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의 흥교사에는 현장과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를 흥교사탑이라고 한다. 현장의 구법 여행, 중국의 유식종 탄생, 신라의 유식종 탄생이라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일련의 중요한 사건이 압축된 상징물이 바로 흥교사탑이다.
당 태종 정관 19년(645),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현장(602~664)이 장안에 도착했다. 17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이후 약 20년 동안 현장은 자신의 일생을 경전 번역에 쏟아 붓는다. <유가론(瑜伽論)>과 <성유식론(成唯識論)>으로 대표되는 경전의 번역을 기반으로 그는 유식종을 창시하게 된다.
규기에게 강의할 때 문밖에서 ‘도강’
현장의 번역 작업은 규모면에서 방대하고 가치면에서 위대한 일이었다. 존재의 궁극을 부처님 말씀에서 찾고자 했던 이들에게, 이 일을 함께하는 것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뛰는 일이었을 것이다. 현장과 함께한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그들에게 경전의 번역은 단순한 언어의 전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대한 해답을 찾는 구도의 길이자 깨달음의 과정이었을 터이다.
현장의 직계제자였을 뿐만 아니라 수제자로서 법맥을 이어받게 된 이는 바로 규기(窺基, 632~682)다. 현장은 처음부터 규기를 남달리 아꼈다. 그는 규기를 자신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 불교의 금계까지 범할 수 있는 특권까지 허용했다고 한다. 규기는 술과 고기와 여자를 금하지 않는 것을 자신의 출가 조건으로 내걸었고, 현장은 이를 수용했다. 규기는 수레 세 대를 거느리고 다녔는데, 앞쪽 수레에는 경전을 싣고 가운데 수레에는 자신이 타고 뒤쪽 수레에는 술과 고기와 여자를 싣고 다녔다. 그래서 규기를 ‘삼거(三車) 법사’라고도 한다. 송나라의 승려 찬영(贊寧)은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이런 이야기가 ‘엄청난 무고(厚誣)’라고 했다. 하지만 규기에 관한 서술의 분량이나 서술 태도를 보면, 찬영의 이런 평가는 규기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진실은 어렴풋한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규기를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원측(圓測, 613~696)이다. 그리고 이 둘을 언급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원측의 ‘도강(盜講)’ 사건이다. 규기만을 위한 현장의 특강을 원측이 몰래 훔쳐 들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을 지키는 이를 돈으로 매수한 뒤 몰래 숨어서 엿들었다는 것이다. 원측이 신라 출신이어서일까. 국내에서는 원측의 도강 사건을 규기 측에서 날조해낸 이야기라고 단언한다. 원측의 인품으로는 도강할 리도 없었고, 원측의 실력으로는 도강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의 진실 역시 어렴풋한 베일에 가려져 있다. 원측의 도강 사건은 날조이든 사실이든 다시 한 번 곱씹어봐야 한다.
흥교사의 산문
<송고승전>의 기록에 의하면 현장이 유식론을 번역할 때 처음에는 네 명의 제자와 함께했는데, 나중에는 다른 세 명을 그만두게 하고 규기에게 일임했다고 한다. 집필·윤색·검토 등의 작업을 여럿이 나눠서 하게 되면 법문의 찌꺼기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정수는 잃고 만다며 혼자 책임지고서 완성하고 싶다는 규기의 바람을 현장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만큼 규기의 실력이 뛰어나고 의지도 강했던 듯하다. 이런 규기에게 운명의 라이벌이었던 존재가 바로 원측이다. 규기가 현장의 유식론 강의를 독점하고 있을 때 원측은 그 강의를 몰래 엿들었다. 정식 강의는 규기가 들었고 원측은 도강했지만 원측이 한 발 앞서 승려들을 모아놓고 유식론을 강의했다. 규기는 자신이 뒤졌다는 사실에 부끄러웠고 실망했다. 현장은 규기를 격려하기 위해 진나(陳那)의 인명학(因明學)을 독점 전수해준다. 이것만으로는 원측을 상대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규기는 현장에게 유가론을 오직 자기에게만 강의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원측이 몰래 엿듣고 한 발 앞서 강의하게 된다. 원나라의 승려 담악의 <신수과분육학승전(新修科分六學僧傳)>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고 있다. 유식론과 유가론의 번역이 끝나자 현장이 규기에게 상세한 강의를 해주었는데, 원측이 번번이 훔쳐 듣고서 한 발 앞서 강의했다는 것이다.
