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에게 선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왕망은 다섯 살의 유영을 감금시킨 채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25년, 갱시제 유현의 승상 이송(李松)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기원전 54년, 태자가 가장 사랑하던 여인이 병사한다. 여인이 죽으면서 남긴 말, “신첩의 죽음은 천명이 아니옵니다. 다른 첩들이 저주하여 저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태자 유석(劉奭)은 꽃다운 나이에 죽은 사마양제가 가련하다. 그녀를 저주한 여인들에게 화가 난다. 여자라면 꼴도 보기 싫다. 아버지 선제는 태자가 여자를 멀리하는 게 영 불안하다. 황실의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선제는 황후에게 서둘러 태자의 짝을 맺어주라고 했다. 황후는 다섯 여인을 부른 뒤 태자에게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한다. 태자가 무심하게 지목한 한 여인, 그저 태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기에 선택된 이 여인은 왕정군(王政君)이다. 그녀는 태자와의 하룻밤 동침으로 임신한다. 감로(甘露) 3년(기원전 51년), 그녀는 아들을 낳는다. 너무도 기쁜 선제는 손자 유오에게 태손(太孫)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태어나자마자 황위를 보장해준 것이다.
기원전 49년, 선제가 세상을 뜨고 원제(유석)가 뒤를 잇는다. 기원전 33년, 원제가 재위 16년 만에 마흔둘로 병사한다. 그 뒤를 이은 성제(유오)는 재위 26년 만인 마흔다섯에 세상을 뜬다. 아들 성제가 먼저 세상을 떠난 그해(기원전 7년)에 왕정군의 나이 예순다섯, 혼인하던 날 이후로 남편 원제는 왕정군을 다시 찾지 않았다. 아들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아들은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뜬 것이다. 사실 성제에게 자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들 너무 일찍 죽어버렸다. 황실의 후사가 끊어진 건 조비연(趙飛燕) 때문이다. ‘환비연수(環肥燕瘦)’라는 말이 있는데, 양옥환(양귀비)은 통통하고 조비연은 말랐다는 뜻이다. 두 미인의 상반된 신체미를 표현한 말이다. 제비가 날 듯 사뿐히 춤출 수 있었다던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가녀린 몸매였다고 한다. 성제는 허황후를 쫓아내고 조비연을 황후로 삼을 정도로 조비연을 총애했다. 그런데 조비연은 임신을 하지 못했고 후궁이 낳은 아이를 죄다 죽였다. 이렇게 해서 황실의 후사가 끊기게 된다. 성제 때의 동요 중에 “제비가 날아와 황손을 쪼니, 황손은 죽고 제비는 화살(矢)을 쪼리라”(<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있는데, 바로 이 일을 빗댄 것이다.
한나라 장안성 미앙궁 전전, 왕망의 일대기가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총애받은 조비연, 후사 끊기게 만들어
앞의 동요에서 시(矢)는 시(屎, 똥)를 의미한다. 황손을 쪼아 죽인 제비가 똥을 쪼는 신세가 되리라는 것은 조비연의 비참한 말로를 암시한다. 성제가 세상을 뜬 뒤 성제의 조카 유흔(劉欣)이 애제(哀帝)로 즉위하게 되는데, 조비연은 그의 즉위를 지지한 덕분에 한동안은 황태후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애제가 세상을 뜬 뒤 조비연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인으로 강등된 조비연은 결국 자살로 생을 끝내고 만다.
선제·원제·성제 이후 방계로 황위에 오른 애제는 재위 6년 만인 스물다섯에 갑자기 세상을 떴다. 애제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방계로 황위에 오른 아홉 살의 평제, 불과 열넷에 죽고 만다. 평제의 후계자로 정해진 유영은 겨우 두 살이었다. 너무 어려서 황제로 즉위하지 못한 채 황태자로 지내던 유영은 결국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그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은 바로 왕망(王莽).
유영은 왕망이 황제가 되기 전 완충지대로서 철저히 이용당한 셈이다. 왕망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어린 유영을 황태자로 삼았던 것이다. 혈통이 정권의 정통성을 담보하던 시절, 설령 방계일지라도 유씨 혈통이 이어져야 하거늘 왕씨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야말로 ‘찬탈’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에 왕망의 황제 등극은 천명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관리와 백성이 왕망에 환호했다. 왕망이 ‘자연스럽게’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던 데는 음양오행설과 천인감응설에 휩싸였던 전한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한몫했다. 몇 가지 사례로 그 분위기를 엿보기로 한다.
