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GA 투어에서 렉시 톰슨과 리디아 고 두 10대 소녀가 잇달아 우승했다. 지난달 27일 막을 내린 한국여자프로골프 투어 넥센 세인트나인 마스터스는 10대들의 잔치가 됐다.
골프 투어에 10대 소녀들의 돌풍이 거세지고 있다.
가장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인공은 세계랭킹 2위 리디아 고(17·뉴질랜드)와 6위 렉시 톰슨(19·미국)이다. 렉시 톰슨은 지난 4월 초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시즌 첫 메이저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리디아 고는 4월 말 끝난 스윙잉 스커츠 LPGA 클래식에서 각각 우승했다.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 고가 4월 2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스윙잉스커츠 클래식 4라운드 18번홀에서 우승을 확정하는 마지막 퍼트를 성공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 AP연합뉴스
최고 흥행 카드, 리디아 고와 렉시 톰슨
톰슨과 리디아 고는 코스 밖에서는 방글방글 웃고 장난을 치는 영락없는 10대 소녀다. 그러나 코스 안에서는 클럽만 잡으면 눈매가 이글거리는 무서운 승부사로 변신해 맹활약하면서 투어의 흥행을 이끌고 있다.
LPGA 투어는 2008년 총상금 5740만 달러(약 592억원)를 걸고 34개 대회를 치르며 최대 호황기를 맞았다. 하지만 잔칫집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해 말 터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기가 뚝 떨어졌다. 대회 수는 물론 상금 규모도 추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8년 안니카 소렌스탐(44·스웨덴)에 이어 2010년 로레나 오초아(33·멕시코)가 은퇴하면서 투어의 인기는 더 시들해졌다.
그러나 올해 톰슨과 리디아 고 등 흥행 아이콘이 맹활약하면서 LPGA 투어는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방송인 ESPN은 “올해 LPGA 투어는 그 어느 해보다 흥미진진하다. 올해 LPGA 투어를 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평했다.
LPGA 투어는 전통적으로 베테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투어의 판세를 주도했던 선수들은 대개 20대 중반에서 3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통산 72승을 거둔 소렌스탐은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 꽃을 피웠다. 27승을 거둔 오초아 역시 20대 중·후반에 가장 빛났다. 54세의 나이로 현역으로 활동 중인 통산 31승의 줄리 잉스터(미국)는 39세였던 1999년 5승, 상금랭킹 2위에 올라 최고 전성기를 보냈다.
톰슨과 리디아 고 같은 10대 소녀들의 등장은 투어의 규모가 커진 것과 무관치 않다. 1950년 창설된 LPGA 투어는 당시 총상금이 5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30년 만인 1980년 총상금 515만 달러로 103배 커졌고, 1990년에는 처음으로 1000만 달러를 돌파해 1710만 달러의 상금이 걸렸다. 올해는 2008년과 비슷한 수준인 5630만 달러(약 581억원)를 걸고 32개 대회가 열린다. J골프에서 LPGA 투어를 중계하는 임경빈 해설위원은 “총상금 1000만 달러가 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파트타임 골퍼가 많았다. 그러나 상금이 수천만 달러로 늘어나면서 프로 골퍼가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골프를 시작하는 연령대도 어려졌다”고 분석했다.
톰슨은 5세 때 골프를 시작해 12세 때 US여자오픈에 최연소로 출전하면서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학교 대신 홈스쿨을 택해 골프에 올인하면서 오전 일찍 일어나 2시간씩 공부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연습과 18홀 라운딩으로 시간을 보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니콜러스(32)와 루이지애나주립대 골프 선수인 커티스(22) 등 두 오빠가 있는 톰슨은 어린 시절부터 오빠들과 장타를 겨루면서 LPGA 투어를 대표하는 장타자가 됐다.
한국도 신인 백규정이 그린 접수
리디아 고도 톰슨처럼 5세 때 골프를 처음 접했고, 6세였던 2003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리디아 고는 정규 수업을 모두 소화했지만 방과후에는 테니스 선수 출신인 아버지 고길홍씨(53)가 직접 짠 훈련표에 따라 짧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고밀도 훈련을 했다. 화이트-블루-블랙 등 3개의 티잉 그라운드를 이용해 130~220야드를 오가며 각 30개씩, 4개 파3홀에서 최소 360개의 샷을 날렸다. 또 100야드 이내 거리에서 그린을 3등분 해 앞·중앙·뒷부분에 깃대를 꽂고 샷 연습을 하면서 아이언의 정교함을 길렀다.
