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시에 비친 장안성 ‘두 얼굴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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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시에 비친 장안성 ‘두 얼굴의 민낯’

입력 2015.07.07 11:33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두보의 이 절규는 장안의 민낯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장안,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도시였던 장안, 그곳은 완벽한 도시계획에 따라 세워졌다.

에이즈·조류독감·사스·신종플루·에볼라 그리고 메르스까지, 그야말로 바이러스 전성시대다. 원숭이·닭·사향고양이·돼지·과일박쥐·낙타가 진원지란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 동물들이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종도 아니고, 과학이 날로 발전하고 있는데 왜 이들이 내뿜는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이란 말인가? 무시무시하고도 엄중한 복수다. 생태계의 균형을 깨버린 인간을 향한 자연의 가차 없는 복수.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균형의 상실은 극한에 이르렀다. 인간이라는 종은 이토록 균형감각이 없는 한심한 족속이다. 이런 인간의 속성은 그 유래가 꽤나 오래됐고, 인이 박여서 떨쳐낼 수 없을 지경이다. 지금으로부터 1260년 전, 두보(杜甫)가 진저리쳤던 것도 ‘균형이 깨진 삶’ 때문이다. 천보(天寶) 14년(755) 시월, 두보는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던 아내와 자식을 만나기 위해 장안을 떠나 봉선현으로 향한다. 장안 동쪽의 여산(驪山) 기슭을 지나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화청궁(華淸宮). 이곳은 주(周)나라 이래로 역대 제왕들이 행궁을 짓고 온천욕을 즐기던 곳으로, 당 현종(玄宗) 때 대규모 확장공사를 하고 화청궁이라 칭했다. 화청지(華淸池)라는 명칭으로 더 익숙한 바로 그곳이다. 해마다 시월이 되면 현종은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겨울을 지냈다. 두보가 화청궁 근처를 지나갈 때, 마침 현종과 양귀비가 이곳에 와 있었다.

화청지 광장의 당 현종과 양귀비

화청지 광장의 당 현종과 양귀비

“부귀와 빈곤이 지척 사이에 다르다니”
화청지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올려다보던 두보의 귓가에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저기서 온천욕과 잔치 즐기는 이는 죄다 권세가들이고 평범한 백성은 한 명도 없을 테지.’ 순간 분노가 치솟는다. ‘저들이 하사받은 비단은 죄다 가난한 집 아낙네가 만든 것이고 그 아낙네 남편이 매 맞으며 강제로 빼앗긴 것 아닌가!’ 순간, 양귀비를 등에 업은 양씨 집안의 극에 달한 사치가 두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듣자하니 양씨 집안에서는 손님들에게 그 귀한 담비 가죽옷과 ‘낙타발굽 탕’을 대접한다고 한다.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부귀와 빈곤이 이렇게 지척 사이에 다르다니.”

극과 극의 두 세계 앞에서 두보는 슬프고 분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집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집 문에 막 들어선 그를 맞이하는 건 구슬픈 울음소리. 어린 아들이 굶어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아, 부끄럽다. 아비가 되어서 자식을 굶어 죽게 만들다니!”라는 자책이 절로 나온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어찌 감히 헤아릴 수 있으랴. 두보는 그나마 병역 면제에 세금도 내지 않는 혜택을 누렸음에도 이런 지경에 처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딱한 백성들의 처지를 떠올렸다. 생계를 잃은 이들, 멀리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 이들을 생각하니 산처럼 묵중한 근심걱정이 그를 짓누른다.