원제 때는 “우물물이 넘쳐 밥 짓는 연기가 꺼지며, 옥당(玉堂)에 흘러들어가고 금문(金門)에 흐르네”(<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전해지기도 했다. 우물물은 음(陰), 밥 짓는 연기는 양(陽)에 해당한다. 궁전인 옥당과 궁문인 금문은 황제의 거처를 상징한다. 물이 불을 끄고 옥당과 금문에 흐른다는 것은 음이 성하여 양을 소멸시킨다는 의미다. 이는 황위가 찬탈될 징조로, 화덕(火德)의 한나라가 망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원제 초원(初元) 4년(기원전 45)에는 왕정군의 증조부 왕백(王伯)의 묘문(墓門) 가래나무(梓) 기둥에 갑자기 나뭇가지와 잎이 생겨나더니 사방으로 무성히 자라났다고 한다. 이 일은 왕씨가 창성해져서 한나라를 대신할 징조로 여겨졌다. 훗날 왕망은 이 일을 두고 ‘문’은 연다는 뜻이고 ‘가래나무’는 자손을 의미(재(梓)와 자(子)는 중국어 발음이 ‘쯔’로 동일하다)하니, 기둥 같은 대신(大臣)의 지위에서 흥기해 천명을 받고 왕이 될 길조였다고 풀이했다.
셴양에 있는 한 고조 유방의 장릉.
왕정군의 조카로 서른여덟에 대사마에
초원 4년은 바로 왕망이 태어난 해다. 왕망은 왕정군의 조카지만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성제가 즉위하자마자 왕정군의 오빠 왕봉(王鳳)이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게 되는데, 왕망이 바로 왕봉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왕망은 중병에 걸린 백부 왕봉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고, 이를 계기로 왕봉의 추천을 받아 성제로부터 황문랑(黃門郞)이라는 관직을 하사받는다. 이때가 기원전 22년, 왕망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한편 성제 때는 “계수나무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황작(黃雀)이 그 꼭대기에 둥지를 트네”(<한서>, 오행지)라는 노랫말이 전해졌다. 계수나무는 붉은색으로 한나라를 상징하는데, 그 꽃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후사가 끊어질 것을 의미한다. 황작은 왕망을 상징하는데, 훗날 왕망이 세우게 되는 신(新)이라는 나라가 바로 황색을 숭상했다.
왕망은 관직에 나간 이후로도 겸손함과 검소함을 잃지 않았다. 외척 왕씨 집안에서 그에 대한 신임은 날로 두터워졌다. 기원전 8년에는 당시 대사마이던 왕근(王根)이 중병에 걸리자 자신의 후임으로 조카인 왕망을 추천한다. 이렇게 해서 왕망은 서른여덟에 대사마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황작이 계수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틀 날이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평제가 황위에 오른 원시(元始) 원년 정월(서기 1년 음력 1월), 남쪽 변방 바깥의 나라에서 한나라에 흰 꿩을 바쳤다. 일찍이 주나라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무왕의 동생 주공이 어린 성왕을 도와 섭정하자 천하가 태평하여 이웃나라에서 앞을 다투어 조공을 바쳤는데, 월상씨(越裳氏, 베트남 일대에 있던 나라)에서 흰 꿩을 바쳤다고 한다. 이번에 한나라에 흰 꿩을 바친 나라도 바로 월상씨다. 이는 아주 특별한 역사적 상징이었다. 대신들은 왕정군에게 상주하여, 새 황제를 옹립하여 조정을 안정시킨 공로에 걸맞은 상을 왕망에게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공 때 먼 나라에서 흰 꿩을 바쳐온 상서로움이 왕망의 공덕으로 인해 다시 생겼다면서, 주나라의 국호를 주공(周公)의 칭호로 하사했듯 왕망에게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원시 4년에는 안한공 왕망에게 재형(宰衡)이라는 직함이 더해진다. 재형은 주나라 성왕을 보좌한 태재(太宰) 주공과 상나라 탕왕을 보좌한 아형(阿衡) 이윤의 칭호를 합한 것이다.
이윤과 주공처럼 평제를 잘 보좌했어야 하는 안한공 재형 왕망, 그런데 평제는 열넷에 죽고 만다. 일설에 의하면 왕망이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왕망이 자신의 사위인 평제를 정말 작정하고 죽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왕망은 평제가 죽은 뒤 황위 계승 후보자들 가운데 두 살배기 유영을 황태자로 옹립했다. 그 저의는 분명했다. 평제가 죽고 유영이 황태자로 옹립된 달, 매우 공교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맹통(孟通)이라는 자가 우물을 파다가 흰 돌을 얻었는데 그 돌에 붉은 글씨로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안한공 왕망에게 고하니 황제가 되라.” 하필(혹은 마침) 바로 그때 이런 징조가 나타난 것이다. 왕망은 ‘가(假)황제’ 즉 대리 황제가 되었다. 다들 왕망을 섭(攝)황제라 불렀고, 연호는 거섭(居攝)으로 정해졌다.
