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은 왕이 되라는 유혹을 뿌리치며, 유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유방은 천하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한신은 병권을 빼앗겼고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실크로드: 장안-천산(天山) 회랑 노선망(Silk Roads: the Routes Network of Chang‘an-Tianshan Corridor). 2014년 6월 22일 중국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공동으로 신청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실크로드 유산 가운데 중국 구간 유산의 정식 명칭이다. 이때 등재된 유산 가운데 한나라 미앙궁(未央宮) 유적지가 있다.
기원전 139년, 장건(張騫)은 바로 미앙궁에서 한 무제의 명을 받고 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서역으로 떠났다. 장건의 서역 원정이 실크로드 개통의 계기가 되었던 만큼 미앙궁은 시공간적으로 실크로드의 기원과 관련된 상징적 장소다. 실크로드의 동방 기점으로 불리는 미앙궁은 당나라의 운명과 함께 장안이 정치 중심지에서 물러나게 될 때까지 무려 1000여년이 넘도록 존재한 황궁이다.
미앙궁이 세워진 시기는 고조 8년(기원전 199년)으로, 유방이 해하에서 항우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승리하고 황제에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때다. 황제가 된 유방은 이성(異姓) 왕과 제후의 잇따른 모반을 진압해야 했다. 유방이 한왕의 잔존 반군 세력을 치러 출정한 사이에 승상 소하는 장안에 미앙궁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전 해에 장락궁(長樂宮)이 완공되었던 터라 어찌 보면 불필요한 낭비였다. 출정에서 돌아온 유방은 미앙궁의 웅장한 규모를 보고 소하에게 화를 냈다.
한나라 장안성 미앙궁 유적지
천자의 위엄을 위해 지은 미앙궁
“천하가 뒤숭숭하여 여러 해 동안 고전하고 있으면서 아직 그 성패를 알 수 없는데, 어찌 이처럼 도가 지나친 궁실을 짓는단 말인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궁실을 짓는 것입니다. 천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는 법이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또한 후세에 이보다 더한 궁실을 세울 수 없게 해야 하옵니다.”
소하의 말을 듣고 유방이 기뻐했다고 한다. 미앙궁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자의 위엄을 드러내려는 상징적 건축이었던 것이다. 평민 출신으로 천자가 된 것이 유방에게는 긍지이자 콤플렉스였다. 이런 요소가 유방이 천하를 차지하기 전에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했다면, 이미 천하를 차지한 뒤에는 다른 이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을 낳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했다. 사실 한나라 초의 잇따른 모반과 진압은 개국공신들을 제거해나가는 일련의 프로세스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모반을 일으킨 이들은 정말로 유방의 자리를 넘보았던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제거하려는 유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모반을 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웅장한 미앙궁으로도 유방의 의심과 불안을 잠재울 수 없었다. 유방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견제를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이가 한신이다. 유방은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인 장량·소하·한신의 능력을 평가하면서, “100만 대군을 이끌고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여 이기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대군을 이끄는 능력에 있어서 한신은 누구보다 탁월했다. 일찍이 두 사람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의 능력으로는 얼마나 되는 군대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폐하는 10만을 거느리실 수 있을 뿐입니다.”
“그대는 어떠한가?”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어째서 내 밑에 있는가?”
“폐하께서는 병사를 잘 거느릴 수는 없으시나 장수는 잘 거느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 밑에 있는 이유입니다. 폐하는 하늘이 주신 분이지,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옵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 아무리 많은 대군이라도 능히 거느릴 수 있는 한신의 능력 때문에 유방은 그가 절실히 필요했고, 역설적이게도 절실히 그를 제거해야만 했다. 그 능력이 필요해서 유방은 한신을 제왕에 임명하여 항우를 치게 했지만 항우를 물리친 뒤에는 즉시 한신의 병권을 박탈하고 그를 제왕에서 초왕으로 바꾸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 한신이 모반했다고 밀고하자 유방은 거짓 순행을 구실로 제후들을 진(陳)에 모이게 했다. 마침 항우의 부하 장수였던 종리매가 항우의 죽음 이후, 평소 사이가 좋았던 한신에게 와 있던 때였다. 유방은 종리매에게 원한이 있기 때문에 체포령을 내린 바 있다. 이제 곧 황제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한신에게 누군가 말하길, 종리매의 목을 가져간다면 황제가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한신은 종리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종리매는 “나는 오늘 죽지만 공 역시 곧 죽게 될 거요”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가지고 유방을 만나러 갔지만 유방은 그를 결박하게 했다. 한신은 그제야 깨닫고 이렇게 말한다.
