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시계 브랜드 중 일곱 번째로 긴 역사를 자랑하는 보메 메르시에(Baume & Mercier)는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세계적으로 두터운 고객층을 자랑한다. 이들의 대표 컬렉션은 세월을 초월한 듯한 클래식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 번 고객이 된 사람이 다시 찾고 그 자녀 세대들이 성장하면 또 찾게 되는 그런 브랜드라 할 수 있다. 요란하게 광고를 하거나 브랜드 이미지를 애써 만들려고 하지 않아도 보메 메르시에 고객들의 충성도는 매우 높다. 이는 브랜드를 향해 쌓여진 오랜 신뢰와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성 및 철학에 공감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현 보메 메르시에를 대표하는 양대 클래식 컬렉션인 클래시마(Classima)와 클립튼(Clifton)을 소개한다.
스위스 시계 지켜온 터줏대감 브랜드
1830년 스위스 쥐라 산맥 자락의 레 부아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루이-빅토르 보메와 셀레스틴 보메 두 형제 시계 제작자에 의해 탄생한 보메 메르시에는 창립 이래 ‘오직 완벽함만을 추구하며 최상의 기술력으로 가장 뛰어난 품질의 시계만을 제조한다’를 모토로 고급 회중시계 제조사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영국 런던에 ‘보메 브라더스’라는 이름의 새 지점을 열면서 유럽은 물론 인도,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에까지 진출할 정도로 빠르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876년에는 두 창립자의 아들인 아서 보메와 알시드 보메가 가업을 계승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이어 멀게는 미국 필라델피아에까지 지점을 열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레피네 타입의 회중시계를 주로 선보였던 보메 브라더스의 성공비결은 얇고 우아한 특유의 디자인과 기술적인 완벽함 덕분이었다. 이들은 1878년 파리 국제박람회에 처음으로 시계를 출품해 우승을 거머쥔 이래, 1880년과 1895년 각각 호주 멜버른 국제박람회, 1883년에는 취리히와 암스테르담 국제박람회, 1885년과 1890년엔 런던 국제박람회, 1893년엔 시카고 국제박람회 등에서 총 10번의 그랑프리와 7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을 만큼 당시 제조사들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1892년 런던의 큐 천문대가 주관한 크로노미터 경진대회에 출품한 투르비용 기능의 회중시계는 100점 만점에 91.9점으로 역대 최고점을 획득했는데, 향후 10년간 아무도 이 기록을 깨지 못했다.
순백의 다이얼이 특징인 클래시마 2015년 신제품.
이후 1918년 보메 가문의 3대손 윌리엄 보메가 프랑스계 사업가인 폴 메르시에를 만나면서 두 사람의 각 성을 따서 ‘보메 메르시에’라는 현 회사명이 탄생하게 된다. 뛰어난 시계 제작자였던 윌리엄 보메는 시계 제조에 관련된 업무를 총괄했고, 1919년 그가 개발한 회중시계는 스위스산 최고급 시계의 품질을 보증하는 제네바 인증을 받기도 했다. 반면 폴 메르시에는 능란한 사업수단을 발휘해 아시아와 북미권에서 보메 메르시에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후 1940년대에는 아르데코 사조의 유행을 반영해 직사각형 케이스의 시계들을 연달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52년에는 르 브라쉬스 지방의 유서 깊은 매뉴팩처인 C H 메일란을 인수함으로써 중고급 크로노그래프 시계 제조에 특화된 생산시설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보메 메르시에는 1950~1960년대에 이미 다채로운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를 발표해 업계를 주도했다. 1964년에는 그리스어 ‘파이’ 형태를 브랜드의 엠블럼으로 채택함으로써 보다 쉽게 보메 메르시에의 시계임을 알리는 로고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후 1970년대 쿼츠 위기로 시계업계 전반이 침체기에 접어들자 보메 메르시에는 남성용 기계식 시계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마퀴즈, 갤럭시에, 스타더스트 같은 전위적인 디자인의 다채로운 여성용 컬렉션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 또한 1971년에는 트로노소닉이라는 전자식 진동자를 갖춘 독특한 쿼츠 모델을 선보여 시대의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1988년에는 피아제와 함께 세계적인 럭셔리 그룹인 리치몬트(구 방돔) 그룹에 합류함으로써 고급시계 제조사로서 재도약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후 1994년 사각 케이스 시계인 햄튼을 론칭하고, 1997년 마침내 남성을 위한 정통 클래식 드레스 워치인 클래시마를 출시하기에 이른다.
클래시마는 1960년대에 발표한 자사의 얇고 단정한 디자인의 손목시계에서 직접적으로 착안해 탄생했다. 당시 화이트 골드 케이스에 마이크로 로터가 달린 얇은 두께의 자동 무브먼트를 탑재한 슬림 시계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고스란히 클래시마를 형성하는 DNA가 되었다. 곧게 뻗은 러그와 순백의 다이얼이 특징적인 클래시마 라인의 시계들은 한편으로는 정제된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반영하고 있어 세대를 뛰어넘어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다. 시계의 가장 순수하고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완벽하게 가공된 케이스와 스위스 메이드 무브먼트를 사용함으로써 대를 물려 착용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클래식 시계를 완성한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결합한 듯한 클립튼 2015년 신제품.
국내서도 예물용 시계로 최고의 인기
클래시마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어 보메 메르시에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클래시마는 출시 이래 외형적으로 크게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이어져 현재까지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너처 라인으로 자리 잡았다. 클래시마는 보수적인 취향을 갖고 있는 아시아 국가들,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예물용 시계로 10년 넘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SIHH(국제 고급시계 박람회)에서 보메 메르시에는 오직 남성들만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클립튼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출시한다. 클립튼은 시계산업의 황금기였던 1950년대에 선보인 자사의 한 시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결합한 듯 예스러우면서도 모던한 디자인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1년여 만에 기본적인 타임온리 수동 모델에서부터 날짜 기능을 추가한 다양한 다이얼 색상의 자동 모델, 날짜와 요일, 월, 문페이즈까지 모두 표시하는 풀캘린더 모델, 세계의 타임존을 동시에 보여주는 월드타이머 모델, 자동 크로노그래프 모델, 투르비용 모델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능의 시계들을 그야말로 쏟아낸다. 정제된 디자인과 케이스 형태를 갖는 클래시마 라인에서는 다소 제약을 받았던 기술적인 대담함을 클립튼 라인에서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된 결과다. 아무리 복잡한 기능도 특유의 깔끔한 디자인으로 녹여낸 클립튼의 장점은 젊은 남성 고객층에게 제대로 적중했다.
클립튼의 성공에 고무된 보메 메르시에는 2014년 말 홍콩에서 열린 워치스앤원더스에서도 레트로그레이드 형태로 날짜가 움직이고 편리한 파워리저브 인디케이터와 요일 표시 기능을 더한 클립튼 신제품을 비롯해, 같은 리치몬트 산하의 IWC에서 공급받은 8일간 파워리저브 성능의 고급 수동 칼리버를 탑재한 로즈 골드 케이스의 185개 한정판 모델까지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올해가 바로 185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보메 메르시에는 창립 이래 단절된 역사 없이 굳건히 스위스 시계산업을 지켜온 터줏대감과도 같은 브랜드다. 과시하지 않는 절제된 가치를 지닌 시계를 제작하면서 합리적인 가격대로 세대를 뛰어넘어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들의 대표 컬렉션인 클래시마와 클립튼은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진정한 클래식의 표본과도 같다.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