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말도 잘하지만 글을 훨씬 더 잘 쓴다. 그래서 그의 첫 책이 거침없이 써내려가되 어느 한 축이라도 흔들림 없는 문장의 책이 아니라 강의를 녹취한 것이라서, 아쉽다는 얘기다.
1943년 생으로, 극한의 물량 투입과 섬세한 튜닝으로 광활한 미 대륙의 하이엔드 앰프 세계를 평정했던 제임스 봉조르노라는 인물이 있다. 2013년에 타계했는데, 생애사 전체가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하틀리, 스모, 다이나코, SAE, 마란츠 등의 오디오 전문업체의 엔지니어로 활약하면서 가난한 음악 애호가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다가 1974년에 생애 최고의 역작 ‘앰프질라’를 발표해 적금마저 깨게 만들었던 그는 고집스런 엔지니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시장의 외면과 경영진의 압박에 떠밀려 20여년 동안 오디오계를 떠난 적도 있는데, 이윽고 2002년에 필생의 재기작을 발표하게 된다.
그 이름만 들어도 거대한 스피커를 뒤흔들면서 열두 필의 전투마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튀어나올 것만 같은, 모노블럭 파워앰프 앰프질라 2000. 이 극한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제임스 봉조르노가 던진 말이 아직도 귀에 남는다.
생애 첫 저서를 펴낸 강헌 음악평론가. / 서성일 기자
음악평론가 강헌의 첫 책이 나왔다
“벗들이여, 미안하지만 당신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음악평론가 강헌의 첫 책(첫 책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돌베개)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떠오른 말이 그것이었다. 봉조르노의 회심에 찬 말처럼, 아직 강헌은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강헌이 대학로에 위치한, 뭘 작당하는지 의심스러운 기이한 공간 <벙커1>에서 같은 제목으로 강의한 것을 녹취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 아쉽다.
강헌은 강의를 잘한다. 장안에 ‘구라’들이 몇 사람 있다고들 하는데, 내가 직접 겪고 본 ‘구라’로는 식민지 반봉건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했던 시절의 백기완과 황석영의 동북아적 구라가 있고, 근대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탈근대를 해야 했던 시절의 유홍준이 있다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으되 순식간에 인터넷 디지털의 세계로까지 달려가야 했던 세기말·세기초에는 강헌이 있었다.
수십년 동안 강헌은 강호의 여러 공간에서 생계형 강의를 해왔는데, 이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마다 하는 소리가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해도 책이 된다’는 것이었다. 몇몇 출판사들이 이를 탐했으나 호는 의박(意薄)이요, 자는 산만(散漫)인 강헌 자신의 귀책사유로 인해 세기말에 예언된 책들이 세기초에도 출간되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이번에 돌베개 출판사의 선의와 기획자 이현화씨의 열의가 강헌의 미필적 고의를 이겨냈다.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책을 낸다는 것에는 그 책을 직접 매만져 본 사람만이 겪는 숱한 고통이 있다.
그래서 반갑기는 한데 아쉽다. 일차적으로 저 일제 치하 박태원 이래 한국 문화사의 전통을 잇는 천상의 신성한 하이엔드 문어체와 저자거리의 질 낮은 비유와 어이없는 욕설이 난무하는 세속의 구어체가 교합하는 강헌 특유의 부산 사투리(강헌의 발음대로 들으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나 소니 롤린스는 부산 중구 남포동 사람 같다)가 ‘책’이라는 물질에는 제대로 살아 있기가, 아무래도 어렵다.
보다 중요한 점은 강헌이 천하의 구라요 장안의 이빨이지만, 실은 지독한 탐미주의자로, 한때는 열렬히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려 했던 문장가라는 점이다. 요컨대 그는 말도 잘 하지만 글을 훨씬 더 잘 쓴다. 그래서 그의 첫 책이 거침없이 써내려가되 어느 한 축이라도 흔들림 없는 문장의 책이 아니라 강의를 녹취한 것이라서, 아쉽다는 얘기다.
이렇게 쓰면서 나는 오래 전에 그가 주도했던 <계간 리뷰> 중에 아무거나 하나를 꺼내서 펼쳐본다. 1996년 여름호. 정태춘과의 대담이 특집이었고, 그의 빛나는 음반들을 움켜쥐듯 리뷰한 글들이 보인다. 인용해 본다.
