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똔~ 똔~ 똔~ 땡! …(9시 뉴스 타이틀 음악) 안녕하십니까? 오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그날 가장 중요한 TV 9시 뉴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9시를 알리는 ‘땡’ 소리와 함께 ‘전두환’이 나온다고 해서 ‘땡전뉴스’라고 불렀다. 당시 2개밖에 없던 TV채널 KBS와 MBC는 대통령 동정을 먼저 보도하기 위해 전용 편집실까지 뒀다. “땡전뉴스는 목불인견의 수준이었다. 이 땡전뉴스는 심한 경우 총 뉴스시간 45분 가운데 30분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방송사끼리 누가 오래 대통령 동정을 다루느냐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곤 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신군부는 1980년 7월 31일 <창작과 비평> <씨알의 소리> <뿌리깊은나무> 등 정권에 비판적인 172개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했다. 신군부는 이어 11월 14일 방송과 통신, 신문을 통·폐합하고 언론인 강제해직의 칼을 휘둘렀다. 방송 통합에서만 200여명이 해직됐고, 전국적으로 1900여명의 해직기자가 생겼다. 12월 31일 언론기본법을 만들어 계엄이 아닌 평시에도 언론검열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매일 언론사에 하달되는 그날의 보도지침은 바로 이 체제의 산물이었다.
32년 전 혈육을 찾는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했던 여의도 KBS와 여의도 광장은 당시 역사를 기록한 표지 하나 없이 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본 없는 감동의 드라마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를 만들어 전권을 장악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사퇴시켰다. 그리고 8월 27일 전두환은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불과 1년도 안돼 육군 소장이 대통령으로 바뀐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만들어 정권을 장악한 것과 똑같은 전철을 밟았지만 ‘합법적인 권력장악’은 박정희 소장보다 훨씬 빨랐다.
신군부의 권력장악이 이처럼 빨랐던 것은 고도의 여론조작 때문에 가능했다. “신군부가 추진한 ‘음모와 공작’의 핵심은 여론조작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박 정권 시절과 달리 언론이 단지 침묵해주거나 소극적으로 따라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신군부는 언론이 자기들의 집권을 적극 옹호하면서 지켜주는 ‘애완견이기도 하면서 보호견’이 되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강준만, 한국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이 모든 것은 보안사 언론대책반이 만든 ‘K(king)공작’에 의해 주도면밀하게 진행됐다. 1996년 공개된 K공작 문건에 따르면, 회유대상 언론인과 포섭대상 지식인 등을 면밀하게 분류해 추진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군부는 이어 12월 1일 컬러 TV방송을 통해 온 국민의 시선을 TV 수상기 앞으로 끌어모았다. 흑백화면밖에 몰랐던 국민들은 총천연색 TV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신군부는 그 컬러TV 수상기 앞에 모인 국민을 향해 매일 ‘땡전뉴스’를 쏟아부었다. 보통 사람들은 컬러TV에서 나오는 가수 이미자와 조용필에 환호했고, 미스코리아 중계방송과 프로야구(1982년 3월 27일부터 시작)에 열광했다.
1983년 KBS 여의도 공개홀에서 혈육을 만나는 감동의 순간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러한 가운데 의외의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1983년 6월 30일 밤 10시15분, KBS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산가족들이 자신의 신상 명세를 적은 메모판을 들고 있으면 아나운서가 그 내용을 소개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을 본 당사자나 주변 사람들이 방송사로 연락해 스튜디오에서 가족을 상봉할 수 있도록 했다. 상봉 가족이 지방에 있으면 지역 KBS 스튜디오에 나와 화면 상봉도 하도록 했다.
