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과 전쟁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곽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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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과 전쟁으로부터 당나라를 지킨 곽자의

입력 2015.07.13 16:52

곽자의는 현종·숙종·대종에 이어 덕종까지 무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안사의 난과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당나라를 지켰으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비록 나의 나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경이 다시 세운 것이오”라는 숙종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당신 아버지가 천자라고 위세 부리는 거요? 내 아버님은 천자 자리 따윈 하찮으셔서 그 자리에 오르시지 않는 거요!”

젊은 두 남녀의 부부싸움 끝에 튀어나온 놀라운 말! 남편은 곽애(郭曖), 아내는 승평(昇平)공주. 곽애는 곽자의(郭子儀)의 아들이고 승평공주는 대종(代宗)의 딸이다. 아무리 남편이라지만 이 얼마나 대역무도한 발언이란 말인가, 어디 감히! 분노가 치밀어 오른 공주는 냅다 수레를 타고 아버지에게 달려가서 남편이 한 말을 일러바친다. 그런데 아버지 대종의 반응은 공주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다.

대학습항 패방

대학습항 패방

“네가 뭘 제대로 모르는구나. 네 남편 말이 정말 옳다. 만약 곽자의가 천자가 되고자 했다면 천하가 어찌 우리 집안의 소유일 수 있겠느냐!”

대종은 딸을 위로한 뒤 시댁으로 돌려보낸다. 이 사건을 알게 된 곽자의, 당장 아들을 잡아다가 조정에 끌고 들어가서 죄를 청한다. 대종은 오히려 곽자의에게 뜻밖의 훈수를 건넨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소. ‘바보에 귀머거리가 되지 않으면 집안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어린 부부 사이에서 오간 말이거늘 뭐하러 귀담아 듣는단 말이오!”

이렇게 그냥 집으로 돌아오게 된 곽자의, 그는 결국 아들에게 곤장 수십 대를 때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짓는다.

위기 때마다 나라를 구한 해결사
이 믿기 어려운 일화는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기록된, 당나라 대종 대력(大曆) 2년(767년)의 실화다. 그즈음의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한다면 대종이 취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안사(安史)의 난(755~763)으로 도피해 지내던 현종(玄宗)과 숙종(肅宗)이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757년에 곽자의가 장안을 수복한 덕분이다. 오랜 전란으로 당나라의 병력이 허술해진 틈을 타서 763년에는 토번(吐蕃, 티베트의 전신)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당시 황제였던 대종 역시 수도를 버리고 도망쳤다가 곽자의가 장안을 수복한 덕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764년에는 삭방(朔方)절도사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회흘(回紇, 위구르의 전신)과 토번 등 30만에 달하는 이민족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막아낸 인물도 곽자의다. 이듬해 이어진 토번과 회흘의 침략을 격퇴한 인물도 곽자의다.

현종·숙종·대종에 이어 덕종(德宗)까지 무려 네 명의 황제를 섬기면서 안사의 난과 잇따른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당나라를 지켰으니, 그 위상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비록 나의 나라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경이 다시 세운 것이오”라는 숙종의 말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다. 욕심내고 실행에 옮겼다면 손쉽게 황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지점에 곽자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은 천하를 기울일 정도였지만 조정이 꺼리지 않았고, 공적은 한 세대를 덮을 정도였지만 군주가 의심하지 않았다”(<구당서> ‘곽자의전’)고 역사는 전한다. 과연 그랬을까? 사실 곽자의는 모함도 당하고 의심도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나라에 위기가 찾아왔고 번번이 그가 해결사로 나섰던 것이다.

