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현장을 찾아 “수눌멍 살게마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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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현장을 찾아 “수눌멍 살게마씸”

입력 2015.07.28 11:19

제주말로 ‘살게마씸’은 ‘살아보세’다. 그 앞의 ‘수눌멍’은 ‘서로서로 도우며’ 일곱 음절을 세 음절로 담아내는 마술 같은 말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자 가장 잊혀진 말일는지도 모른다. <섬섬>을 보면 그 말의 의미가 보인다.

작년 5월에 출간된 <섬과 섬을 잇다>(이하 <섬섬>)는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 강정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콜트·콜텍과 재능교육,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등 긴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의 현장을 기록한 책이다. 기록의 방식은 만화와 르포다. 만화가와 르포 작가들이 직접 현장에 찾아가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공부해, 그 긴 싸움의 경과와 현재를 만화와 르포로 다시 들려준다. 그 속에서 울리는 것은 기존의 언론 보도가 담아내지 않았거나 더 이상 들려주지 않는 투쟁의 목소리다. 언론과 사회의 외면 가운데 ‘섬’이 돼버린 목소리들이다.

시간이 흘러 언론과 사회 관심 줄어
<섬섬>이 값진 것은 그래서다. 직접 가기 힘들고 소식을 듣기도 어려운 곳이 ‘섬’이다. 심지어 어떤 섬은 우리에게 그 존재 자체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tvN 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이 방영되기 전의 만재도처럼 아는 이들만 알던 섬이었다. 그나마 알려진 곳들도 존재가 지워지기 일쑤다.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은 작년 행정대집행 이후로 끝난 거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강정마을 투쟁도 이미 해군기지가 거의 다 지어졌으니 끝난 것처럼 여겨진다. 이렇듯 ‘싸움이 끝났다’는 인식 가운데 언론 보도도 줄어들고 관심도 줄어든다. 그렇게 지금도 싸우고 있는 이들의 존재가 사라진다. 하지만 <섬섬> 가운데 기록된 이들은 10년 만에 노사 합의를 본 코오롱 정투위를 제외하고는 1년이 지난 지금도 모두 여전히 싸우고 있다. 그걸 모르는 이들에게 <섬섬>은 지금도 싸우고 있는 이들의 얼굴을 보여주고, 싸우고 있는 이유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머릿속 지도에 그들의 ‘섬’이 그려진다. 있다는 걸 아니까, 이제는 찾아가볼 수도 있는 섬이다.

에 실린 만화 의 한 장면. / 한겨레출판 제공

<섬과 섬을 잇다>에 실린 만화 <수눌멍 살게마씸>의 한 장면. / 한겨레출판 제공

그 섬들 가운데서도, 오는 8월 3일이면 반대운동 3000일을 맞이하는 강정마을에 김홍모 작가와 함께 방문해 보자. 이 섬에는 원래부터 살던 마을사람들과 해녀들, 그리고 반대투쟁 이후에 찾아와 머물고 있는 지킴이(활동가)들이 있다. 김홍모 작가는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이야기를 듣는다. 만화의 다채로운 연출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면서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로 칸을 가득 채웠다. 따라서 연출 대신에 다채로운 것은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다. 왜 이 섬에 왔는지, 왜 이 섬을 지켜야 하는지, 이 섬을 지키는 이들이 누구인지, 싸우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가 친근하게 만화적으로 그려진 얼굴들의 입에서 말풍선으로 들려온다. 결국 ‘이렇게 사람들이 있다’고 증언하는 것처럼 주야장천 사람들을 보여주던 작품은 한 활동가가 준비한 2014 강정 평화대행진 홍보문구를 그려 보이며 마침내 속내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제목이자 <섬섬>의 모든 섬을 아우를 수 있는 섬말 ‘수눌멍 살게마씸’이 그것이다. 강정마을에 담긴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수눌멍 살게마씸.’

제주말로 ‘살게마씸’은 ‘살아보세’다. 그 앞의 ‘수눌멍’은 ‘서로서로 도우며’ 일곱 음절을 세 음절로 담아내는 마술 같은 말이다. 이 매혹적인 말은 처음 작품을 접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내 맘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자 가장 잊혀진 말일는지도 모른다. <섬섬>을 보면 그 말의 의미가 보인다. 7명의 만화가와 7명의 르포 작가가 현장과 ‘수눌멍’ 작업해서 펴낸 작품집이 <섬섬>이다. 르포 만화가도 르포 작가도 시장에서 소외되어 외로운 존재다. 현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그들이 만나니 ‘섬’과 ‘섬’을 ‘잇는’ 작품이 나왔다. 이렇게 이 섬들과 저 섬들이 ‘수눌젠’(서로서로 돕기 위해) 만나야 한다. 이 섬과 저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 역시도 ‘수눌멍’ 해야 할 일이다.

사회 곳곳의 투쟁현장에 관한 만화와 르포를 함께 묶어 펴낸 의 표지. / 한겨레출판 제공

사회 곳곳의 투쟁현장에 관한 만화와 르포를 함께 묶어 펴낸 <섬과 섬을 잇다>의 표지. / 한겨레출판 제공

1년 반 만에 희미해지는 세월호
<섬섬>을 1년 만에 다시 펴들고 ‘수눌멍’을 되새긴 것은 인권활동가 박래군이 세월호 유가족과 ‘수눌멍’ 싸웠다는 이유로 구속된 직후의 일이다. 사실 세월호 유가족을 <섬섬>의 섬들과 마찬가지 처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불과 1년 반 만에 ‘기억하겠다’고 말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이 우리는 이제 세월호를 말하지 않고 세월호 소식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가족을 잃은 것만으로도 외로운 유가족들은 나날이 고립되고 외로워진다. 이제 세월호 유가족도 섬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박래군까지 잃었다.

그 박래군이야말로 늘 ‘수눌멍’ 살며 싸워온 섬 같은 사람이다. 군부정권에 저항해 분신한 동생 박래전을 잃고 30년 가까이 인권운동을 이어온 박래군은 외로움을 아는 사람이다. 자식과 가족을 잃어버린 세월호 유가족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알기에, 그는 가족들과 ‘수눌멍’ 싸웠고, 그랬기에 그들은 모두 덜 외로웠다. 세월호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줄어가고 시민들의 발길이 뜸해질 때에도 박래군과 세월호 유가족은 서로가 있었기에 덜 외로울 수 있었다. 박래군은 <섬섬>의 투쟁들과도 늘 ‘수눌멍’이었다. 강정 평화대행진도 매년 함께 걸었다. (강정 활동가들은 7월 27일부터 시작되는 올해 행진을 박래군과 함께 걷지 못할까봐 마음 졸이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박래군이야말로 섬과 섬을 잇는 삶을 살던 이다. 그런 이를 국가는 가둬버렸다.

그러니 안 그래도 외롭던 섬들은 더 외롭다. ‘수눌멍’ 함께하던 그 사람이 나올 길 없는 외딴섬에 갇혀버린 지금, 그의 빈 자리는 하나의 공터나 가슴에 뻥 뚫린 구멍 같은 것이 아니다. 그 빈 자리는 섬과 섬 사이를 잇던 길이나 다리와 같은 공간이고, 온몸을 이어주는 혈관 같은 것이다. 이 곳을 비워두면 섬들은 더욱 더 외로워질 것이다. 그러니 방도를 찾아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수눌멍’ 박래군을 돌려놓든지, ‘수눌멍’ 그 자리를 채우든지. 주어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는다. 우리말에서 늘 생략되곤 하는 그 주어가 이제는 전면에 나서야 한다. ‘수눌멍’ 살기 위해.

<조익상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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