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종편에서 공중파까지 온갖 시사프로가 난무하고 시사평론가, 혹은 정치평론가들도 지나치게 많다. 정치학 교수, 변호사, 심리학자, 전직 정치인 등이 주로 활동하는 정치평론가 가운데 눈길을 끄는 사람이 있다. 이영작 박사다.
지난 대선에서 한결같이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예측해 화제가 됐던 그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이즈음의 정치 상황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일부 종편의 우렁찬 목소리의 앵커보다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훨씬 더 귀를 잡는다. 알고 보니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조카로 ‘준비된 대통령’이란 슬로건을 만들었고, KT의 ‘Let’s KT’란 캠페인을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지자체 선거만큼 뜨거운 7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이 박사를 만났다.
정치평론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저는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평론가도 아닙니다. 정치학 관련 책도 본 적이 없어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공학도이고, 미국에서는 통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까지 미국국립보건원(NIH)에서 임상실험기획과 설계관리 담당자로 일했습니다. 90년대에 미국에서 큰 이슈가 됐던 소아신경질환 치료제인 페노바르비탈(Phenobarvital)의 임상실험, 성장호르몬제, 부인과 질환 치료제, 암과 신경계 질환 치료제 등의 수많은 미국 임상실험을 기획하고 설계했습니다. 지금도 ‘LSK Global’이라는 의학과 제약 관련 임상실험을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직원 5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150여명입니다. 신약개발 등을 하는 이 일만 하기도 벅찬데 어쩌다 정치평론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97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라는 부제의 <대통령 선거전략 보고서>란 책까지 냈을 만큼 정치에 깊이 관계하지 않았나요. 지난 이명박 대통령 선거 때도 도움을 주는 등 한국에서 드문 선거전략가로 알고 있습니다.
“1983년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할 때 이모부인 그 분의 일을 돕게 됐죠. 제 전공이 통계학이어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민심이나 국민의 요구를 전해드리는 정도였습니다. <대통령 선거전략 보고서>를 출간했던 2001년을 빼고는 정치 전면에 등장한 적이 없어요. 그 후 한양대 석좌교수와 한·미문화재단 이사장 등으로 일하다가 우연히 시사프로에 출연한 것이 정치평론가나 선거전략가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선거전략 전문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준비된 대통령’은 가장 기억에 남는 슬로건이고, 이번에 박 대통령도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강조했는데요.
“그 말은 김대중 대통령이 ‘내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40년을 준비했다’는 말씀을 수시로 하기에 활용한 것입니다. 선거에서는 긍정 캠페인과 비방 캠페인, 즉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캠페인이 있습니다. 포지티브 캠페인은 ‘왜 내가 당선되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김대중 후보는 ‘정권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정권 창출’이란 말로 이념이 다른 층의 불안을 해소했죠.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란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정작 주인공인 문 후보의 강점과 능력은 표현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다른 선거와 달리 대선은 정책이나 정당보다 인물 대결입니다.”
그럼 왜 1992년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패했나요.
“당시 김대중 후보는 ‘평화통일’을 강조했는데 그 분이 좌파, 심지어 빨갱이로 분류되니 긍정적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인 김영삼 대통령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리지 못한다’며 항상 조깅을 즐기는 자신의 건강함을 강조하면서 고문과 사고로 다리를 절고 건강해 보이지 않는 DJ를 은근히 부정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네거티브 전략을 짜면 ‘YS는 머리가 나쁘다’란 것을 강조해야 하는데, 당시 어떤 정치인도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어요. 뿌리는 다 비슷했거든요. 그래서 대선 후에 DJ 측은 정치보복을 별로 당하지 않았지만,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에 참여해 YS를 강하게 비판한 이들은 혹독하게 당했죠. 1997년에는 김종필씨와의 연합도 주효했지만 이회창 후보와의 대결을 대쪽과 경제살리기로 밀어붙인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대쪽 같은 이미지에 참신한 후보였지만, IMF 상황의 국가를 구하는 데는 경륜이 있는 준비된 대통령을 선택하는 게 당연하죠.”
다들 네거티브 전략을 펼치지만 때론 그게 거부감을 주기도 합니다.
“네거티브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상대 후보를 공격할 때는 항상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언어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되 내용은 신랄하게, 말하자면 쇠몽둥이를 솜으로 싸서 때려야 합니다. 그러면 맞을 때는 모르지만 한참 지나면 커다란 효과가 납니다.”
통계학이 결국 여론조사일 텐데 그걸 바탕으로 선거전략을 짜거나 선거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얼마나 정확합니까.
“세상은 변해도 여론조사는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예측한 것 역시 꾸준히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투표율이 70% 이상이면 젊은층의 지지를 얻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다는 분석도 많았는데, 6개월 이상 여론조사를 보니 대부분 꾸준히 박 후보가 앞서 있었고 투표율이 높아지는 것은 꼭 젊은층의 참여만 늘기 때문은 아니거든요. 이번에도 50~60대 이상이 놀라울 만큼 많이 투표하지 않았습니까. 여론조사는 모집단이나 방식도 중요합니다. 비용과 시간을 투자해 설문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표본을 실제 인구비와 유사하게 포집하는 등 제대로 된 여론조사를 해야 하고, 상대편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슬로건 하나를 만드는 데도 숱한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해 반영합니다. ‘준비된 대통령’이란 슬로건도 6개월 이상 논의를 거쳐 완성했습니다.”
그래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예측이 빗나갔던데요.