외국인으로 장안 사찰 서명사 대덕에
원측이 정말 문지기를 매수했을까, 정말 현장의 강의를 몰래 엿들었을까? 그것은 팩트일 수도 픽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원측이 규기보다 먼저 유식론과 유가론을 자기화하여 다른 이에게 강론했다는 것은 엄연한 팩트다. <송고승전>에서는 선수를 치려는 원측의 마음을 규기가 싫어했고 결국 원측에게 강론을 양보했다고 한다. 애초에 현장과의 작업을 독점하고 강의까지 독점한 규기가 과연 원측에게 양보한 것일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게 팩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는 태원의 동자사(童子寺)에 대해 말하길, 자은법사 규기가 신라 승려 현측(玄測, 원측)법사를 피해 장안으로부터 와서 유식론을 강의하기 시작한 곳이라고 했다. 규기는 강론의 능력에 있어서도 원측을 따라가지 못했던 듯하다. 현장의 수제자이자 자타공인 유식종의 정통인 규기를 장안에서 몰아낼 외부적 핍박은 없었을 것이다. 규기가 원측을 피한 것은 이길 수 없는 라이벌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규기와 원측은 거의 스무 살의 나이차가 난다. 현장이 인도에서 돌아왔을 때 규기는 십대 소년이었다. 그가 정식으로 현장의 제자가 된 건 열일곱이 되어서다. 당시 원측은 서른 중반으로, 십대 중반에 당나라로 와서 불교를 공부한 지 이십 년이나 된 시점이었고 이미 사상의 토대가 충분히 무르익은 상태였다. 규기가 불경 번역에 참여하기 시작했을 때 나이는 스물다섯, 이때 원측은 마흔네 살이었다. 규기가 아무리 속성 코스를 밟는다 하더라도 원측이 쌓아온 내공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후 당 고종 인덕(麟德) 원년(664)에 현장이 세상을 뜨기까지, 규기는 현장의 곁에서 번역 작업을 함께하며 불법을 전수받았다. 그 사이에 규기는 많은 실력과 업적을 쌓았다.
규기와 원측은 유식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규기의 유식학은 자은사를 중심으로 형성·전승되고, 원측의 유식학은 서명사(西明寺)를 중심으로 형성·전승되었다. 규기·혜소·지주로 계승된 자은학파는 정통을 자처했고, 서명학파는 이들의 배척을 받았다. 두 학파 간에는 관점의 차이가 극명했던 만큼 많은 쟁론이 펼쳐졌다. 공교롭게도 원측과 그의 제자 도증과 승장 모두 신라인이었다. 자은학파가 정통과 주류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 상대가 외국인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터였다. 그런가 하면 외국인이었던 원측이 장안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인 서명사의 대덕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소가 작용했다. 원측의 탁월한 실력, 외국인에게 관대했던 당나라의 문화적 분위기, 그리고 측천무후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다. 측천무후는 명승들의 강론이 펼쳐질 때마다 원측이 가장 먼저 강론하게 했다고 한다. 신라에서 여러 번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지만 측천무후의 거절로 번번이 무산되었고, 원측은 세상을 뜨기까지 내내 당나라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의 제자 도증이 신라로 돌아와 태현에게 유식학을 전함으로써 신라의 유식종이 성립된다.
흥교사탑
시안의 흥교사에는 현장과 원측과 규기의 사리탑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이를 흥교사탑이라고 한다. 흥교사탑은 201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실크로드 유산 가운데 하나다. 현장의 구법 여행, 중국의 유식종 탄생, 신라의 유식종 탄생이라는 동아시아 불교사의 일련의 중요한 사건이 압축된 상징물이 바로 흥교사탑이다.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교류를 말해주는 세 흥교사탑의 명칭은 각각 당삼장탑, 측사탑(測師塔), 기사탑(基師塔)이다. 21m 높이의 당삼장탑을 가운데 두고 그 양쪽으로 7m 높이의 측사탑과 기사탑이 있다. 애초에 흥교사는 현장의 사리탑으로 인해 세워진 사원이다. 현장은 산골짜기 외진 곳에 자신을 안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고종은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한 현장의 유골을 장안 동쪽 교외의 백록원에 묻었다. 현장을 무척이나 존경했던 고종이 함원전에서 늘 백록원을 바라보며 그의 유골이 안전한지 노심초사하며 눈물을 흘리자, 측천무후가 669년에 현장의 유골을 장안 남쪽의 소릉원으로 이장하면서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사원도 세웠는데, 그게 바로 흥교사다. 흥교사라는 이름은 숙종이 현장의 사리탑에 ‘흥교(興敎)’라는 글자를 써넣으면서 지어진 것으로, ‘불교를 크게 일으킨다’는 의미다.