회족거리 야시장

회족거리 야시장

곽자의는 안사의 난을 계기로 삭방절도사에 임용되면서 군공을 세우게 된다. 삭방절도사는 북적(北狄), 즉 북쪽의 외적을 막기 위해 현종 때부터 설치된 관직이다. 당나라 때 약 70명의 삭방절도사가 있었고 그 중에서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가 무려 16명이나 된다. 곽자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삭방절도사가 관할한 범위는 오늘날 닝샤(寧夏)를 비롯해 내몽고 하투(河套) 지역, 산시(陝西) 북부 및 간쑤(甘肅) 일부 지역이다. 역대로 삭방절도사는 돌궐·토번 등의 침략을 막아내면서 군공을 세웠다. 또한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절도사는 당나라에 ‘양날의 검’과 같았다. 변방을 지키기 위해서 절도사가 필요했지만, 막강한 권한을 지닌 절도사 자체가 위협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평로(平盧)·범양(范陽)·하동(河東) 세 지역의 절도사를 겸한 그는 당나라 병력의 무려 3분의 1일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가 15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장안을 향했을 때 현종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안녹산에게 엄청난 병권을 준 이가 바로 현종이었거늘. 그나마 다행인 건, 현종이 삭방절도사로 임명한 곽자의가 안사의 난을 평정했다는 것이다.

제국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이민족의 진압만큼이나 이민족과의 연맹도 중요한 법.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는 몽골 고원의 위구르제국(744~840)에 도움을 청했다. 위구르제국의 구성원은 당나라 때 회흘·회골이라 칭해지던 투르크계 민족이다. 곽자의를 도와서 안사의 난을 진압한 회흘 가운데 200여명이 장안에 남게 된다. 이들이 거주했던 곳이 바로 ‘대학습항(大學習巷)’이라고 한다.

‘항(巷)’은 거리를 뜻하는데, 시안 서대가(西大街)의 성황묘(城隍廟) 남쪽 입구에서 서쪽으로 100m쯤 되는 지점에서 남북으로 뻗은 400m의 거리가 바로 대학습항이다. 이곳은 당나라 때 외교업무를 관장하던 예부(禮部)의 주객사(主客司)와 외빈 접대를 담당하던 홍려시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외국인이 한족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도록 이곳에 학관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 거리에 ‘학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유래다. 이곳을 중심으로 현재 회민가(回民街) 즉 회족거리가 형성돼 있다. 회족거리 야시장에서 다양한 먹거리를 음미하는 것은 시안을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 회족거리 일대는 당나라 때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다양한 민족 성분의 상인·사절·유학생이 거주하던 곳이다. ‘안사의 난’의 진압을 도운 뒤 장안에 남았던 회흘 역시 이곳에 거주한 다양한 민족 가운데 하나다. 현재 이곳 거주민 대부분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지키고 있는 회족이다. 이들은 주로 원나라 때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건너온 색목인(色目人)의 후손이다.

회족거리 야시장

회족거리 야시장

아무튼 회족거리와 이슬람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는데, 청진사(淸眞寺)라고 불리는 이슬람 사원이 그 증거다. 시안의 대표적인 청진사 두 곳이 바로 회족거리의 대학습항과 화각항(化覺巷)에 있다. 서쪽의 대학습항 청진사는 서대사(西大寺)라고도 하고, 동쪽의 화각항 청진대사(淸眞大寺)는 동대사(東大寺)라고도 한다. 각각 중종(中宗)과 현종 때 처음 세워졌으니, 회족거리의 이슬람 역사는 무려 1300년이 넘는다. 이곳에 정착해 대대로 이슬람 언어와 전통을 지켜온 이들은 외교적 측면에서 훌륭한 자산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대학습항 청진사의 이맘(Imam, 이슬람교 성직자)이었던 핫산(哈三)이다. 15세기 초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삼보태감(三保太監) 정화(鄭和)는 동남아시아와 인도와 아프리카를 누비는 대항해를 이어갔다. 그가 네 번째 항해를 떠나기 전에 통역과 고문의 역할을 해줄 적임자로 발탁한 이가 바로 핫산이다.

