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도입한 취지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류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 제도의 착안도 개발후진국의 문화재의 파괴, 유실, 훼손에서 비롯됐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의 기준이라면 세계문화유산을 많이 보유한 나라일수록 문화유산 보호를 게을리하는 ‘문화후진국’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유네스코는 한 해 45점만 등재심사를 한다. 등재신청도 한 나라에 한 건으로 제한하고 있다. 희소가치에는 권위가 부여되게 마련이다. 문화유산 등재 자체가 ‘국가적 자랑’이 됐다.
우리나라는 문화유산 강국이다. 세계문화유산 12개, 세계기록문화유산 13개, 인류무형문화유산 15개 등이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다. 하나같이 뛰어난 독창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도 문화적 자긍심을 배양하기 위해 나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우표를 매년 발행하기로 했다.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시리즈 1호 우표로 채택됐다.
남한산성 행궁과 남문을 소재한 문화유산 시리즈 1호, 남한산성 우표. 요판인쇄기술이 적용돼 손끝으로 만지면 독특한 감촉을 느낄 수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남한산성 하면 무엇보다 병자호란이 떠오른다. 조선 인조의 ‘삼전도의 치욕’ 때문이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3배9고두’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치렀다. 이는 굴욕의 상징이다. 남한산성 역시 전쟁 패배의 역사적 현장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결코 치욕의 이름이 아니다. 적군에게 함락된 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인 이중환이 쓴 <택리지>는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정묘호란) 병기라고는 날(刀)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고 적고 있다. 인조가 성문을 열고 나온 것은 추위와 식량 부족을 견디지 못한 때문이다.
패배를 모르는 남한산성의 역사는 무려 1200여년을 이어온다. 7세기에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으로 정하고 산성을 쌓은 뒤 한 번도 함락된 일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2㎞의 성벽으로 싸인 성 안은 험하지 않지만 성 바깥 산 밑은 살기를 띠고 있다. 삼국시대 때에도 남한산성의 수성군이 늘 승리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했다.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하지만 그처럼 견고한 성채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허물어지고 무너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새로운 축성술로 남한산성은 다시 태어났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인 672년에 다시 쌓았다. 조선 인조는 남한산성을 증축했다. 숙종, 영조, 정조도 손을 봤다. 우리나라 산성축조법의 발달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가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세계적 관심을 모으는 것은 세계 유일의 산성도시라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주로 산에 성을 쌓았다. 당연히 군사적 목적이 훨씬 강조됐다. 따라서 도시의 기능은 미약했다. 군사작전이 필요할 경우 성곽 밖에 살던 사람이 성곽 안으로 들어온다. 예외가 있다. 주민이 거주하며 생활했던 남한산성이 그것이다. 당연히 내부의 마을과 주민생활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 남한산성은 도시 형태를 갖춘 산성이었다. 성 안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산성 안의 인구가 4000여명이나 됐다.
이와 함께 행궁도 빠뜨릴 수 없는 남한산성의 특색이다. 행궁이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무르는 별궁을 이르는 말이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20여개의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춘 곳이다. 우정사업본부가 왜 세계문화유산 시리즈 1호 우표로 남한산성을 선택했는지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