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탑이 기울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하수의 변화다. 당나라 때 관중 지역은 강수량이 많았는데 송나라 때부터 건조해지기 시작하면서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다고 한다. 1960년대에 들어와 대안탑 부근에서 지하수를 대량으로 뽑아 써서 탑의 기울기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현장 같은 대안탑이여! 그
대는 자랑스러워할지니,
현장이 영혼으로 그대를 설계했음이라.
대안탑 같은 현장이여!
그대는 행복하나니,
평생 부지런히 추구하여 마침내
이상을 실현했음이라.”
시인 거자잉(葛佳映)의 <대안탑>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리를 찾고자 인도로 떠났던 현장, 그 결과물인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대안탑. 대안탑은 현장의 삶이 농축된 상징물이다.
대안탑이 있는 자은사 터에는 일찍이 북위 때 정각사(淨覺寺)라는 절이 있었고, 수나라 때 무루사(無漏寺)라는 절이 있었다. 648년, 태자 이치(李治, 훗날의 고종)가 태종에게 주청하여 어머니 문덕황후를 위해 절을 짓게 되는데 바로 자은사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자은사(慈恩寺)라고 명명한 것이다. 현장이 불경을 번역하고 유식종이 탄생한 곳이 바로 이 자은사다.
652년, 자은사 주지였던 현장은 불경과 사리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탑을 세울 것을 고종에게 상주했다. 현장은 대안탑을 설계했을 뿐만 아니라 공사에도 몸소 참여했다. 2년 뒤 완성된 60m 높이의 5층탑은 인도의 스투파 형태로, 지금과는 외형이 완전히 달랐다. 내부 역시 현재의 누각식이 아니었고 탑 안을 올라갈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탑이 완성된 뒤 고종이 이를 개조하면서 형태가 바뀌었고, 역대로 여러 차례의 개·보수를 거친 끝(1604년)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64.5m의 4각 7층탑 구조로 고정되었다.
자은사
60m 높이로 장안성이 한눈에 들어와
60m 높이로 우뚝 솟은 대안탑, 그 위에 올라가면 장안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의 전성기를 구가한 당나라의 수많은 시인들이 대안탑에 올라가 천 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두보·백거이·유우석·원진·위응물 등 위대한 시인들의 시상을 불러일으킨 곳이 바로 이 대안탑이다. 대안탑 6층에는 천보 11년(752) 가을에 두보·잠삼·고적·설거 등이 함께 대안탑에 올라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지은 오언시가 걸려 있다.
대안탑은 ‘안탑제명(雁塔題名)’으로도 유명하다. 진사 급제자를 위한 축하연회인 행원연(杏園宴)이 끝나고 나면 다들 자은사로 가서 대안탑에다 급제자의 이름과 관적과 급제시기를 검은 색으로 써넣었다. 당나라 고관의 상당수는 진사 출신이었는데, 대안탑에 이름이 적힌 진사 급제자들 가운데 훗날 경상(卿相)의 지위에 오르는 이가 생기면 그 이름을 붉은 색으로 바꾸었다. 안탑제명은 중종 이후 순식간에 유행이 되어 당나라 말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대안탑에서 당나라 때 안탑제명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당 무종 때의 재상 이덕유(李德裕)가 진사 출신이 아니라서 대안탑에 적힌 이름을 죄다 지워버렸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은 북송 신종 연간에 대안탑에 불이 나서 탑에 적힌 이름들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당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사실상 안탑제명도 사라졌지만, 섬서·감숙의 향시(鄕試)에 합격한 거인(擧人)들은 여전히 자은사에 그 이름을 남겨 놓았다. 지금 자은사에 보존되어 있는 명·청 시대의 제명비(題名碑)가 바로 그 증거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대안탑은 중국인이 휴가철에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국내외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유적지의 문화유산은 으레 보호에 각별히 신경 쓰기 마련이지만, 대안탑의 경우 더욱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
바로 대안탑의 기울기 때문이다. 바닥과 수직이어야 할 대안탑의 꼭대기가 서북 방향으로 많이 기운 상태다. 청나라 때 이미 이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강희 58년(1719)에 측정한 바에 따르면, 대안탑은 서북 방향으로 19.8㎝가 기울어 있었다. 이후 계속해서 기울기가 심화되었는데, 1941년에는 41.3㎝, 1964년에는 87.3㎝, 1983년에는 99.9㎝, 급기야 1991년에는 101㎝로 1m가 넘기까지 했다.
대안탑이 이렇게 기울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하수의 변화다. 당나라 때 관중 지역은 강수량이 많았는데, 송나라 때부터 기후가 떨어지고 건조해지기 시작하면서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다고 한다. 인위적 요소는 대안탑의 기울기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에 들어와 대안탑 부근에서 지하수를 대량으로 뽑아 썼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시안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지하수 개발이 이루어지고 대안탑도 계속 기울어졌다. 다행히 최근 들어 지하수 개발을 금지하면서 대안탑도 조금씩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2009년부터는 해마다 대안탑 주변 지역에 40만톤의 지하수를 채워 넣고 있는데, 이렇게 해서 해마다 0.1㎝씩 원래 상태를 회복해가는 중이라고 한다. 계산대로라면 천년 후에는 애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단다.
