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 오페라를 감상하다 보면 파격적인 소재와 얼핏 저속해 보이는 가사와 애틋하게 울려퍼지는 불멸의 아리아가 내장한 뜨거운 온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우아하고 고상한’ 같은 표현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10주간에 걸친 클래식 강좌가 끝났다. 강의 중에는 질문 자체를 할 시간도 여유도 그 이유도 주지 않을 만큼 거세게 몰아붙이기 때문에, 그리고 강의 후에는 조금은 지치기도 하고 다른 약속으로 급히 이동하기도 해서 수강생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강의를 다 마친 다음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져봤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그랬다던가, 앙코르를 외치는 청중들에게 50분 가까이 되는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선사해서 다시는 앙코르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했다는. 나의 질문시간도 그리 됐다. 그동안 묵혀 뒀던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느라 20여분이 소요됐고, 결정적으로는 어떤 분의 순수하고 해맑은 질문 때문에 또 30여분이 더 소요됐다.
“저어, 클래식은 우아하고 고상한 예술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왜 선생님께서는….”
해맑은 표정의 질문자는 진실로 오랫동안 클래식을 ‘우아하고 고상’하게 들어온 듯했다. 그 순정한 기억들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결국 30여분에 걸친 내 대답은 질문자의 마음을 헝클어 놓았다. 우아하다고? 고상하다고? 그런 말 자체가 이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누가 왜 그런 말을 유포하는지, 그 말에 담긴 사회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강의시간이 예상보다 1시간이나 넘게 진행됐다. 아마도 다음부터는 질문을 하지 않겠지? 아무튼 대체로 아래와 같은 얘기다.
2011년,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공연된 '돈 조반니'의 한 장면 / salzburgerfestspiele.at
한국 예술계의 일그러진 오리엔탈리즘
오래 전에 성악가 임웅균씨가 방송에 나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그 분은 2006년 지방선거 때 국민중심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클래식에 대해서도 매우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클래식은 우아하고 교양 있고 정서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관점 말이다. 그 분 말씀하시기를, 자신도 록 음악을 좋아하는데 록 음악은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한 30분 정도 들으면 좋은데 그 이상 들으면 이상한 기운에 빠지게 되고 결국 정신이 망가지기 쉽다는, 그런 얘기다. 클래식은 둘째 치고, 일단 록 음악이 스트레스 해소용이라고? 30분 이상 들으면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이런 식의 무지하고 몽매한 소리들이 의외로 클래식 문화계에, 그것도 클래식 문화를 주도한다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들린다. 한국 사람들은 문화 수준이 낮고 정서도 천박한데 클래식 음악으로 이를 정화해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실은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는 둘째 치더라도, 해방 이후 한국 지식 예술계가 강렬하게 동경했던 유럽화 경향의 일그러진 오리엔탈리즘 말이다. 유럽에 대한 지극한 찬미, 유럽 예술에 대한 종교적 동경, 유럽의 문화예술을 준칙으로 삼아 한국의 교양과 그 생활문화를 단죄하는 거친 관점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다시 사태의 본질로 들어가서, 서양의 클래식 문화는 우아하고 고상한 것일까. 정신을 맑게 해주고 심성을 곱게 길러주는 것일까. 우선 맛보기로 셰익스피어 ‘햄릿’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광기에 사로잡힌 척하는 햄릿이 삼촌인 왕과 어머니인 왕비 앞에서 아름다운 오필리아에게 이런 대사를 한다.
햄릿 : 아가씨, 무릎 사이에 머리를 누이도록 허락해 주시겠소?
오필리아 : 아니 되옵니다. 왕자님.
햄릿 : 무릎 위에 말이오.
오필리아 : 그리하옵소서.
햄릿 : 그래. 내가 촌스러운 짓(음탕한 행동)을 뜻한 줄 알았소?
오필리아 :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햄릿 : 처녀의 무릎 사이에 눕는다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생각이오.
그런 후에 햄릿의 광기 어린 행동은 더욱 극렬해지고, 오필리아도 광기에 빠져든다. 나중에 버드나무 이파리와 쐐기풀, 데이지꽃과 야생난으로 화관을 만들어 꽂고는 개울에 몸을 던지게 되는 오필리아는 필멸의 광기에 휩싸여 결국 왕 앞에서 이런 노래까지 부른다.