거섭 3년(8년), 왕망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징조를 알리는 소식이 곳곳에서 전해졌다. 천제(天帝)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섭황제가 진짜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말에 대한 증거로 다음날 우물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다음날 아침 백 척 깊이의 우물이 생겨났다는 소식이 제군(齊郡)에서 전해졌다. 이어서 석우(石牛)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파군(巴郡)에서 전해지고, 선석(仙石)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부풍(扶風)에서 전해졌다. 이는 모두 천명을 받들어 왕망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징조였다. 당시 장안으로 공부하러 온 애장(哀章)이라는 자는 왕망이 진짜 천자이니 황태후(왕정군)는 하늘의 뜻에 따르라는 내용이 담긴 문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애장은 위조한 문서를 구리 궤짝에 넣은 뒤 고제(高帝, 유방)의 사당으로 가져가 복야(僕射)에게 전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왕망은 고제의 사당으로 가서 그것을 갖고 돌아온 뒤 미앙궁 전전(前殿)에서 조서를 발표한다. 천명이 신령한 계시를 내려 천하 백성을 자신에게 맡겼으니 어찌 감히 그 명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천자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으로 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연호는 시건국(始建國)으로 정해졌다. 왕망은 어린 황태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일찍이 주공은 왕위를 대신하다가 마침내 권력을 성왕에게 돌려줄 수 있었거늘, 지금 저는 하늘의 엄한 명령을 받아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왕망은 슬픔에 잠긴 채 오래도록 탄식했다고 한다. 일찍이 주공이 되길 자처했던 왕망은 황제로 즉위할 즈음에는 요(堯)가 순(舜)에게 선양한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 순을 조상으로 둔 자신이 요를 조상으로 둔 한나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선양의 근거는 천명이고, 천명의 근거는 제왕의 덕이다. 사실 제왕이 되기까지 왕망의 삶은 유가적 덕의 실천 그 자체였다.
개혁정책 실패한 왕망의 비참한 최후
왕망에게 선양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전한의 마지막 황태자 유영은 이후 어떻게 됐을까? 왕망은 다섯 살의 유영을 감금시킨 채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유영은 결국 육축(말·소·양·돼지·개·닭)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그리고 25년, 갱시제 유현의 승상 이송(李松)에게 죽임을 당한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왕망은 유영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23년, 녹림군이 장안으로 쳐들어와 미앙궁을 불태우고 왕망을 죽인 것이다. 평제가 죽은 뒤 홀로 지내던 왕망의 딸은 당시에 의연히 궁전의 불길 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왕망의 최후는 어땠을까? 반란군이 장안을 쳐들어왔을 때도 왕망은 “하늘이 나에게 덕과 사명을 주셨으니 저들이 나를 어찌하겠느냐!”(일찍이 공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이런 식으로 말한 바 있다)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반란군을 진압할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병사들과 함께 미앙궁 점대(漸臺)로 가서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두오(杜吳)라는 장사꾼의 손에 죽게 된다. 반란군은 왕망의 시신을 갈기갈기 찢었다. 왕망의 머리는 갱시제에게 보내져 길거리에 내걸렸다. 왕망의 혀를 잘라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
왕망의 일생을 보면, 그가 유가의 성인을 모델로 삼고 유가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것은 분명하다. 유가적 유토피아를 추구했던 그는 토지의 겸병을 막고자 정전(井田)제도를 시행했고,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는 등 많은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은 그의 정책에 반대했고, 당시의 생산력으로는 그의 정책을 현실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뚜기 떼와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잇달았고 기근은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왕망은 철저히 실패했다. 역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위군자(僞君子), 난신적자(亂臣賊子)였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왕망이 건국한 ‘신’은 유씨 왕조인 전한과 후한 사이에 끼어 있다. 혈통이 정통성을 담보하던 시대의 프레임이 그를 찬탈자·위군자·난신적자로 규정한 게 아닐는지. 후스(胡適)는 이제껏 그 누구도 왕망에게 공평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며 그를 중국의 첫 번째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왕망은 분명 오늘날 우리에게도 문제적인 인물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고자 하는 이라면 한 번쯤 꼼꼼히 들여다봐야 할 인물임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왕망의 시대를 지배했던 천인감응이나 음양오행이 우리에게는 미신으로 여겨지겠지만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당시로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시대의 믿음이 또 다른 시대 사람들에게는 미신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의심의 자유와 의심의 능력을 지닌 사회만이 건강할 수 있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