(왼쪽부터)양훙쉰(楊鴻勛)이 추정한 대안탑의 최초 형태, 대안탑
기러기 탑이라는 이름의 유래
대안탑의 원래 명칭은 안탑(雁塔)이다. 기러기 탑이라는 탑명에는 소승불교도가 대승불교도로 전향한 사연이 담겨 있다. 마갈타 왕국의 어떤 승려가 육식을 허용하는 소승불교를 받들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승려가 굶주린 상태에서 하늘을 보았는데 기러기 떼가 날아가고 있었다. 배고픈 것을 알아달라는 말을 하자마자 기러기 한 마리가 그 승려 앞에 떨어져 죽었다. 놀란 승려가 다른 승려들에게 이 일을 알리자, 다들 부처가 그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라 여기고 대승불교를 받들게 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우고 죽은 기러기를 그 아래에 묻었는데, 이 탑이 바로 안탑이다. 이상은 <대당서역기>에 기록된 내용이다. 인도에서 안탑의 이야기를 알게 된 현장이 당나라로 돌아온 뒤 자은사에 탑을 세우고 ‘안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안탑이 대안탑이 된 것은 나중에 생겨난 소안탑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소안탑이 있는 천복사(薦福寺)의 원래 이름은 헌복사(獻福寺)였다. 684년에 예종이 아버지 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헌복사를 지었는데, 690년에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천복사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중종 때인 707년에 소안탑이 세워지는데, 이 시기는 바로 의정(義淨, 635~713)이 천복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불경을 번역하던 때였다.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온 법현과 현장을 어려서부터 흠모하던 의정 역시 불경을 구하러 인도를 다녀왔다. 그가 이용한 길은 육상 실크로드가 아닌 해상 실크로드다. 당시에는 육로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바닷길이 활발히 이용되고 있었다. 광저우(廣州)에서 상선을 타고 인도로 떠난(671년) 의정은 20여년이 훌쩍 넘은 695년에야 당나라로 돌아왔고, 이후 장안과 낙양의 여러 절에서 230권에 달하는 불경을 번역했다. 소안탑이 있는 천복사는 장안의 3대 역경장(흥선사·자은사·천복사) 가운데 하나였으며, 의정이 세상을 뜬 곳도 바로 천복사다.
소안탑은 이름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대안탑과 비슷하다.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대안탑이 세워졌다면, 의정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소안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대안탑에서 명·청 시대에도 당나라의 풍속을 모방해 향시 합격자들이 안탑제명했던 것처럼 소안탑에서도 향시의 무과(武科)에 합격한 거인들이 천복사를 찾아와 소안탑 아래서 비석에다 이름을 남기는 풍속이 있었다. 지금 천복사에 보존된 명·청 시대의 제명비가 바로 그 증거다.
현존하는 형태가 원래의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도 두 탑은 비슷하다. 기록에 의하면 소안탑은 본래 위아래가 가늘고 가운데가 두꺼운 방추형이었다고 한다. 당시 소안탑의 높이는 약 53m에 15층이었다. 소안탑이 현재처럼 죽순형으로 된 것은 강희 29년(1690)에 탑의 기단에 벽돌을 둘러서 두께가 70㎝ 정도 더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현재 소안탑은 43.38m에 13층만 남아 있다. 층수와 높이가 줄어든 것은 다름 아닌 지진 때문이다. 명나라 가정(嘉靖) 34년(1556) 관중 지역의 대지진으로 꼭대기 두 층이 무너져 떨어졌고, 지금까지도 소안탑의 꼭대기 두 층은 없는 상태다.
천복사 소안탑
이름을 비롯 여러 면에서 비슷한 소안탑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다가 다시 회복되고 있는 대안탑보다 더 신비한 일이 소안탑에 있었는데, 바로 ‘삼열삼합(三裂三合)’ 현상이다. 말 그대로 소안탑은 세 차례 갈라졌다가 다시 세 차례 합쳐졌다고 한다. 그 원인은 바로 지진이다. 1487년의 지진으로 탑 가운데가 갈라졌는데, 34년이 지난 1521년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났고 이날 밤에 탑이 한데 합쳐졌다고 한다. 이 일은 소안탑 북문 문미(門楣)에 새겨져 있다. 당시 하룻밤 사이에 탑이 원래대로 합쳐진 것을 목격한 이는 “마치 신이 합쳐놓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이후 두 번이나 더 있었다. 1556년의 지진으로 다시 갈라졌다가 1664년에 또 합쳐졌고, 1691년에 다시 갈라졌다가 1721년에 또 합쳐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의 지진에서도 소안탑이 무사했던 것은 신의 힘이 아니라 장인의 뛰어난 건축술 덕분이라고 한다. 탑의 토대를 반원의 구체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압력이 골고루 분산되어서 마치 오뚝이처럼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소안탑은 꼭대기 두 층만 없을 뿐 지진으로 인해 갈라진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1964년에 이루어진 정밀 보수 작업의 결과다.
똑같이 기러기 탑으로 명명된 대안탑과 소안탑, 두 탑은 2014년에 실크로드 유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나란히 등재되었다.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 다녀온 현장,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에 다녀온 의정, 두 사람은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 교류의 상징이다. 두 사람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대안탑과 소안탑 역시 그러하다.
바야흐로 중국은 2013년에 시진핑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제시한 이래,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조성해나가는 데 있어서 ‘실크로드’라는 역사 부호의 상징성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2015년 10월 21일에 열린 중·영 비즈니스 정상회의에서도 시진핑은 일대일로를 언급하면서, 일대일로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며 공동의 번영을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일대일로가 어느 일방(중국)의 개인적인 좁은 길이 아니라 모두가 손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햇빛 비치는 큰 길”이라고 역설한 것은 패권이 아닌 포용의 세계전략을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과 합작해 실크로드 유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고, 일대일로라는 신실크로드 정책을 세계전략으로 구사하는 중국의 저력은 ‘팍스 시니카’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예감하게 한다. 일대일로 정책 및 그 자금줄을 대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설립은 궁극적으로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다. 팍스 아메리카와 팍스 시니카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하는 우리의 행보는 조심스럽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