이상의 이야기는 두보의 시 ‘장안에서 봉선현으로 가는 길에서의 감회(自京赴奉先縣詠懷)’에 근거한 것이다. 두보가 실록과 같은 이 시를 쓴 다음 달, 안녹산(安祿山)이 장안으로 쳐들어왔고 현종은 피난길에 오른다.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 진동하는데, 길에는 얼어 죽은 뼈가 나뒹구는구나!” 두보의 이 절규는 장안의 민낯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장안,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도시였던 장안, 그곳은 완벽한 도시계획에 따라 세워졌다. 동서 9.7㎞, 남북 8.6㎞에 달하는 장안은 성 전체가 바둑판처럼 구획돼 있었다. 바둑판에 그어진 평행선처럼 동서남북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는데, 그 폭은 대부분 50~90m였다. 그 중에서도 남북 중심축에 뻗어 있는 주작대가(朱雀大街)의 폭은 150m나 됐다. 그리고 당 고종 때 세워진 대명궁(大明宮) 앞에 뻗어 있는 단봉대가(丹鳳大街)는 그 폭이 무려 180m에 달했다. 주작대가와 단봉대가, 그토록 넓은 길은 오로지 황제를 위한 것이었다. 황제의 행차에는 수많은 군사와 의장대가 동원됐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록에 따르면, 회창(會昌) 원년(841) 정월 8일에 그가 목도한 무종의 행차에는 무려 20만명이 황제를 수행했다. 황제가 아주 가끔 행차하는 용도로만 사용된 황제 전용도로는, 그야말로 공간의 독점이자 낭비였다. 무려 100만 인구가 살고 있던 곳이 아닌가!

다큐멘터리 에 나오는 단봉대가

다큐멘터리 <대명궁>에 나오는 단봉대가

높은 집값 때문에 집 없이 세 들어 사는 사람이 훨씬 많았던 장안, 물론 부와 신분에 따라 사는 곳도 달랐다. 궁전이 북쪽에 있었던 만큼 그 근처가 다들 선망의 대상이었고 인구밀도 역시 높았다. 남쪽으로 갈수록 인구밀도는 희박했다. 사람들이 가장 살기 꺼렸던 서남쪽 장수방(長壽坊)은 심지어 호랑이까지 출몰하는 곳이었다. 반면에 동북쪽에는 유력인사들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다. 입원방(入苑坊)과 승업방(勝業坊)에는 왕부(王府)가 들어서 있었고, 숭인방(崇仁坊)에는 공주의 저택이 밀집해 있었으며, 안인방(安仁坊)에는 왕실의 외척이 몰려 있었다. 익선방(翊善坊)과 내정방(來庭坊)은 고역사(高力士) 같은 환관들의 거주지였다.

부와 신분에 따라 사는 지역이 달라
장안성의 동쪽이 권세가들의 공간이라면, 서쪽은 상인들의 공간이었다. 중앙아시아·서아시아를 비롯해 신라·일본 등지에서 온 상인들이 서시(西市) 근처에 거주했다. 주작대가를 사이에 두고 동시(東市)와 서시 양대 시장이 각각 동서 양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권세가들이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던 만큼 동시가 주로 고관을 타깃으로 삼은 곳이었다면 서시는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그 옛날 서시가 있던 자리에 현재 성당(盛唐)문화와 실크로드문화를 콘셉트로 삼은 국제 문화산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금시(金市) 광장, 대당서시박물관, 실크로드 관련 중국·한국·일본 거리, 국제여행기념품 교역센터 등이 이미 조성됐고, 2016년이면 실크로드 관련 중앙아시아·서아시아·유럽 거리를 비롯한 모든 공정이 완공될 예정이다.

서시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역의 이국 문화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로 성황을 이뤘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온 페르시아 계통의 호희(胡姬)가 있는 술집은 장안 사내들의 혼을 빼놓았다. 대갓집 자제들이 호희를 보기 위해 백마 타고 서시로 내달렸다. 서역의 상품과 패션과 오락과 음악과 음식, 소위 호풍(胡風)이 장안을 휩쓸었다.

실크로드로 연결된 세계를 상징하는 조형물과 대당서시박물관.

실크로드로 연결된 세계를 상징하는 조형물과 대당서시박물관.