톰슨은 2011년 9월 나비스타 클래식에서 당시 최연소 우승(16세 7개월 8일)을 차지하면서 2012년 나이 제한(만18세) 장벽을 넘어 프로가 됐다. 리디아 고는 2012년 8월 캐나다 여자오픈에서 새로운 최연소 우승 기록(15세 4개월 2일)을 세웠고, 올해 LPGA 투어에 데뷔했다. LPGA 마이크 완 커미셔너(49·미국)는 “스포츠를 살리는 것은 스타”라며 “19세의 나이에 4승을 거둔 톰슨이나 17세로 3승을 거둔 리디아 고로 인해 올 시즌 LPGA 투어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절을 맞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10대 소녀 돌풍은 더 빨리 불기 시작했다. 2000년 이선화가 만 14세 1개월 22일의 나이로 최연소 프로가 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KLPGA가 이후 프로 입문 나이를 만 17세로 규정하자 ‘17세 생일=프로 입문’이 공식이 됐다.
올해는 10대 소녀들의 돌풍이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27일 막을 내린 넥센 세인트나인 마스터스는 10대들의 잔치가 됐다. 우승자 백규정(19)을 비롯해 공동 3위 김민선(19), 공동 6위 고진영, 서연정, 김민지(이상 19), 공동 9위 오지현(18) 등 톱 10 안에 든 선수 중 10대 소녀가 무려 6명이나 됐다.
렉시 톰슨이 4월 7일 미국 란초 미라지 미션힐스 골프장에서 열린 크라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확정한 뒤 연못에 뛰어드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백규정을 비롯해 김민선과 고진영, 오지현은 국가대표 출신으로 지난해 2·3부 투어에서 경험을 쌓고 올해 정규 투어에 데뷔했다. 국가대표 시절부터 라이벌 관계였고 공통점도 많다. 신장 176㎝인 김민선이 가장 크지만, 백규정(173㎝), 고진영(170㎝), 오지현(169㎝)도 신장 170㎝ 안팎의 장신으로 남자처럼 파워풀한 스윙을 한다. PGA 클래스 A 멤버인 장재식 프로는 “요즘 10대 선수들은 나이는 어려도 구력은 짧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서 그만큼 빨리 두각을 나타낸다”며 “체격 조건이 좋아지면서 비거리도 정말 많이 난다. 최근 대회 코스가 장타자에게 유리하게 세팅되기 때문에 투어에 데뷔하자마자 좋은 성적을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어느 순간부터 KLPGA 투어에서는 신예들의 활약만 있을 뿐 30대 이상 베테랑 선수들의 활약은 보기 힘들어졌다. 올 시즌 국내 투어에서 활동하는 30대 골퍼는 안시현(30)과 최혜정(30) 정도다. J골프의 송경서 프로는 “한국 여자 투어는 세대교체가 정말 빠르다. 요즘 국내 투어를 보면 중·고연맹 대회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10대 소녀들의 활약은 투어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측면이 있으나 너무 일찍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이민지, 가츠 미나미, 프로 무대서 돌풍
10대 소녀 돌풍은 아마추어에서도 거세다. 아마추어 이민지(18·호주)와 가츠 미나미(16·일본)가 그 주인공들이다. 골프 성인 바비 존스(1902~1971)는 “골프는 오래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경기다”라고 했다. 나이가 어릴수록 생각이 심플한 반면 나이가 들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골프가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다. 이민지와 미나미는 복잡하지 않고 겁없는 플레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미나미는 지난 4월 말 열린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 KKT컵 밸런타인 레이디스에서 역대 최연소(15세 293일)로 우승했다. 아마추어 선수가 JLPGA 투어에서 우승한 건 네 번째다. 157㎝의 작은 체구인 미나미는 미야자토 아이(29·일본)를 연상시킨다. 우승 뒤 독학으로 골프를 배운 이력이 알려지면서 벼락 스타가 됐다.
여자 골프 아마추어 세계랭킹 1위 이민지는 2월 초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 볼빅 RACV 레이디스 마스터스 준우승에 이어 2월 말 호주 빅토리안오픈에서 우승했다. LPGA 투어에도 간간이 출전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호주여자오픈 공동 11위, 4월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 공동 24위로 베스트 아마추어에 올라 프로 무대에서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이지연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