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효리는 표절 논란에 빠졌을 때 그 자신도 피해자였지만, 결연하게 행동했다. 2년 만에 야심차게 준비하여 재개한 활동을 전격적으로 중단했다. 문학이라는 성채, 한국 문단이라는 그 드높은 권위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결연함이 아닐 수 없다.
클래식에도 표절작품이 있을까. 당연히 그렇다. 르네상스를 전후로 한 기나긴 종교음악의 시대에는 특정 예술가의 ‘고유한 창작품’이라는 개념 자체가 흐릿했다. 엄격한 종교 율법에 따라 엄수되는 미사의 규칙 안에서 창작이 이뤄졌다. 개별 작곡가가 고유한 창작의 자율성을 전개하기가 까다로웠다. 율법의 체계에서 벗어나면 이단의 파문까지 염려되었기에 가급적 작곡가들은 율법의 질서를 벗어나지 않고자 했다. 그래서 조금씩 닮아 있기도 하고 다른 이의 작품을 부분적으로 옮겨오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크게 비난한 예도 드물다.
이러한 사정은 바로크 시대까지도 이어졌다. 화려한 궁정 만찬을 상상해 보자.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궁정의 만찬이나 의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행위였다. 이 고도의 문화적 정치행위를 위하여 마부는 행렬을 준비하고, 요리사는 그날에 소용될 귀한 재료를 준비하고, 궁정음악가들은 만찬을 위한 음악들을 준비한다. 당연히 그날에 쓰이는 말들과 식재료와 음악은 군주의 것이다.
마부는 말에 대하여, 요리사는 식재료에 대하여, 그리고 음악가는 선율에 대하여 당대 최고의 식견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은 군주의 것이었다. 그러니 식전이나 식후에 그 각각의 것들에 대한 개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말은, 식자재는, 그리고 음악은 만찬과 의전을 통한 군주의 스펙터클 정치에 소용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전이 끝난 후 음악가의 작품은 개인의 서랍이 아니라 궁정의 문서고에 수납되었다. 이는 성당의 미사에서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작품들이 대개 후대의 음악학자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바흐 작품번호 ‘BWV.’, 헨델 작품번호 ‘HWV’, 비발디 작품번호 ‘Rv.’ 등이 그렇다.
전반적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작곡가들이 다른 이의 작품을 인용하거나 대놓고 도용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요즘같이 엄격한 표절 기준을 대입한다면 아마도 바흐나 헨델은 엄청난 도덕적 비난과 법적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61세가 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초상화. / 위키백과
바로크 시대, 표절은 관습적인 창작행위
바흐는 비발디의 많은 협주곡들을 편곡하여 자신의 작품에 산입해 넣었다. 파헬벨, 프레스코발디, 북스테후테 같은 음악가들도 바흐의 작품 목록에 상당히 ‘기여’했다. 바흐의 ‘네 대의 클라비어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A단조, BWV 1065’는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을 거의 옮겨 적은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전 작품을 편곡하여 숱하게 재활용하였는데,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의 많은 칸타타들은 대작 ‘마태 수난곡’이나 ‘요한 수난곡’의 일부분으로 재배열되고는 했다.
대편성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3주 만에 작곡했다는 헨델의 경우, 과연 그 3주가 순수한 창작의 순간인지 아니면 다른 이의 작품을 더러 인용하는 과정이었는지 의문시된다. 심지어 오페라 ‘무지오 스케볼라’의 경우 전체 3막 중 마지막 무대만 자신의 순수한 창작품이고 1막은 아마데이, 2막은 보논치니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경우다.
헨델의 대중적인 오페라 몇 편을 제외하고 보면, 그러나 이 바로크 시절의 표절이란 당대의 관습적인 창작행위였다. 서로가 서로의 작품을 일정하게 인용하면서 바로크라는 클래식 음악사의 기반을 다지던 시기였다. 이탈리아의 협주곡, 프랑스의 궁정음악, 독일의 건반음악 등이 서로를 배우고 흉내내면서 클래식이라는 거대한 지반을 다지던 때였다. 궁정의 위엄과 성당의 존엄과 세속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데 있어 필요한 선율과 악상이 있다면 기꺼이 빌려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곤 했는데, 그 표절 아닌 편곡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였다. 기존의 작품을 절묘하게 쓰다듬어서 보다 원숙하고 찬란한 광휘의 음악으로 바꾸는 것이 그 자체로 존중되는 시대였다.