“미국 펠 박사의 법칙이 역으로 작용한 것을 제가 간과했습니다. 펠 박사의 법칙이란 ‘이유 없이 미운 사람은 어떤 훌륭한 정책을 제시해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인데, 노 대통령의 경우엔 당시 민주당에서 이인제 후보보다 더 당내 조직력이 강한 편이었고, 무엇보다 ‘이유 없이 좋다’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게 시대의 흐름이고 민심이라고는 하지만,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와 대결하면 이회창이 진다는 조사가 나온 후 민주당 대의원과 당원들의 지지가 노 후보 쪽으로 쏠린 이유도 큽니다.”
한 방송에서 정치는 결국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치는 의리가 없습니다. 주머니, 즉 경제가 항상 옳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도 카터나 아버지 부시 등 재선에 실패한 대통령들은 모두 당시 경제, 즉 경기가 나빠서였습니다. 클린턴의 경우 숱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경제사정이 좋을 때여서 재선에 성공했죠. 이명박 후보도 경제를 회복시킬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커서 당선된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야망의 세월> 등의 드라마나 특집프로에서 샐러리맨 신화를 만든 유능한 기업인으로 이미지메이킹을 한 덕분이고요. 유권자만이 아니라 측근들도 후보가 훌륭해서라기보다 이 사람이 당선되면 내게 어떤 이익이 있나에 더 신경을 씁니다. 킹메이커들은 보람보다 권력을 얻으려는 이유가 큽니다.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도 세월호와 관련해서 안전 등을 강조했는데, 저라면 ‘일자리 창출’ 등을 강조했을 겁니다. 비록 아들의 발언 등 악재가 있었어도 일자리 창출이나 경제활성화를 강조했다면 승리는 몰라도 격차는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번 지자체 선거, 특히 여당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는 어떻게 봤습니까.
“여당이 패배한 거죠. 세월호 이후 서민경제 붕괴와 공무원의 ‘관피아’에 대한 반감이 너무 컸습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의 관피아 척결 의지와 규제개혁에 위협받은 200만 공무원과 그 가족이 정부·여당에 등을 돌린 것 같더군요. 공무원이 많은 대전과 세종시에서 여당이 참패한 게 이를 말해줍니다. 이번 여당 패배의 더욱 결정적 원인은 세월호 참사 후 더욱 가속화한 서민경제 붕괴입니다. 몰락하는 서민경제를 이기는 정부와 여당은 없습니다. 또 세월호 참사 희생자 구조가 지연되고 유병언 체포가 장기화하면서 선거가 실종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여론조사에서 앞서던 송영길 인천시장 후보는 여당의 대통령 마케팅에 졌다고 주장하던데 동의합니까.
“동의합니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 마케팅은 항상 유효합니다. 야당은 늘 정권 심판론을 내세우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우리 대통령이 실패하거나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번 선관위에 등록된 조사설문서는 대부분 대통령 마케팅 없이 선거 참여 의사를 질문하고 바로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가를 물었더군요. 이런 조사에서는 새누리당 후보가 패배하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 지지 여부를 묻고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가를 묻는 여론조사에서는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기는 결과였습니다. 보수는 물론 부동층에서는 일단 대통령을 떠올리며 숙연해지는 겁니다. 이번 선거에서 마지막 2~3일의 대통령 마케팅이 없었다면 여당은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5대 12라는 완패(完敗)를 당할 수도 있었고, 여당이 선거 초기부터 대통령 마케팅을 했다면 서울·충북·강원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번 재·보궐선거에서도 대통령 마케팅이나 당대표 마케팅이 효과가 있을까요. 지지율이 이렇게 추락하는데요.
“그럼요. 적어도 후보들보다는 대통령이 더 유명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양극화입니다. 보수와 진보, 여와 야, 호남과 영남 등등. 해법이 없을까요.
“무엇보다 북한에 대해서 여와 야가 합일된 정책을 가져야 합니다. 그동안 정치권은 북한을 빌미로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정치적으로 악용했습니다. 국민들이 대표로 뽑아준 국회의원들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제발 대북정책에 대해 바른 정책을 만들어 일관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 북한 대응이나 통일 관련 사업에 투자되는 비용과 시간을 복지에 활용할 수 있고 국론분열도 줄어들 겁니다.”
현 정치권의 가장 큰 문제는 뭘까요.
“정치인들의 욕심이죠. 무엇보다 공천권을 없애야 합니다. 이번 재·보궐선거도 이게 뭡니까. 여야 없이 전략공천에 보복 탈락 등에…. 미국처럼 두 번 선거를 하더라도 진심으로 지역민과 국민들이 원하는 후보를 뽑을 권리를 줘야 합니다. 왜 국민의 눈치를 안 보고 당대표나 국회의원의 눈치만 보고 충성을 합니까. 그러니 이번 시의원 살인청부사건 등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자체의 경우는 특히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했는데 흐지부지되고, 새정치를 한다던 안철수 대표도 그렇고….”
방송과 칼럼에서 보수적인 성향을 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진보의 아이콘인데 언제부터 보수로 변했는지요.
“인간은 태어날 때 보수로 태어납니다. 보수주의는 인간 각자의 능력대로 사는 것이고, 진보주의는 주어진 조건을 개선해 공평하게 살자는 것이죠. 사람들은 각자 능력껏 살라고 태어나지만 성장하면서 변화하고, 주변사람들을 살피면서 진보성향을 보이다가 결국 보수로 회귀합니다. 제가 한국 나이로 73세이니 보수가 되는 것은 당연하죠.”
이영작 박사는 정치의 요체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몰락하는 서민경제를 이기는 정부와 여당은 없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다. 정답은 경제, 즉 서민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것이다. 갑자기 이 뻔한 진리를 왜 박근혜 대통령만 이해 못하는지 궁금해졌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