이 프로그램은 자세히 얼굴을 보여주며 사연을 말하고 이를 전국적 네트워크가 확인하는, 당시 컬러TV가 할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살린 프로그램이었다. 여기서 의외로 ‘대박’이 났다. 혈육을 찾는 생생한 순간은 대본에 없는 감동의 드라마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당시 첫 상봉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첫 방송을 시작한 후 시간이 흘러가도 상봉의 극적 장면은 터지지 않았다. …그런 긴장된 순간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별안간 중앙홀 바깥이 떠들썩하더니 5~6명의 중년 남녀들이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뛰어들었다. …포옹, 통곡, 서로 얼싸안고 다시 이름을 부르며 만남의 기쁨으로 눈물을 쏟는 모습. …40년 가까운 세월을 생사조차 모르던 혈육을 다시 만난 그 벅찬 반가움과 헤어져 살던 서러움이 한데 뒤엉켜 서로 부둥키고 울부짖는 감동적인 장면. …그것은 어느 드라마의 극적 장면보다도 진했다. 화면을 지켜보던 모든 시청자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작진도 울었고 시청자도 흐느꼈다.”(한국방송 70년사, 1997년)
공개홀에 들어가지 못한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서 자신의 사연을 담은 종이를 붙이고 있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산가족들의 말들이 시가 되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나간 다음 날인 7월 1일, KBS 사옥에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는 이산가족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2200건이던 출연 신청이 이틀 만에 1만4780건이나 접수됐고, 7월 12일에는 10만건이 넘었다. KBS는 긴급히 편성을 조정했다. 방송시간을 대형 편성으로 바꿔 7월 1일에는 8시간 45분, 2일에는 11시간, 3일에는 9시간 50분, 4일에는 12시간 등 거의 종일 방송 편성에 들어갔다.(한국방송협회, 1997년)
1980년대를 관통하는 처절한 현실 묘사 시인 황지우는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라는 제목의 이런 시를 썼다.
“#1. 마침내, 그 40대 남자도 정수가아아~~ 목놓아 울어 버린다. #2. 부산 스튜디오의 그 40대 여자는 카메라 앞에서 까무라쳐 버렸다. #3. 서울 스튜디오의 그 40대 남자는, 마치 미아가 된 열 살짜리 아이가 길바닥에서 울 듯, 이젠 얼굴을 들고 입을 벌린 채 엉엉 운다. 정숙이를 부르며.… #12. 화면은 이제 춘천방송국으로 가 있다.… 아버지가 빨갱이에게 총살당했다는 사람, 일본명이 가네다 마찌꼬였다는 사람, 내려오다 군산서 쌀장수에게 수양딸을 줬다는 사람, 대구 고아원에 맡겨졌다는 사람, 부산서 행상했다는 사람. #13. 엄마아 왜 날 버렸어요? 왜 날 버려! #14. 내가 죽일 년이다. 셋째야 미안하다. 미안하다. #15. 아냐, 이모는 널 버린 게 아니었어. 나중에 그곳에 널 찾으러 갔더니 네가 없더라구. #16. 누나야 너 살아 있었구나! #17. 언니야 왜 이렇게 늙어 버렸냐, 응? 그 이쁜 얼굴이, 응? #18. 얼마나 고생했니?”(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서 재회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바로 시가 됐다. 달리 시인의 수식어와 기교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 재회 장면 하나하나는 국민의 가슴을 후벼파고, 눈물을 쥐어짰다. 여기에 더한 것이 바로 이산가족 찾기 주제가였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였다. 애잔한 곡조에 “얌전한 몸매의 빛나는 눈…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노랫말은 심금을 울렸다. 이 노래는 1962년 KBS 라디오 연속극 ‘남과 북’의 주제가(가수 곽순옥)로, 연속극 내용은 분단과 사랑의 스토리였다.
