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친구>-‘나쁜 친구’는 나르시시즘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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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친구>-‘나쁜 친구’는 나르시시즘을 거부한다

입력 2015.09.21 16:42

나르시시즘은 참 나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을 바라보고, 어떤 대상도 자신을 위해 착취해 버리는 이 도착적인 자기애를, 나는 진정 혐오한다. 지금의 한국을 ‘헬조선’으로 만든 평범하고 보편적인 이유로 나는 나르시시즘을 첫손에 꼽는다.

예술의 세계는 다양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티 없이 밝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한없이 어두운 작품도 있다. 이렇게 밝음 혹은 어두움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작품들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다. 밝음과 어두움을 적절히 오가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원숙한 작품도 흔치 않아 귀하다. 때로는 분명히 밝은데 어둠이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 반대로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밝은 작품도 있다. 이런 작품들을 만나면 반갑기에 앞서 놀랍다. 어떻게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걸까, 뜯어보고 살펴보고 그 빛과 어둠 속에 들어가 침잠하게 된다. 앙꼬의 첫 장편 <나쁜 친구>(창비·2012)는 이 모두다. 읽을 때마다 모든 빛과 어둠을 다르게 경험하게 만든다.

밝음과 어두움을 적절히 오가는 작품
이런 힘들을 한 작품이 모두 지니고 있는 한 이유는 표지에서부터 드러나 보이는 뚜렷한 명암 대비에서 찾을 수 있다. 검고 흰 배경을 가르며 앉은 두 소녀는 밝은 세계에 함께 발을 걸치고 어두운 세계에 함께 엉덩이를 딛고 있다. 둘이 함께 일어서서 밝은 길을 걸었더라면, 혹은 둘이 함께 뒤로 넘어져 어두움에 빠져버렸더라면 이 작품은 나오지 못했을 테다. 하지만 한 소녀는 디뎠던 엉덩이를 떼고 일어섰고, 한 소녀는 걸친 발을 떼고 넘어졌다. 책을 덮을 때에야 비로소 확연히 지각되는 이 만화의 어둡고 밝은 정서는 이렇게 갈라진 둘의 삶을 떼어놓지 않고 직면하는 데서 나온다.

앙꼬 작가의 만화 의 한 장면. / 창비 제공

앙꼬 작가의 만화 <나쁜 친구>의 한 장면. / 창비 제공

한때 ‘불량 청소년’이라는 딱지를 기꺼이 붙인 채 어둠의 세계에 살았던 진주는 자라서 만화가가 된다. 이제는 나름 빛의 세계에 살며 과거의 어둠을 추억으로 조잘대던 진주는 함께 어둠의 세계에서 노닐던 정애가 아직도 어둠의 세계에 있는 것을 본다. 미안함, 부끄러움, 부채감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진주는 머리를 떨군다. 떨군 머리를 그대로 밝은 작업실로 가져가 펜으로 다시 다르게 조잘대며 바라본 어둠과 그 속의 자신과 친구. 아마도 <나쁜 친구>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비춰줬던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또 고마웠다고 말 걸기 위해서. 친구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어둠을 외면하고 밝음을 찾아 내려버렸던 60번 버스를 다시 타기 위해서.

생각나는 말이 있다. 어린이 장기밀매를 그린 소설 <어둠의 아이들>의 작가 양석일이 독자와의 대화에서 나눈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를 묘사했습니다. 어둠에 사는 사람은 빛의 세계가 대단히 잘 보입니다. 그러나 빛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어둠의 세계가 보이지 않을뿐더러 보려 하지도 않습니다.” 이분법의 모든 한계를 무릅쓰고 발화된 이 말은 분명 이 세계의 진실을 담고 있다. <나쁜 친구>는 그 진실을 가로지른다. 이분법을 들이대며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의 표지 / 창비 제공

<나쁜 친구>의 표지 / 창비 제공

‘나’만을 빛나게 하는 나르시시즘
나르시시즘은 참 나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만을 바라보고, 어떤 대상도 자신을 위해 착취해버리는 이 도착적인 자기애를 나는 진정 혐오한다. 지금의 한국을 ‘헬조선’으로 만든 평범하고 보편적인 이유로 나는 나르시시즘을 첫손에 꼽는다. 노력도 ‘노오력’도 모두 나르시시즘의 산물이다. ‘헬조선’이라는 호명법도 어쩌면 마찬가지다. 나르시시즘은 ‘너’도 ‘우리’도 없는 ‘나’만의 세계를 온통 빛으로 채워 넣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두 어둠으로 만들어 ‘나’만을 빛나게 한다. ‘헬조선’은 모두 어둠인 한국이다. 그 안에서 ‘나’만 빛난다. 그게 아니라면 ‘헬조선’은 ‘나’의 것이었어야 할 빛나는 금수저의 세계를 너무나도 잘 보이게 만드는 어둠이다. ‘나’는 그 빛의 세계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점멸하고 있다. 친구가 없어야만 빛날 수 있을 것처럼.

<나쁜 친구>는 그 나르시시즘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것을 거부할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인식의 과정을 한 편의 만화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둠과 빛을 가로지른다. 나르시시스트였더라면 진주는 정애 앞에서 고개를 떨구지 않았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였더라면 떨구었던 고개를 반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친구>는 둘 모두를 앓아가며 해낸다. 나르시시스트였더라면 진주는 정애를 그림으로써 자신을 빛나게 했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였더라면 진주는 정애를 영영 떠나보낸 자신을 꼿꼿하게 그림으로써 자신을 빛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친구>는 정애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둘 모두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이처럼 빛나게 어두운 작품을 알지 못한다.

만약 <나쁜 친구>를 읽는 독자가 나르시시스트라면 빛도 어둠도 그저 하나의 낯선 이야기로 스쳐 지나갈 공산이 높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이야기 속에서 ‘나’와 ‘너’의 빛과 어둠을 본다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그 경계를 다시 살피려고만 한다면, 이 하나의 이야기는 빛나게 어두운 이야기로 ‘헬조선’을 비출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너’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으로 자신의 숨겨둔 어둠을 비추어 발견할 때, ‘헬조선’이 재구성될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나쁜 친구>는 나쁘다. <나쁜 친구>는 친구다. 그것은 형용모순이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 끝없이 다시 만나야 하는 ‘나’와 ‘너’의 자리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어둠과 빛, 그 사이에서 함께 앉은 두 사람이 거기에 있다. 책을 열 때와는 다르다. 그들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 이별의, 슬픔의, 아픔의 의미를 ‘나’와 ‘너’ 모두를 두고 그려낼 수 있는 한, 누구도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없다.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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