정태춘의 1978년 데뷔 앨범 <시인의 마을> 대하여. “70년대 후반의 매너리즘 시대에 록밴드로는 산울림이 평지돌출적 존재였다면 텅 빈 모던 포크계의 유력한 싱어송라이터로서 평택 출신의 정태춘이 텅 비어 있는 권좌의 왕관을 쓴다. 미국 자유주의 문화의 흔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 통기타 문화의 독립 선언.”
1985년 앨범에 대하여. “수평적으로 길게 끌며 행간의 울림을 극대화하는 <북한강에서>의 첫 여덟 마디에서 드러나는, 앞의 마디를 물고 이어지는 음의 이 수평 계열화는 이후 그가 ‘민중의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될 때 가장 중요한 음악적 무기가 된다.”
1993년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대하여. “이 부부가 자유를 얻는 대가는 실정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모든 ‘운동권’이 방향을 전환하거나 급기야는 훼절을 서슴지 않을 때 그는 거리로, 법정으로 기꺼이 나섰다. 하지만 정작 이 노골적인 불법 음반에 담긴 노래는 너무나 아름답고도 너무나 슬픈 것이었다.”
다음 책은 제발 이번 생에 마무리하길
물론 이러한 강헌의 문장과 수사를 비약과 과장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출신 배경을 지나치게 평가하고 계보에 집착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일부 긍정하지만 글쎄, 막상 그런 의견을 제시한 사람들이 밥 딜런이나 존 콜트레인이나 에미넴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지극한 예의와 상찬 외에 달리 눈여겨 볼 만한 팩트와 해석이 무척이나 드물어서 오히려 놀라웠다.
오히려 정밀하게 듣거나 읽어보면 강헌이 주목했던 음악가들, 국내에 한정해 말한다 해도 저 일제시대의 윤심덕이나 홍난파, 박시춘, 김순남, 현제명, 안기영, 신중현, 조용필, 서태지 등에 대해 흡사 그들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나 주고받은 편지를 다 입수해 들여다 본 듯한 정밀한 사실의 탐색에 우선 놀라게 된다. 그저 막연하게 40년대 초반에 데뷔했다는 식이 아니라 1941년 9월, 그것도 왜 9월 중순이 아니라 초순, 심지어 목요일에 데뷔했는가에 대해 강헌 나름의 사실 확인과 팩트 해석이 종횡으로 가로지른다. 그러니까 강헌에게 바흐는 “바로크 시대의 독일 음악가로 18세기 중엽에 사망했다”는 식의 표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찌 됐는가. 유독 강헌만의 성과는 아니며 틀림없이 김창남, 이영미로부터 시작해 신현준, 임진모, 이동연, 이정엽, 장유정, 김필호, 김평수, 서정민갑, 이준희 등의 섬세하고도 꾸준한 연구와 함께 한 과정이었지만, 어쨌든 이러한 흐름 덕분에 우리의 대중음악이 ‘딴따라 가요’의 왜곡된 굴레와 콤플렉스를 벗어던지지 않았던가. 파편적으로 회고되던 대중음악의 일정한 흐름이 조성되고, 한두 곡의 인기곡으로 기억되던 인물들의 지난했던 예술적 모색이 재평가되지 않았던가.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저 일제 이후로 지금껏 막강한 권력을 누려온 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그들이 싸지르고 앉아서 뭉개고 있던 게으르고 낡고 천박한 음악문화에 거침없는 비판이, 열렬한 미적 욕망과 견실한 인문적 사유로 무장한 이들의 책과 강의실에서 비명처럼 울려퍼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강헌의 첫 책에 대한 서평으로 읽히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 마음으로 쓰지도 않았다. 나는 지극한 편애로 이 글을 쓰고 있으며, 동시에 강헌의 편벽과 편견이 더 일그러지고 기울어진 채로 항구적인 생명력을 안고 좀 더, 한 30년 정도만 더 항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글쎄, 나이가 들고 또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지레 포기하고 체념할 일이 많아져서 그런가. 이제 막 가갸거겨를 뗀 듯한 서푼어치 글줄에다가 네이버나 구글을 뒤적거리면 37초 만에 알 수 있는 허술한 정보들을 한 큰술 들이붓고는 비평이네 뭐네 하는 날림팔이 작자들이 온갖 미디어마다 횡행하는 세태를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다 싶어 아예 문을 닫아걸고 어떤 소실점을 정해두고 침잠해 버릴까 하던 참인데, 강헌의 첫 책 소식이 있어, 냉큼 사서, 읽었다. 이어질 다음 책들은 제발 이번 생애에 마무리하기를. 그러려면 한 30년쯤 걸릴 텐데, 이 책도 그만큼 기다렸는데, 까짓 별 일도 아니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