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신문은 기사 말미에 기자의 이름과 이메일을 적는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정보화가 급진전하면서 시작된 일이고, 외국과는 다른 현상이다. 일본은 기자의 이메일을 적지 않으며, 기사에 기자 이름이 없는 경우도 많다. 미국 신문사들도 기자의 이메일을 좀처럼 적지 않는다. 신문 기사는 기본적으로 신문사의 소유물이며, 문제가 생길 경우 신문사가 책임진다는 생각이 이런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메일과 우편, 전화, 문자메시지를 자주 받는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로스쿨에 불리하거나 비판적인 기사를 삼가라는 경고성 이메일을 적잖게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로스쿨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적도, 현재 논란 중인 사법시험 존치를 지지하는 기사도 쓴 적이 없다. 그런데도 로스쿨을 비난한 사람들을 모조리 고소할 계획이라는 등의 익명의 메일들을 받고 있다.
지난봄에는 대법원이 이혼재판의 기준을 유책주의에서 파탄주의로 바꿀지를 논의 중이라는 기획을 보도했다. ‘우리 유책주의의 모델인 일본도 이미 30년 전에 파탄주의로 바꾸었다’고 외국 사례를 소개했다. 이에 어느 독자가 ‘일본이 30년 전부터 파탄주의로 변경했으면 그곳에 가서 살지 왜 한국 살면서 이 따위 글을 씁니까’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로는 욕설도 했다. 당시 나는 미혼이었고, 안 그래도 일본에 살다가 온 터라 할 말이 없었다.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자신에 대한 수사와 재판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호소였다. 500쪽 넘는 기록을 회사로 보내기도 하고, 새벽 4시에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재소자들이 보낸 우편도 부지기수다. 대부분은 문제가 없거나 나로서는 문제점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법조를 오래 담당하면서 사건들이 기록으로만 보이고,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 역시 어린 시절 집안이 민·형사 재판을 겪어 그 괴로움과 쓰라림을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
모든 소송은 이기든 지든 그 자체가 고통이고 지옥을 통과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지옥을 버티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세상의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나만의 진실, 가족의 진실, 정치적 진실, 역사적 진실, 사랑의 진실까지 세상에는 수많은 진실이 있다. 법정의 진실은 그 가운데 하나이지 모든 것을 뒤덮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소송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얻은 결론이고, 지난 1년간 일일이 보내지 못한 답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