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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다 함께 부를 노래가 없다

입력 2015.12.29 15:21

오래된, 강렬한, 운동의 노래들은 점점 사라진다. 그 노래들이 사라진 자리를 다른 노래들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노래 없이 집회하고 노래 없이 행진한다. 노래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은 안타깝다.

대령통이 시를조 는읊다. 지난 12월 16일 요수일 경제관장의회에서 박근혜 대령통은 경제성활화 안법의 리처를 촉하구면서 ‘태산이 높하다되 하늘 아래 뫼로이다. 오고르 또 오면르 못 오를 리 없만건은 사람은 아니 제 오고르 뫼만 높다 더하라’는 시조를 었읊다.

‘단어 우월 효과’(word superiority effect)라는 이론이 있다. 문자 정보를 인지하는 과정에서 각 단어에 대한 정확한 지각보다 단어 전체의 이미지를 통해 인지를 한다는 이론이다. 방금 위에 적은 문장이 그 예다. 맞춤법에도 맞지 않게 뒤죽박죽 순서를 섞어 썼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행하는 난데없는 명언 인용이나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을, 독자들은 큰 무리 없이 읽었을 것이다. 1999년 그레이엄 롤린슨이 주창했다고 한다. 요컨대 사람은 ‘글자 나하나하를 떼내어서 읽것는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지미로 인하식기 때문’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능기부’를 꽤 많은 사람들이 ‘기능재부’라고도 하는데, 다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어떤 용례를 보니, 이 나라의 어문정책을 총괄하는 기관, 즉 국립국어원을 국어국립원이라고 써도, 대체로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한다.

흥미로운 이론이지만, 그러나 인지심리학의 차원에서 흥미로운 것이지 현실세계에서는 별도의 판단을 요한다. 특히 통치와 행정과 사법의 영역에서는 말이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가 엄청난 영향력을 갖기 때문에 엄정하고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적어온 것을 읽는데도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원래 그렇게 메모를 한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그것을 참고하며 말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 몰라도 ‘단어 우월 효과’가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것을 모여들 앉아서 받아 적고 있는 이 나라 최고 엘리트들의 모습은 참으로 처량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면 금지’ 발언에 저항해 시민들이 만든 대형 가면의 모습.

박근혜 대통령의 ‘복면 금지’ 발언에 저항해 시민들이 만든 대형 가면의 모습.

‘평화’는 그저 조용한 상태를 뜻하는가
그들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자리보전하는 이른바 ‘적자생존’ 입장이니 그렇다 해도, 정말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의 말뜻을 새겨서 들어야 하는 일반인이다.

“군 생활이야말로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거나 군 생활을 할 때 가장 큰 자산”(2013. 12. 24. 제12사단 GOP 방문)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한 번 더 군 생활 할 수도 있다는 ‘말 실수’로 넘길 수 있지만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한다”(2015. 5. 12. 청와대 국무회의)는 말이라면? 알아서 새겨들어야 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된 ‘혼이 비정상’이라는 용어나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2015. 10. 22. 청와대 여야 회동)는 표현은? 군국주의와 주술이 결합된 이런 용어들은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무서운, ‘그런 기운이 온다’. 실제로 그런 위협이 벌어지니까 말이다.

어디 저 북악산 아래의 일일 뿐인가. 올해 내내 ‘전체적으로 그런 기운’이 압도했다. 거리에서, 길 위에서, 나는 자주 그것을 느꼈다. 특히 지난 12월 5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2차 민중총궐기의 현장에서 그런 느낌에 사로잡혀 ‘혼이 비정상’이 될 정도로 어지러웠다.

“아주 고약하게 되었어. 앞으로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그러다 보면 마찰도 있고 몸싸움도 있는 거인디, 아주 복잡하게 되었어. 누가 처음부터 맘 먹고 싸우자고 나오는 게 아니잖아. 근데, 이게 이렇게 되었으니 복잡하게 되었어.”

그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송경동 시인의 말이다. 그 현장에서 누군가가 “우리는 평화로운 집회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집회를 원한다”고 외쳤는데, 적어도 그날 그 현장은 모두가 ‘평화 집회’ 그 자체를 위한 퍼포먼스 같았다.

