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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사회가 무섭고 두려운 이유

입력 2015.04.14 10:27

노년층 복지를 주장하는 자를 대표로 뽑으면 그는 소득세 증세해서 현재의 청년층에게 돈 거둬서(또는 돈 안 거둬도 빚내서 미래의 청년층에게 부담 지우면서) 노년층을 위해 복지 지출을 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노령사회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노령사회의 도래를 인식하는 것과 그 정치·경제적 함의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 이 문제의 거대한 차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역사상, 혹은 심지어 인류 역사상 지속적으로 노령인구가 청년인구를 압도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령사회는 인류가 한 번도 진지하게 그 함의를 고민해본 적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식은 어쩌면, 혹은 아마도 우리가 살아온 세상의 상식과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다.

상식이 비상식이 되는 극단적 사례 중 하나로 민주주의의 효능을 들 수 있다. 우리는 건국 이후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한 것도, 박정희의 유신에 맞선 것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이명박 정부에 맞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외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민주주의여, 만세”는 우리가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던 이 시대의 상식이다.

지난 2012년 대선은 정치적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노령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충북 제천 유세장에 모인 시민들. / 박민규 기자

지난 2012년 대선은 정치적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노령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사진은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충북 제천 유세장에 모인 시민들. / 박민규 기자

세상의 상식과 완전히 다를 수도
시민혁명을 통해 근대적 민주주의를 인류사에 도입했던 서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들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보다 더 많은 피와 땀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왕정과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국민에게 주권을 돌려주려는 생각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반체제적’ 생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유럽의 많은 국가에는 공식적으로 공산당과 사회당이 있으나 이들조차도 국민주권주의에 근거한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국민(일부 사람들은 영어의 people을 ‘인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를 ‘민중’과 동일시하지만, 이런 말들이 이 글의 지향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냥 국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하자)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자는 링컨의 말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던 말이다. 그래서 국민주권이 나오고 대의정치가 나오고 복지국가가 나왔다고 배웠다. 선거에 의해 국가지도자를 뽑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게 ‘피치자(被治者)의 동의(同意)’라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이고, 복지정책을 위해 세금을 내는 것은 일등국가로 향하는 증표처럼 생각해 왔다.

과연 그런가. 조금 더 정확히 묻자면 과연 노령사회에서도 그런가.

이게 그리 간단치 않다. 왜냐하면 한 국가 내에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청년층과 노년층이다. 이 두 집단은 서로 매우 다르다.

청년층은 생산활동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기른다. 그들은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생산활동에 따른 소득이 있고, 앞으로 오랫동안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 소득을 다 써버리지 않고 일부를 저축한다. 그들은 또한 특정 정책에 대한 호불호를 표현할 때 그것이 미칠 장기적 영향에 대해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새털처럼 많기 때문에. 이들에게 실업과 인플레이션 중 더 고통스러운 것을 고르라고 물으면 백이면 백 실업의 고통을 호소한다.

노년층이 국가 의사결정 주도권 잡아
노년층은 더 이상 본격적인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심지어는 경제통계에서도 65세 이상의 인구는 생산가능인구로 보지 않는다. 이들은 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가진 것은 꽤 많을 수 있다. 과거 저축의 결과로 집도 있고 약간의 금융자산도 가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자산을 마치 ‘곶감 빼먹듯이’ 조금씩 헐어가며 생활한다. 소득이 없는데 소비를 하므로 음(-)의 저축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설계하는 문제에는 이제 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당장의 복지혜택 확대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이들에게 고용확대 정책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자신들이 새로 고용될 가능성은 희박하므로.

노령사회는 이 두 집단 중 노년층의 비중이 일정 기준을 넘어서서 국가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사회를 말한다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난 2012년 대선을 떠올려 보면 된다. 지난 대선은 정치적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노령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다. 앞으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인구 통계는 그 위력(?)을 소리 없는 웅변으로 보여준다. 세계 각국의 선거권 연령을 편의상 18세로 간주하고, 18세 이상 유권자 중 5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을 계산해 보면 노령사회의 도래를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은 지난 2002년에 이미 이 비중이 50%를 넘어섰고, 프랑스 역시 2014년에 50%를 돌파했다. 우리나라는 2022년이면 이 수준에 도달한다. 중국, 미국, 호주 역시 대략 2035년쯤이면 이 수준에 도달한다.

이 통계는 만일 연령간의 균열로 대통령선거의 구도가 결정될 경우 다음 대선은 젊은 층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총선과 달리 대선은 그야말로 ‘머릿수 전쟁’인데 노년층의 투표 참가율을 따라갈 수 없는 청년층은 2017년 선거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무상급식은 가장 나쁜 복지정책”이며 “노인 부양만이 진정한 복지”라는 정치인들의 수사학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투표는 곧 돈’이다. 이를 통해 노년층 복지를 주장하는 자를 대표로 뽑으면 그는 소득세를 증세해서 현재의 청년층에게 돈 거둬서(또는 돈 안 거둬도 빚내서 미래의 청년층에게 부담 지우면서) 노년층을 위해 복지지출을 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백년대계엔 아랑곳하지 않고 이것만 잘할 수 있다고 외친다면 대표가 될 수 있으니, 이런 일에 앞장서고 싶은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민주주의는 집합적 의미의 국민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기는 제도이다. 여기에는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국민들이 매우 동질적이거나, 혹은 이질적이더라도 그 경향성이 특별히 갈리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볼 때 자잘한 이질성은 상쇄되고 공통의 일반적 의사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노령사회는 바로 이 믿음의 근저를 뒤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무섭고 생소한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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