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학의 학위수여식장에서 졸업생이 학부모의 머리에 학사모를 씌워주고 있다. / 김영민 기자
평등을 촉진하는 정책이 때로는 일시적 불평등을 낳기도 한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 정권이 대학 문을 넓히면서 대학생 수는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비록 ‘교육기회의 평등’과 같은 지향점 대신 학생운동의 세력 약화를 노린 정책이었지만, 어쨌든 이전에 비해서는 고등교육의 기회가 보다 평등하게 제공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이 그렇지 않은 비율을 압도적으로 넘어서는 시대가 되어서도 교육수준에 따른 임금과 생활수준의 격차와 같은 불평등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대학 진학자 수가 제한되어 있던 세대와 무제한적으로 자유로워진 세대 사이의 격차도 일종의 불평등으로 나타난 사례다.
세대에 따라 다른 투표성향을 보이는 배경에는 청년세대와 장년세대가 경험한 교육의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는 내용의 1155호 기사를 쓰면서 가장 유의했던 점이 있다. 혹시라도 학력이 낮다는 사실이 열등하다고 읽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보수성향, 또는 진보성향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거나 더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경계하려 애썼다. 학력의 비교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며 교육기회의 세대 간 불평등의 일부일 수는 있다. 하지만 학력이 낮다는 것이 지적 능력의 부족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혹여 만에 하나 지적 능력이 낮다고 해도 그런 의견까지 모두 담아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학력은 물론 소득과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의견을 1인 1표의 원칙으로 담아내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복고·수구적 정치세력이 힘을 얻거나 급진적 성향의 대중운동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가 굴러가는 과정의 한 장면일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1표를 행사하는 주체의 개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원칙을 고집하는 민주주의가 때로는 현실적 불평등을 낳기도 한다는 역설도 이해할 수 있다. 어찌됐건 당선된 후보를 찍은 표만이 가치를 얻고 다른 표들은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만을 우선하면 그렇게 된다. 내가 정권을 잡았으니까, 우리가 기득권을 놓치지 않았으니까 미래에까지 미칠 영향도 생각하지 않고 반대세력을 억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세력이 겪고 주장하는 입장과 견해까지 존중하는 것이 보다 민주주의의 원칙에는 잘 어울린다. 미래세대에 비해 늙고 학력도 낮다는 이유로 저임금을 감수해야 하는 장·노년세대나, 학력 인플레 탓에 쌓은 ‘스펙’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는 청년세대 모두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민주정치 발전의 첫걸음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