표절의 개념은 ‘개인 예술가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모차르트가 그 경계에 있었다. 그 자신도 남의 작품을 몇 차례 옮겨 적기도 했지만, 어쨌든 모차르트는, 밀로스 포먼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에 잘 나타나 있듯이 ‘자기 작품’이라는 자의식이 강렬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콘스탄체와 사랑의 유희를 나누던 모차르트는 자기의 작품을 다른 이가 지휘하는 것을 듣고는 부리나케 달려간다.
이러한 자의식이 전면화된 것이 베토벤 시대다. 그는 스스로 작품번호를 기입하고 그 악보를 소중히 취급하고 일일이 작품료와 인세를 받았다. 이는 베토벤 개인의 강력한 내적 자의식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19세기, 즉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 예술가’의 탄생과 맞물린 것이다.
궁정시대의 후원제도 대신 산업도시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작품 발표를 해야 했던 소설가나 음악가에게 ‘자기 작품’이라는 개념은 예술적 의지의 표현이자 곧 지적재산권의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소설이나 악보를 발간하는 출판업자들 역시 개별 예술가들과 정확하게 지적재산 개념을 공유해야만 그들 모두의 ‘상품’이 갖는 시장의 환금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현실적인 의미의 ‘표절’ 개념이 등장한다. 이때부터 표절은, 명백한 인용인 아닌, 표절은 범죄로 굳어졌다.
베토벤 시대부터 표절은 인용 아닌 범죄
따라서 표절 시비에 휘말릴 때마다 몇몇 당사자들이 ‘지상에 새로운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면서, 표절이 아니라 부분적 인용이나 변용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예술적 ‘패러디’이며, 이는 또 하나의 창작행위라고 항변하는데, 소가 웃을 일이다. 예술사에 무지하거나 그 자신의 치명적인 결함, 즉 창작 능력의 결여를 숨기려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고도의 원본성과 엄격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문학 쪽에서 이런 궤변이 횡행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문학의 ‘죽음’을 보여준다.
“표절사건이 터졌을 때, 모든 것을 다 잃을 것 같고 너무 억울해서 매일 술로 지새웠다. 결국 정신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았다. 질의응답, 행동 관찰, 그림 상담 등을 받았다. 정신과 검진 후 내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됐다.”
이효리의 말이다. 2013년 7월 2일 SBS의 ‘화신-마음을 지배하는 자’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기까지 3년이 걸렸다. 2010년 4월에 발표한 4집 ‘H-LOGIC’의 수록곡 중 무려 6곡이 표절로 판명된 일을 겪었다. 작곡가 이재영(예명 바누스 바큠)이 외국의 곡들을 무단으로 도용하여 버젓이 자신의 것인 양 속여서 이효리 측에 제공했던 일이다. 이 사건으로 이재영은 구속까지 됐다.
이효리는 표절 도용 과정과 전혀 무관했으므로 그 자신도 피해자였지만, 결연하게 행동했다. 2년 만에 야심차게 준비하여 재개한 활동을 전격적으로 중단했다.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에 활동을 중단했다”고 이효리는 말했다. “성공에 대한 유혹과 부담 때문에 꼼꼼히 살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술에 의지하다가 결국 정신과 상담을 받는 고통을 겪었다. 그런 후에 오늘의 이효리가 되었다. 문학이라는 성채, 한국 문단이라는 그 드높은 권위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찾아보기 어려운 결연함이 아닐 수 없다.
대중연예인은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에게 노출되어 대중에 의하여 사랑받고 또 대중에 의하여 심판받는다. 음표 몇 개만 엇비슷해도 당장 퇴출의 도마 위에 오른다. 반면 고고한 성채에 다를 바 없는 문학은 명백한 베껴쓰기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권위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고립되고 있다. 한국문학의 비애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