하지만 이 모든 향락은 오직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두보가 장안의 두 세계를 성토한 지 50여년 뒤, 백거이(白居易)는 장안에서 숯 파는 노인의 고단함을 ‘매탄옹(賣炭翁)’이라는 시에 담았다. 장안 종남산(終南山)에서 나무 베어 숯 굽는 노인, 재에 그을린 얼굴에 귀밑머리 희끗하고 손가락은 새카맣다. 입고 먹을 것 구하기 위해 숯을 내다팔려는 노인은 추운 날씨에도 얇은 옷차림이다. 그래도 혹여나 숯 값이 내릴까 봐 날씨가 춥기를 바란다. 밤사이 성 밖에는 눈이 엄청 쌓였다. 새벽에 숯 실은 수레를 몰고 시장으로 간다. 해는 중천에 떴고 허기에 지친 노인이 시장 남문 밖 진흙바닥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말 달리며 다가온다. 황색 옷 입은 남자가 손에 문서를 들고서 ‘칙령’이라 소리치더니 노인의 수레를 가져간다. 수레에 실린 숯이 천 근이 넘거늘, 그 남자가 노인에게 지불한 건 고작 붉은 천 반 필에 비단 열 장(丈)뿐. 어찌하랴, 궁궐에서 온 이를 상대로 이 노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장안 꽃시장을 찾은 다른 두 세계 사람
가난한 이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 절대적 빈곤 때문만은 아니다. 백거이의 ‘매화(買花, 꽃을 사다)’라는 시에는 장안의 꽃시장을 찾은, 전혀 다른 두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묘사돼 있다.

장안의 늦봄, 요란히 오가는 거마 분주하네.
다들 모란의 계절이라 하면서, 잇달아 모란꽃을 사가네.
(……)
한 시골 늙은 농부, 꽃 파는 곳에 우연히 왔다가
고개 숙이고 홀로 긴 탄식, 이 탄식 이해하는 사람 없어.
아름다운 꽃 한 다발 값이, 열 가구 세금이라니.

아무튼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보여주는 위대한 실천이 존재하기에 인류가 아직 가능한 것이리라. 당나라 때는 삼계교(三階敎)의 실천이 있었다. 삼계교의 창시자 신행(信行)의 제자인 신의(信義)는 장안 화도사(化度寺)에 무진장원(無盡藏院)을 설립했다. 조금이라도 나눌 것이 있는 사람은 복을 짓기 위해서 이곳을 찾아 보시했고, 굶주린 이는 쌀과 돈을 빌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담보나 증서 따위는 없었다. 언제가 됐든 갚을 수 있을 때 갚으면 그만이었다. 신의가 입적한 이후에도 삼계교의 교세는 날로 확장됐다. 기존 교단은 삼계교를 질투했고, 조정은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삼계교를 경계했다. 개원(開元) 원년(713), 마침내 현종이 화도사의 무진장원을 없애라는 칙령을 내린다. 그리고 개원 13년에 이르러서는 삼계교를 엄금한다. 삼계교는 모진 탄압을 받다가 결국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금도 인간이 사는 곳 어디나 두 세계가 존재한다. 지난 6월 9일, 구이저우(貴州) 성 비제(畢節) 시에서 5살·8살·9살·14살의 사남매가 농약을 마시고 이 세상과 이별했다. 14살짜리 큰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유서를 남겼다.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저한테 잘해주신 거 알아요. 하지만 저는 가야겠습니다. 계획한 지 오래됐어요. 저는 15살을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죽음은 저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아이들 부모는 외지로 돈 벌러 나간 농민공이다. 부모 없이 집에 남겨진 소위 유수(留守) 어린이가 무려 61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어린이가 죽음을 꿈꾸는 사회, 이미 죽은 사회다. G2가 되고 설령 G1이 된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남 이야기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청소년 자살률 세계 1위에 노인 자살률도 세계 1위다. 부패지수는 높고, 복지지출은 최하위다. 경제를 살리자는 구호 속에 묻혀진 것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진정 살려야 할 것은 상식과 양심이다. 정말 소망한다. 우리 삶의 균형을.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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