악밖에 몰라요”라고 말했고, 그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말로 해선 도저히 안돼…. 그냥 한 곡 쳐도 될까요?” 하며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슈베르트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했다. 어느 남성 월간지는 이를 두고 “온갖 지저분한 말들과는 전혀 관계도 없이 그저 깨끗하고 깊어서 또한 온화했던 8분55초”라고 썼다.
글쎄, 사태의 전말을 다루는 뉴스 매체가 아니므로 그렇게 감상적인 표현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 자리는 기자회견장이었고 따라서 기자들은 “아니, 왜 대답하다 말고 피아노를 치시나요?”라고 재차 물었어야 했다. 그러나 여러 보도에 따르면 그날 “기자들은 박수를 쳤다.” 동영상을 보니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하여 ‘지저분한 말들’과 관련된 명쾌한 해명은 사라지고(말로 해선 도저히 안 돼, 라고 그는 말했다) 정명훈 지휘자 역시 사태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졌다.
서울시향 단원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음악은 세상의 많은 것을 뛰어넘어 사람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매개체”이며 “국가와 종교, 이념과 사상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그 자신의 표현대로 음악 인생 “50년이 넘는” 지휘자의 신념치고는 지나치게 순진할 뿐만 아니라 매우 복잡한 사건 와중에 던지는 고별사 치고는 대단히 장식적이다.
그는 서울시향 사태가 “여태껏 살아왔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했는데, 나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비로소 그가 이 사회의 민낯을 제대로 봤다고 생각한다.
지상으로 내려와야 할 ‘천상의 지휘자’
서울시향 사태보다 훨씬 더 극악하고 비인간적인 사태가 연속되는 나라, 인간을 사지로 내모는 극한의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는 나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일어날 수도 없는’ 국가 책임의 사태들이 곳곳에서 터지는 이 사회 말이다.
그는 ‘음악밖에 모르는’ 지휘자이므로 그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일일이 발언하거나 저항할 의무는 없다. 음악을 통하여 우애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여 왔으므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그조차 폄하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런 당부는 하고 싶다. 형사적 책임과는 전혀 별개로, 이번 기회에 정명훈 역시 좀 더 깊이 있는 음악적 사유를 다질 필요가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화려한 수사 뒤로 물러서지 말고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일어날 수도 없는’ 일들이 연거푸 터지는 이 사회에서 음악이 무엇인지, 클래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공들여 연주하고 정성껏 찾아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숙고하기를 바란다. 그는 “국가와 종교, 이념과 사상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모아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있다고 썼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이런 기묘한 수사보다 더 복잡하고 추악하다. 소중하고도 숭고한 삶들을 한순간에 파탄시켜버리는 강력한 힘들이 전횡하고 있다.
만약 정명훈이 ‘서울시향 사태’ 과정에서 진심으로 현실 권력의 비인권적 사태를 목도하였고 실제로 그 전횡을 막고자 했다면, 이제는 좀 더 세상 전체로 시야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예술가의 진실한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그렇지 않다면 추악한 사실과 무관하더라도 형사적 책임을 피하려는 제스처가 아니냐는 비난을 받게 된다. 이게 내가 앞에서 표현한 ‘스스로 발목을 잡게 된다’는 뜻이다.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회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클래식이 아니라 인간사의 심각한 고통과 사유가 뒤엉킨 불덩어리 같은 음악을 끌어안고, 그 자신의 내적 갈등마저 격렬히 드러내는 음악가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결코 ‘발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처럼 ‘어느 나라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참한 사태가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이제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지휘자’가 아니라 이 미친 시대에 함께 곤두박칠치는 광기에 사로잡힌 음악가가 필요하다. 베토벤이나 말러의 음악에 격렬한 고통과 심각한 착란과 복잡한 사유가 뒤엉켜 있지 않은가.
이제는 ‘음악밖에 모르는’ 천상의 지휘자가 아니라 고통스런 지상으로 내려와 온갖 불덩어리를 함께 끌어안는 음악가가 필요하다. 그 점 생각해보기를, 아니 단단하게 사유하기를 바란다. 이는 형사적 책임과는 무관한 주문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지휘자가 아니라 형이상적 차원의 음악가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예술적 책무다. 그동안 우리 클래식계에서는 그러한 책무가 전무했다. 세상의 비참함과 무관하게 지극히 고상하고 우아한 허위의 세계에서 살아왔다. 사람들은 ‘양화대교’를 더 애틋하게 듣는 데 말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