한신의 성공도 패망도 소하 때문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구나.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훌륭한 사냥개는 삶기고,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훌륭한 활은 치워지고, 적국이 격파되고 나면 지모가 있는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당연히 삶기고 마는구나!”
유방은 결국 한신을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했다. 이때가 고조 6년(기원전 201년)이다. 이제 한신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유방이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한다는 것을. 한신과 유방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갔다. 한신은 자주 병을 핑계로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밤낮으로 원망하며 늘 불만족스럽고 울적했다. 자신의 지위가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고조 11년,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반역을 일으켜 유방이 친히 토벌하러 간 사이에 한신은 죽음을 맞게 된다. 한신이 진희와 함께 모반을 꾀했다는 정보가 황후인 여후(呂后)에게 들어간 것이다. 여후는 소하와 의논한 뒤,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 진희가 이미 사형당했으며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하게 했다. 소하 역시 한신에게 궁전으로 와서 축하하라고 했다. 소하의 말이니만큼 한신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만들어준 인물이 바로 소하다. 도망친 한신을 추적해서 다시 유방에게 데리고 온 소하는, 한신이 국사무쌍(國士無雙) 즉 둘도 없는 나라의 인재이니 천하를 쟁취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신과 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유방은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았고, 마침내 천하를 쟁취하게 된다. 본래 한신은 너무 가난해서 굶주리기를 밥 먹듯 하고 남들에게 멸시당하기 일쑤였다. 이랬던 한신이 소하 덕분에 대장군이 되었으니, 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한신은 궁전으로 들어오라는 소하의 말을 따랐다. 한신이 궁전 안에 들어오는 순간 여후가 한신을 포박하게 했고, 장락궁 종실(鐘室)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한신은 죽는 순간 아마도 소하를 가장 원망했을 것이다. 송나라 때의 홍매(洪邁)는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신이 대장군이 된 것은 소하가 추천해서였고, 이제 그가 죽게 된 것 역시 소하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성공도 소하 때문이고 패망도 소하 때문이다(成也蕭何, 敗也蕭何)’라는 말이 항간에 나돌게 되었다.”
<회음후열전>에 의하면 한신은 죽기 직전, 괴통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일찍이 유방과 항우가 경쟁하고 있을 때 천하 대권의 향방이 한신에게 달려 있던 상황에서, 괴통은 한신에게 한나라·초나라와 더불어 천하를 셋으로 나누라는 계책을 내놓은 바 있다. 이때 한신은 괴통에게 “한왕(유방)이 자신의 수레로 나를 태워주고 자신의 옷으로 나를 입혀주고 자신의 먹을 것으로 나를 먹여주었다”고 하면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괴통은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도 삶겨진다”고 하면서 “군주가 위협을 느낄 정도의 용기와 지략이 있는 자는 몸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는 경고의 말을 건넸다. 그 누구의 신하가 되더라도 위태로우니 차라리 독자적으로 왕이 되라는 것이었다. 괴통이 찾아오기 직전에 항우 역시 한신에게 사람을 보내 똑같은 제안을 했다. 항우와 유방의 싸움에서 승리의 관건은 한신에게 달려 있으며 항우가 망하고 난 다음에는 유방이 한신을 멸할 것이니, 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와 화친함으로써 천하를 나누어 왕이 되라는 것이었다. 한신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한다.
“한왕은 나에게 상장군의 인(印)을 주셨고 나에게 수만 명의 군대를 주셨소. 자신의 옷을 벗어서 나를 입히고 자신의 밥을 내가 먹도록 하셨소. 나의 말을 들어주시고 나의 계책을 쓰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거요. 나를 가까이 여기고 신뢰하는 이를 배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오.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마음을 바꿀 수는 없소.”