핫산은 정화를 수행해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다. 정화는 영락제에게 핫산의 공로를 보고하고 대학습항의 청진사를 중수할 것을 주청한다. 이 일이 바로 대학습항 청진사의 <중수청정사비重修淸淨寺碑>(명나라 때는 대학습항 청진사의 명칭이 ‘청정사’였다)에 기록돼 있다. 이 비문에는 ‘알라’의 신통력을 말해주는 일화도 전해진다. 정화 일행이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될 위험에 처하자 핫산이 알라에게 기도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에 기적처럼 풍랑이 잠잠해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다들 무사히 명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청정사를 중수하게 됐다는 내용이 비문에 담겨 있다. <중수청정사비>는 높이 2.5m에 너비 0.835m이며, 비석 정면에는 한자로 기록돼 있고 뒷면에는 아랍어로 기록돼 있다. 원래 비석은 훼손되어 가정(嘉靖) 연간에 새로 새겼는데, 대학습항 청진사의 남쪽 비정(碑亭)에 보관된 이 비석을 일명 ‘정화비’라고도 한다.

대학습항 청진사 남쪽 비정의 ‘정화비’

대학습항 청진사 남쪽 비정의 ‘정화비’

제국의 자신감 뒤에 도사린 불안감
당나라는 명실상부한 ‘제국’이었고, 수도 장안은 이를 온전히 구현하고 있었다. 너무나 다양한 민족과 그 민족이 만들어 낸 다양한 문화가 장안에 공존했다. 그런데 그토록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할 수 있었던 제국의 자신감 뒤에는 그 어떤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었다. 장안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바둑판처럼 정연하게 나뉜 직사각형의 방(坊)에 ‘갇혀’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안성 내의 108개 방은 각각 2m 높이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북소리에 맞춰서 아침저녁으로 방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문이 닫힌 다음에는 금위군의 기병이 순찰하면서 철저히 통행을 금지했다. 주민들의 거주지역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구조였으므로, 세금 징수와 병력 관리라는 통치 목적을 손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치안의 측면에서 불안요소인 외국인 역시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곽자의를 도와 안사의 난을 진압한 뒤에 장안 대학습항에 남았던 회흘 사람들은 과연 당나라 문물을 잘 ‘학습’했을까? <신당서> ‘회흘전’에 의하면, 대력 6년(771) 장안에 머물던 회흘 사람들이 시장에서 여자를 겁탈한 사건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시장의 물건을 강탈하고 장안령(長安令)의 말을 빼앗았는데도 담당자가 감히 따지지 못했다. 그들이 이렇듯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건 당나라에 병력을 원조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빌미로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당나라의 비단을 교환하는 견마(絹馬) 무역에서 터무니없을 정도의 요구를 했다. 숙종 건원(乾元) 연간(758~760) 이후 해마다 수만 필의 말을 가지고 와서는 홍려시에 머물면서 약해 빠져 쓸모도 없는 말을 거의 강매하다시피 떠넘긴 것이다.

심지어 대력 10년(775)에는 멋대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자 경조윤(京兆尹)이 체포했지만 결국 황제가 죄를 추궁하지 말라는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 또 같은 해에 동시(東市)에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히자 옥리를 죽이고 탈옥한 사건도 있었다. 당나라는 회흘을 이용해 안사의 난을 진압했으며, 이후에 회흘과 토번이 함께 쳐들어 왔을 때는 회흘을 설득해 동맹을 맺고 토번을 격퇴하기도 했다.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줘야 하는 법. 수도에서 자행되는 이민족의 범죄행위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다 그 이유가 있었다. 앞에서 소개했던 곽자의 아들의 일화가 이제 자연스레 이해되지 않는가. 더 위험한 적이 날뛰고 있으니 감히 곽자의를 내칠 수 없었던 것일 뿐, 결코 황제의 도량이 넓었던 것도 아니고 곽자의를 신뢰했던 것도 아니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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