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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는 떨어졌다는데 왜 살 게 없죠?

입력 2015.03.09 18:30

체감물가 높은 디스인플레이션에 기업들 임금동결 태세… 가계는 ‘이중고’

“물가가 떨어지긴 뭐가 떨어져요. 죄다 오른 것밖에 없는데. 5만원짜리 들고 가도 별로 살 게 없어요.”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대형 할인마트에서 만난 맞벌이 주부 류지연씨(36)는 시장바구니를 들어보이며 역정을 냈다. 저녁찬으로 갈치와 약간의 돼지고기를 집었더니 5만원짜리 한 장이 그냥 날아갔다. 그는 “자주 찾는 여의도의 한 식당에는 대구탕 가격이 또 1000원 올랐더라”며 “올 6월 2년 전세가 만기되는데 주변에 5000만원 이상 오른 집이 많아 벌써부터 걱정”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은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5%라고 밝혔다. 지난해 말 오른 담뱃값 인상분을 제외하면 마이너스 0.1%다. 물가상승률은 3달 연속 0%대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기름값을 제외하면 물가가 떨어졌다고 체감하는 소비자는 별로 없다. 정부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근원물가는 2%대로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속 경기침체)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근원물가란 일시적인 외부 충격으로 인해 물가 변동이 생기는 품목을 제외하고 본 물가를 말한다. 장마나 가뭄으로 인해 가격변동폭이 큰 농산물과 중동의 상황 등에 따라 가격이 널뛰는 석유류가 제외된다. 근원물가가 높다는 얘기는 사회 전반적인 물가가 높다는 말이다.

품목별로 봐도 이런 현상은 뚜렷하다. 1월 소비자물가를 보면 식료품·비주류음료는 0.7% 올랐다. 의류 및 신발(1.8%), 가정용품 및 가사서비스(2.8%), 교육(1.7%), 음식 및 숙박(1.6%), 보건(1.2%) 등도 줄줄이 올랐다. ‘주류 및 담배’는 담뱃값 인상으로 49.6%나 올랐다. 떨어진 것은 교통(-11.1%), 통신(-0.1%) 정도다.

지난 2월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지난 2월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디플레이션보다 고통스러울 수 있어
특히 돼지고기(9.2%)와 국산 쇠고기(6.4%) 등 육류가 많이 올랐다. 중학생 학원비(3.0%), 고등학생 학원비(3.4%) 등 사교육비도 올랐고, 운동복(9.5%)도 인상폭이 컸다. 핸드백(14.1%), 가방(16.5%) 등 두 자릿수로 오른 품목도 있다. 생활필수품은 대체적으로 올랐다는 얘기다. 떨어진 품목은 휘발유(-23.5%), LPG 자동차용(-27.7%), 도시가스(-6.1%) 등 에너지 관련 품목이 주도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규정한 현 물가상황은 ‘디스인플레이션’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디스인플레이션이란 물가상승률은 플러스지만 상승률이 둔화되는 것을 말한다. 물가가 일정기간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과는 다르다. 같은 물가 하락 상황을 ‘디플레이션’과 ‘디스인플레이션’으로 민감하게 규정하는 것은 둘에 대한 경기의 반응이 그만큼 차이 나기 때문이다.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 되면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지 않는다. 물건 가격이 내일 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물건 사는 것을 뒤로 미룬다.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해 물건을 생산해도 잘 안 팔리니 경영이 나빠진다. 경영이 나빠지면 임금을 깎게 되고 고용도 줄인다. 빚이 있는 채무자의 경우는 투자를 해 이익을 남기기 힘들기 때문에 점점 상황이 나빠진다. 경기 악순환이 계속되는 셈이다. 반면 디스인플레이션은 물가가 꺾이기는 해도 물가 상승 기조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으로는 가지 않는다. 링거를 맞아야 하는 디플레이션에 비해 디스인플레이션은 보양식을 먹고 나면 체력이 다시 회복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디스인플레이션 상태가 지속되면 가계는 디플레이션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디플레이션이 오면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내릴 수 있지만 디스인플레이션이라면 마땅한 처방전이 없다. 당장 문제가 임금 하락이다. 통상 노사의 임금협상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기준이 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라면 ‘3%+α’에서 결정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낮으면 임금도 낮아지는 구조다. 전체 물가지표는 낮지만 체감물가는 높은 디스인플레이션 상태에서는 생필품 값은 오르는데 임금만 깎이는 ‘이중고’를 겪을 우려가 있다.

물가는 떨어졌다는데 왜 살 게 없죠?

최 부총리, 최저임금 7% 인상 예고
실제 기업들은 1%대 임금인상안을 들고 나왔다. 경영자총협회(경총)는 올해 임금상승률 가이드라인으로 1.6%를 제시했다. 지난해 물가상승률 1.3%를 고려한 수치로 사실상 임금 동결이다. 한국노총이 제안한 7.8%와는 거리가 크다. 기업들은 “지난해 경기가 좋지 않아 임금인상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등은 임금 동결을 선언했다. 하지만 노조 측은 “체감물가는 많이 올랐기 때문에 충분한 보전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올해 임단협이 만만찮아 보인다.

여기에 정부의 걱정이 있다. 실제 물가는 높은데 임금인상은 이에 따르지 못하면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 진짜 디플레이션으로 갈 수 있다. 최경환 부총리가 “올해 최저임금을 지난해 수준으로 올리겠다”며 연 7% 상승을 예고한 것은 이 때문이다. 최 부총리는 “지난해 공무원의 임금을 3.9% 올렸는데 이는 물가상승률(1.9%)의 두 배였다”며 “민간기업도 임금을 이 정도는 올려달라는 시그널을 준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은 좋지 않다. 저물가가 글로벌 현상이 되면서 소비심리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면 미국(-0.1%)을 비롯, 독일(-0.5%), 프랑스(-0.4%) 등 주요 선진국들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유럽연합(EU) 28개국은 지난해 12월에 이어 1월에도 ‘마이너스 물가’를 이어갔다. 매년 7% 이상 경제성장을 하는 중국도 물가상승률은 0.8%에 그쳤다. LG경제연구원 자료를 보면 물가상승률이 1%보다 낮으면서 디스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진 선진국은 33개 국가 중 82%인 27개국에 달한다. 또 개도국도 68개국 중 28%인 19개국이 저물가 상태였다. 수출 주도의 한국 기업들로서는 수익을 남기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기업들이 “임금인상을 억제하자”로 나올 가능성이 큰 이유다.

하지만 현 디스인플레이션 상태가 하반기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저물가를 주도해온 유가의 움직임으로 볼 때 올 상반기 물가가 가장 낮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배럴당 40달러 후반까지 떨어졌던 국제유가는 최근 60달러 선을 회복하고 있다. 때문에 기업들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바탕으로 직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소비침체를 더 가속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임금은 물가상승률에 일방적으로 연동하기보다 생산성이 얼마나 향상됐느냐 여부를 반영해 책정해야 한다”며 “생산비가 하락해 발생하는 완만한 물가 하락은 경제에 주는 부담이 적은 만큼 현 경제상황은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지켜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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