만약 이때 한신이 천하삼분지계를 받아들였다면 그가 천하를 차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왕이 되라는 연이은 제안은 분명 한신에게 큰 유혹이었을 것이다. 천하의 대세로 보나 한신의 능력으로 보나,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의리를 저버릴 수 없고 자신을 신뢰하는 이를 배반할 수 없기에, 한신은 유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유방은 천하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 결과 한신은 병권을 빼앗겼고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마침내 목숨까지 잃게 되었다. 그가 죽기 직전 괴통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한 건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진희를 토벌하러 갔던 유방이 장안으로 돌아와서 한신이 죽은 것을 보고 과연 어땠을까? “기뻐하면서도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가장 두려운 존재가 제거되었으니 기뻤을 터이고, 뛰어난 공적과 능력으로 허망하게 죽었으니 가여웠을 것이다. 한신이 장락궁에서 죽임을 당한 이듬해(기원전 195년) 유방 역시 장락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래도록 즐거우리라는 의미의 ‘장락’을 한신도 유방도 누리지 못했다.
미앙궁 디지털 복원도
의심받지 않은 장량은 편안한 노후
유방이 죽은 지 2년 뒤에는 소하가 죽었다. 소하는 토사구팽당하지는 않았으나 유방의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유방이 항우 군대와 싸우러 나간 중에도 여러 번 사자를 보내, 관중에서 보급을 담당하고 있던 소하를 위로했던 것은 소하를 의심해서였다. 소하는 유방의 의심을 씻어내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형제 중에서 싸울 수 있는 이는 죄다 전장으로 보냈다. 자신의 계략으로 한신이 죽고 난 뒤에는 더 신중해졌다. 유방은 소하를 상국(相國)에 임명하고 더 많은 식읍을 하사했으며 호위부대까지 배치해주었지만, 소하는 식읍을 사양하고 재산 전부를 나라의 군비로 내놓았다. 자신을 호위하도록 한 게 은총이 아니라 의심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그를 토벌하러 간 사이에도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소하의 동정을 살폈다. 이때 관중의 민심을 크게 얻고 있던 소하는 백성들의 밭과 집을 강제로 싸게 구입했다. 일부러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백성들의 원망을 얻음으로써 유방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천하가 평정된 뒤 개국공신으로서 토사구팽ㄴ당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나라 창업 삼걸 가운데 나머지 한 명인 장량은 어땠을까. 유방이 장량을 의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홍문에서 장량 덕분에 유방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일까. 따지고 보면 유방을 배신하고 천하를 삼분할 수 있었으나 끝까지 항우와 싸워준 한신도 유방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다. 또한 유방이 전방에서 위기에 빠질 때마다 후방의 든든한 지원으로 유방의 재기를 도왔던 소하 역시 유방의 생명을 지켜준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유방은 장량을 의심하지 않았을까. 장량은 예쁜 여자처럼 생겼고 병약했다고 한다. 이런 장량에게서 유방은 위협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최고의 전략가답게 장량은 자신의 말년을 잘 설계했다. 개국공신들이 차례차례 제거되어 가던 즈음, 장량은 인간세상의 일을 떨쳐버리고 신선 적송자(赤松子)처럼 노닐겠다고 공언하며 도인처럼 지냈다. 장량은 유방이 죽은 뒤 9년을 더 살았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한 고조가 장자방(장량)을 쓴 게 아니라 장자방이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한 고조는 이성계를, 장자방은 정도전 자신을 빗댄 말이다. 정도전이 장량의 처신술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이런 말을 공공연히 입에 담진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장안성의 장락궁과 미앙궁은 동서로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각 동궁·서궁이라고도 한다. 미앙(未央)은 다함이 없다는 뜻이니, ‘장락미앙’은 오래도록 즐거움이 다함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다함이 없는 한나라의 오랜 즐거움을 위해 정작 개국공신은 거의 다 제거되었다. “공이 이루어지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功遂身退, 天之道也)”라는 노자의 말이 이번 이야기의 교훈이라고 한다면 너무 허망한 것일까?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