“이젠 뭘 해도 문제가 되겠어. 금만 밟아도 그냥 아웃이야. 상황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오늘 이 상황이 기준이라면 뭐 조금이라도 하면 무조건 걸고 넘어지겠는데.”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이원재 소장의 답변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되었다. 3차 총궐기 이후 강신명 경찰청장은 “일정 사람이 모인다는 자체로도 공안을 해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인원이 모이면 해산명령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집회나 시위는 공공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이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소음이나 통행의 불편 등이 발생”하게 되고 따라서 “일반 국민도 이를 수인할 의무가 있다”고 한 대법원의 2009년 7월 23일자 판결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다.

문제의 그 ‘평화’도 생각해 볼 문제다. ‘평화’는 그저 조용한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세계 헌법재판기관 협의체인 ‘베니스위원회’와 유럽안보협력기구의 ‘민주제도와 인권사무소’가 제시한 ‘평화적 집회의 자유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보면 “오직 평화적 집회만이 보호”를 받는데, 그 ‘평화적’이란 개념은 “성가시거나(annoying) 기분 나쁘게 하거나(give offense) 제3자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방해(hinders)·훼방(impedes)·차단(obstructs)하는 행위”까지도 포함해야 한다고 적시되어 있다.

국정 교과서에 반대한 가면 집회.

국정 교과서에 반대한 가면 집회.

요즘 시위, 퍼포먼스만이 유일한 방식
하여간, 우리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날 ‘평화’와 ‘소요’ 사이를 걸었다. 대학로까지 가다가, 중간에 여러 행렬들이 섞였다가 흩어졌다가 다른 수로에서 겹쳐졌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다가, 평화롭게 헤어졌다.

그런데 내가 정작 깊이 생각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 노래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제야 이 지면의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인데, 말 그대로 길 위에서 들려오는 노래, 그것이 그날 없었다. 물론 구호는 있었다. 그러나 노래는 없었다. 함께 부를 노래가 없었고 어떤 노래를 함께 부르는 광경이 없었다.

퍼포먼스는 많았다. 대통령이 ‘복면 쓰지 말라’고 해서, 다들 복면도 하고 가면도 쓰고 나갔다. 그러다 보니 기발하며 참신하고, 풍자적이며 그로테스크하고, 어떤 관점에서는 아방가르드하고 또 다른 관점에서는 민중적이며, 유희적이되 저항적인, 그런 복면과 가면들이 곳곳에서 출몰하여 광장과 길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유희와 저항의 주체였으며 동시에 모두가 관객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를 보느라 함께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누군가의 퍼포먼스를 보는 날이 되었다.

실은 이게 수년째 못 풀고 있는 숙제다. 대규모의 집회를 하면 젊은 세대나 혹은 다른 양식의 집회를 바라는 사람들은 말한다.

“여태 저런 방식이군, 구호 외치고, 운동가 부르고, 뭐 다른 방식은 없나.” 반면 집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도 끝없이 변화를 시도한다, 큰 집회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그러면서도 가열차게 저항하는, 그런 양식을 시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가.”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도대체 차벽을 뚫고 청와대로 가서 뭐하자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정말로 청와대까지 진출한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폭력과 억압의 상징인 차벽을 피해서 저 바깥으로 행진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은 중차대한 문제다.

이런 문제들이 길 위에서 늘 제기된다. 그래서 그런가? 다함께 부를 노래가 사라지고 있다. 오래된, 강렬한, 운동의 노래들은 점점 사라진다. 그 노래들이 사라진 자리를 다른 노래들이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노래 없이 집회하고 노래 없이 행진한다.

노래가 집회와 시위의 핵심은 결코 아니지만, 길 위에서 다 함께 부를 노래가 점점 사라지는 상황은 안타깝다. 똑같은 노래를 똑같은 동작으로 똑같이 부르는 것이 최고의 상태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이 노래는 누군가에게 불편하고 저 노래는 또 누군가의 감각에 맞지 않는, 그런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퍼포먼스만이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하긴 오죽으했면 교수이들 올의해 사성자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겠았는가. 어석리고 무능한 군주로 인여하 세상이 어럽지고 혼탁므하로, 길 위에 모인 사들람이 함다께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은 것 또한 당한연지도 모겠르다. 어러지운 한 해가 저어물간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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