“내일은 성 발렌타인의 날, 처녀인 나는 날이 새면 새벽같이 그대 창가에 서리. 그대의 발렌타인이 되기 위해. 그때 그는 일어나서 옷을 입었네. 방문 열고 그 처녀 맞아들였네. 그 처녀, 다시는 처녀 몸으로 그 문 나서지 못했네.”
자, 이제 클래식 쪽으로, 그 중에서도 미친 사랑의 이야기가 있고 애절한 아리아가 있는 오페라를 살펴보자.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있다. ‘라’는 여성을 뜻하는 정관사이고 ‘트라비아타’는 ‘길을 잘못 든’이란 뜻이다. ‘길을 벗어난 여자’, 즉 도덕적 파탄에 빠진 여자를 뜻한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은 비올레타 발레리. 극중 직업이 코르티잔(courtesan)이다. ‘코르티잔’이 뭐냐 하면 19세기 유럽 상류사회의 야회 때 남성이 동반해 파티에 참석하는 공인된 정부(情婦)를 말한다. 시서화에 능했던 동양의 기생이나 게이샤처럼 유럽의 코르티잔 역시 문학과 음악과 사교적 화술에 능했다고 하는데, 아무튼 ‘길을 벗어난’ 상태다. 그렇다고 이 오페라의 주제가 도덕적 파탄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고, 19세기식 낭만적 사랑의 절대적 순간과 비애를 그린 작품인데, 아무튼 19세기에 이르러 그 빛나는 절정에 도달한 유럽의 낭만주의 오페라 대부분이 이렇게 ‘길을 벗어난’ 소재를 바탕으로 한다. 애절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아리아도 부분적으로 그러하지만, 이야기 전개 과정에서 주고받는 수많은 노래들은 ‘우아하고 고상한’ 쪽하고는 거리가 멀다.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가 때로는 음탕하게 전개되고 연인의 몸에 대한 찬미가 대개는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실로 ‘19금’급인 파격적인 오페라 연출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예술이 도달해야 하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종교적 권력(교황)과 세속적 권력(절대 왕정)을 밀어낸 19세기 유럽 시민계급의 문화적 취향과 도덕적 불안이 이들 오페라에 담겨 있다. 이를 제대로 재현하고 또 감상하다 보면 ‘우아하고 고상한’ 세계보다는 서서히 몰락의 위기와 그 공포에 휩싸이게 되는 유럽 시민계급의 허위의식과 불안을 느끼게 된다. 1835년 초연된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1893년 초연된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에 이르기까지 이들 낭만주의 오페라는 ‘우아하고 고상한’ 19세기 시민계급의 심연을 뒤흔든다.
이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클래식이란 우아하고 고상한 거야’라고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파격적인 소재와 얼핏 저속해 보이는 가사와 애틋하게 울려퍼지는 불멸의 아리아가 내장한 뜨거운 온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우아하고 고상한’ 같은 표현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게다가 실제 오페라 연출은 얼마나 파격적인가. 1990년 이후, 유럽의 대표적인 오페라 공연들은 ‘우아하고 고상한’ 게 아니라 거의 반라의 차림으로 파격적인 연출을 선보이고 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주빈 메타의 <탄호이저> 서막 혹은 비너스가 탄호이저를 유혹하는 장면은 거의 ‘19금’이다. 리하르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알반 베르크의 ‘룰루’, 쇼스타코비치의 ‘므젠스크의 멕베스 부인’ 같은 20세기 작품은 시민계급의 폐부를 찌르는 작품 그 자체의 본질적 가치를 떠나서, 일단 잠옷 차림으로 무대를 채우는 의상과 연출 때문에라도 파격 그 자체다. 오페라 양식 초기의 걸작인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도 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해마다 펼쳐지는 공연이 파격에 파격을 더하는 양상이다. ‘우아하고 고상한’ 클래식 들려준답시고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는 눈을 가려야 할지도 모른다. 19세기 예술이 지향해야 할 본령에 도달한 불멸의 작품들 앞에서 눈을 가리고 듣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아하고 고상한’ 아리아 몇 곡 주워 듣고는 그게 클래식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그런 예술을 제대로 교육 받지도 못했고 경험하지도 못한 수많은 한국의 대중들 위에서 ‘우아하고 고상한’ 문화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저렴하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