현장의 사리탑 곁에 먼저 자리하게 된 이는 원측보다 앞서 세상을 뜬 규기다. 원측도 자신을 스승 현장의 사리탑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는데, 원측의 제자는 화장한 그의 유골을 흥교사에서 바로 바라다 보이는 종남산 풍덕사(豊德寺)에 묻어주었다. 원측과 규기 세력 간의 갈등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원측을 현장의 사리탑 옆에 묻을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400여년이 지나서야 원측은 스승 곁에 묻히게 된다. 송 휘종 때(1115년) 풍덕사에 있던 유골의 일부를 가져다 현장의 사리탑 동쪽에 묻어주었던 것이다. 이때 원측의 사리탑 규모와 모양을 규기의 것과 동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원측이 현장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곁에 묻히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다. 측사탑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의하면, 원측은 현장과 뜻이 잘 맞았고 현장이 원측에게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등에 소를 달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원측이 현장을 도와서 불법을 동쪽으로 흐르게 했다고 한다. 이 명문을 보면서 원측의 도강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재미난 상상을 해본다. 혹시 현장이 원측에게 몰래 와서 들으라고 했던 건 아닐까. 규기는 현장의 법맥을 전수받는 수제자의 권리로써 독점 강의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를 거절할 수 없었던 현장이 형식적으로는 규기의 요구를 들어주되 실질적으로는 원측에게도 자신의 가르침을 나눠주고자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현장이 부처의 가르침을 일파의 자산으로 지키고자 하는 생각이 앞섰다면, 오직 자신의 수제자인 규기에게만 전수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공공재로 여겼다면 그 가르침을 가장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누구보다 가르침을 갈망하던 원측을 배제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현장이 몰래 들으라고 한 것은 아닐까?
흥교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있다. 바로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과 관련하여, 2013년 봄에 중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흥교사 사건’이다. 2013년 3월, 시안시 관련 당국이 5월 30일 이전까지 흥교사 건축물의 3분의 2를 철거하겠다는 공문을 흥교사에 보낸 것이 발단이었다. 흥교사와 그 어떤 사전 교감도 없었던 상태에서의 일방적 요구였다. 철거계획이 그대로 진행될 경우 흥교사 승려들은 더 이상 흥교사에서 지낼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흥교사 측에서는 즉시 강하게 반발했고, 전국적으로 비판의 여론이 확산되었으며, 결국 당초의 철거계획은 철회되었다.
흥교사 사건은 오늘날 우리의 가치 기준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흥교사탑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흥교사 내에서 소위 가치가 떨어지는 건축물을 철거하겠다는 논리에는, 오직 흥교사탑만 존재한다. 그 논리에서는 정작 신앙의 주체인 승려들은 배제되고 만다. 그들로 인해 그곳이 비로소 살아 있는 공간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흥교사 사건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건 신앙의 공간이 문화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신앙이 본질을 잃은 채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라는 우려. 승려가 살지 않고 예배가 행해지지 않는 사원에서 과연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단 공간이 박제화·상업화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세계문화유산은 숙명적으로 ‘맥도날드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넘쳐나는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식당과 호텔, 기념품 가게로 가득한 그곳은 원래 그 공간이 갖고 있던 고유한 빛깔을 잃고 만다. 고유한 가치를 인정해 그 가치를 지키고자 부여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타이틀이 정작 그 고유함을 앗아가는 이 아이러니.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켜낸 흥교사가 과연 이 어마어마한 맥도날드화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흥교사탑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지 다섯 달이 지난 2014년 11월, 흥교사에서는 향후 4년 동안 세계적으로 1만3450존의 옥불상을 한정 판매하겠다고 했다. 수익금은 ‘현장대사와 실크로드 불교문화박물관’ 건립에 쓰겠단다. 난무하는 문화 프로젝트, 그것을 움직이는 자본의 논리! 오늘날 자본은 신이 되었다. 그 신에게 정말 외치고 싶다. “Let it be!”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