이 감동적인 눈물의 현장을 잡기 위해 세계의 기자들이 몰려왔다. AP, UPI, 로이터, AFP 등 세계 4대 통신과 각국의 신문·방송사들이 이 현장을 세계로 중계했다.(이 프로그램은 세계언론인대회가 ‘1983년도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했다)
여의도에 몰려든 이산가족을 KBS가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출연하지 못한 이산가족들은 아예 여의도 광장에 ‘만남의 광장’을 차려놓고 스스로 이산가족 찾기에 나섰다. 헤어진 부모나 동생의 이름과 사연을 적은 종이판이 여의도 광장을 메웠다. 마치 지금 진도 팽목항에 세월호 리본이 달리듯, 여의도 광장 일대는 하얀 종이로 펄럭였다. 사연을 종이판에 붙이러 온 사람들과 이를 보러 온 사람들로 여의도 광장에는 인파가 넘쳐났다.
당시 허허벌판이던 여의도 광장 주변은 공원이 조성되고 고층빌딩이 즐비한 증권타운으로 변했다.
생방송은 11월 14일까지 138일, 장장 5개월간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5만3536건의 이산가족 사연이 소개됐고, 1만189건의 상봉이 이뤄졌다. 이는 단일 주제의 최장 생방송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78%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방송기록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텔레비전의 특성과 방송 네트워크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한국 방송사의 이정표적인 프로그램’ ‘한국의 분단 상황을 배경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과시한 세계 방송사에 남을 프로그램’이라는 극찬이 나왔다.(방송대사전, 1990년) 당시 KBS는 땡전뉴스라는 오명을 들었지만, 이 생방송을 통해 그나마 공영방송의 체면을 세웠다.
장장 138일 연속 방송, 시청률 78%
이 프로그램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TV프로그램 차원을 넘어 전후 최초로 남북 관계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비롯한 그동안의 남북협상은 남북한 정치권력의 정권·군사적 필요에 의해 추진됐다. 대구가톨릭대 교수를 지낸 역사학자 최상천은 남한 박정희와 북한의 김일성이 분단상황을 서로의 통치수단으로 이용했다고 비판하고 있다.(알몸 박정희, 인물과사상사, 2005년)
그러나 이 프로그램 이후 남북협상에서 이산가족 문제가 주요 의제로 자리잡게 됐다. 이후 1985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남북적십자회담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이 합의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됐다. 1985년 9월 21~22일 남한의 워커힐호텔과 북한 평양 고려호텔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비록 남북한 100명도 안 되는 이산가족의 상봉이었지만 전후 최초의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선 2000년부터 본격적인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돼 지금까지 모두 19차례 대면상봉과 7차례 화상상봉으로 2만6000여명이 서로의 가족을 만났다.
하지만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총격 사건 이후 이산가족 상봉은 중단됐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상봉 신청자 12만9000여명 중 이미 절반 정도는 세상을 떠났다. 남은 6만7000여명도 대부분 80대 이상 노인이다. 지금의 차가운 남북관계로 보아 언제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될지 불투명하다.
1983년 이산가족 생방송을 통해 여의도는 이산가족의 한을 응축한 상징적 장소가 됐다. 그때 넓었던 여의도 5·16광장은 거의 10분의 1로 축소돼 여의도공원 광장(문화의 마당)으로 남았다. 하지만 공원 어디에도 이곳이 이산가족의 한이 응축됐던 역사의 장이라는 것을 기록해 놓은 곳은 없다. 서울시 공원안내도는 물론, <백과사전>에도 이곳이 전후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의 계기가 된 현장이라는 기록은 없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5·16광장으로 국군의 날 행사와 종교, 정치집회를 하던 곳’이라는 설명만 있을 뿐이다. 한민족 문화에서 이산가족의 한과 상봉이 국군의 날 행사와 종교집회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참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32년 전 그 넓던 광장을 꽉 채웠던 인파는 2015년 7월 텅 비어 있다. 32년 전 장장 138일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혈육을 만나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그 현장은 모두 잊혀졌다. 이는 평화와 화해를 주창하는 정치세력과 통일단체는 해산시키고 옥죄면서, ‘대박’과 ‘응징’을 외치는 기업과 보수세력만 득세시킨 결과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