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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숫자다. 메르스 슈퍼전염자 번호다. 한 인격을 숫자로 지목하고 있다. 메르스 사태는 우리 세상을 숫자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메르스 사태가 아니라도 우리는 숫자와 함께 살고 있다. 50대인 필자가 처음으로 나간 최근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도 그것을 실감했다. 이날 최대의 화두는 ‘평등’이었다. 사회의 핵심 세대답게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거창한 담론을 나눴다고 생각하면 큰 착오다. ‘나는 몇 평에 산다’, ‘00네 아이는 전교에서 몇 등을 한대’와 같은 얘기였다. ‘평등’은 ‘평수’와 ‘등수’를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다. ‘평등’으로 한 인생은 간단하게 규정된다. 평수는 한 사람의 성공 여부를 짐작하는 단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등수는 자식의 미래가치를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이다.
숫자는 이미 계급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굳이 한국만의 얘기는 아니다. 미국이 대표적인 나라다.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의 우편번호(zip code)를 알면 그가 어느 도시, 어느 동네에 살며 연간 소득은 얼마나 될지, 가격이 어느 정도 되는 집에 사는지를 대충은 알 수 있다. 어떤 지역을 숫자로 특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우편번호를 토대로 연간 소득과 집값 등을 분류해 놓은 정보도 넘쳐나고 있다. 이를테면 33109는 미국 제1의 부촌인 플로리다주 피셔 아일랜드에 사는 사람의 우편번호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의 연간 소득은 평균 15억원(2014년 말 기준) 정도다. 우편번호 06831을 쓰는 사람은 미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동네인 코네티컷주 페어필드카운티의 그리니치 마을에서 사는 사람이다. 반대로 10030은 맨해튼의 우범지대인 할렘가다. 이 같이 유명한 곳의 우편번호는 미국 사람이라면 거의 안다고 한다. 이런 기초지식이 없다면 미국 CW방송의 <90210>이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90210은 미국 부촌의 대명사인 베벌리힐스다.
한 집배원이 오는 8월 1일부터 바뀌는 우편번호를 한 주택의 주소지판에 붙이고 있다. | 우정사업본부 제공
미국의 우편번호 체계가 ‘숫자 계급’이 되는 문화를 강화시킨 배경이다. 90210에서 보듯이 미국 우편번호는 다섯 자리 체계로 되어 있다. 첫 자리는 몇 개씩 그룹을 지은 주의 고유번호다. 두세 번째 자리는 주 그룹 내의 도시들을 의미한다. 나머지 두 자리는 지역 안의 수취인 주소를 뜻한다.
오는 8월 1일부터 우리의 우편번호 체계도 미국을 따른다. 미국처럼 다섯 자리로 변경되고 체계도 똑같아진다는 얘기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기초구역제도 도입에 따른 것이다. 국가기초구역제도란 전국 230개의 시·군·구 대상 지역을 읍·면·동의 면적보다 작게 일정한 경계를 정하여 구역번호를 부여하는 제도다, 우편구역·통계·학교구역(학군)·경찰·소방 등이 각종 구역의 기본 단위로 활용된다. 전국을 공공기관이 설정하는 각종 구역의 기본이 되도록 최소 단위로 나누기 위해 변동성이 적은 도로, 철도, 하천 등 지형지물을 기준으로 행정경계를 고려하여 기초구역이 설정된다. 읍·면·동별로 8~14개로 나누는 등 전국에 3만5000여개의 기초구역을 설정하고 설정된 기초구역에 5자리 구역번호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강남구의 기초구역번호는 06000~06371이라는 것이다.
시민에 대한 편의 제공과 행정능률 제고를 위해 미국 시스템을 원용한 우편번호 체계를 도입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미국과 같은 ‘계급적 사고’까지 배워서는 안 된다. 번호는 그저 번호로서 그 임무를 다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