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넴의 ‘루즈 유어셀프’와 서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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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넴의 ‘루즈 유어셀프’와 서사의 시대

입력 2013.12.31 10:42

예술을 이루는 두 요소는 내용과 형식이다. 내용이 예술가가 전달하려는 의미라면, 형식은 그 전달의 방식을 말한다. 감상자의 시각에서 보면, 형식보다는 아무래도 내용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전체로서의 예술을 생각할 때 형식은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메시지라도 전달하는 방법에 따라 그 효과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형식에 따라 그 유형이 분명히 구분되는 예술은 다름 아닌 음악이다. 멜로디와 리듬을 통해 인간의 감성 및 정서를 전달하는 음악은 어떤 형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나뉘고, 대중음악은 다시 재즈·팝·록 등으로 세분화된다.

여기에 이 하위 분야들은 다시 그것이 만들어지는 시대 및 장소에 따라 고유한 형식과 그 형식이 가져다주는 분위기를 갖는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전반에 미국과 서유럽에서 유행한 프로그레시브 록은 자신만의 개성적인 음악세계를 선보였다.

욕망의 시대에 짝하는 ‘서사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음을 랩만큼 적절이 보여주는 음악 양식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은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 의 한 장면. | 경향 자료사진

욕망의 시대에 짝하는 ‘서사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음을 랩만큼 적절이 보여주는 음악 양식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은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 <8마일>의 한 장면. | 경향 자료사진

이런 맥락에서 사회학적으로 가장 이채로운 음악 양식은 힙합(hip-hop)이다. ‘엉덩이를 흔든다’는 말에서 유래한 힙합은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 흑인이나 스페인계 청소년이 중심이 된 문화 전반의 흐름을 지칭한다. 랩·그래피티·브레이크댄스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1980년대 이후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자유롭고 도발적인 대중문화 양식인 이른바 ‘힙합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랩(rap)은 이 힙합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음악 양식이다. 그 기본 형식은 멜로디보다 리듬과 비트에 의존하고, 노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사를 중시한다. 각운을 리듬에 맞춰 발성하는 랩은 흑인들이 주도한 만큼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소외와 분노를 드러낸다. 많은 하위문화의 발전이 그러하듯 주변에서 시작한 랩은 이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서 당당히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노래를 부른다기보다 중얼거리는 이 힙합이 확산된 이유는 뭘까? 랩이 황량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소외계층의 정서를 대변해 온 게 첫 번째 이유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서구사회에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본격화됐다. 이러한 현실을 랩은 거칠게 야유하고 비판함으로써 특히 젊은 세대의 공감을 모았다.

랩이 갖는 형식적 특성은 두 번째 이유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삶의 속도가 빨라지게 되면 정서의 표현에서 서정적 방식보다 서사적 방식이 갖는 공감대가 더 커지는데, 랩은 이런 서사적 방식의 장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서를 차분하게 멜로디에 담아 표현하는 것보다는 직설적으로, 격정적으로 이야기에 담아 드러내는 게 감성을 전달하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한 가수와 그의 노래를 설명하기 위해 음악 형식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는 에미넴(Eminem)이다. 에미넴은 2000년대에 들어와 가장 널리 알려진, 또 상업적으로 성공한 래퍼다. 그동안 흑인들이 주도해온 랩 뮤직계에서 백인 래퍼이라는 점에서 그는 이채로운 존재다. 1999년 데뷔한 이래 한때 활동을 중지하기도 했지만 그가 발표한 앨범과 곡들은 언제나 큰 화제를 불러모았다. 여러 차례 그래미상을 받았고, 2012년 여름에는 내한 공연을 갖기도 했다.

도덕적 관점에서 에미넴의 노래는 결코 권할 만하지 않다. 매우 거칠고, 때로는 외설적인 내용이 적잖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도덕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이 갖는 폭넓은 대중적 공감의 이유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에미넴 랩에 열광해 온 까닭은 내용과 형식의 효과적인 결합에 있다. 어떤 내용이든 그것이 어떤 형식에 담기느냐에 따라 공감의 크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em>“이봐. 만일 네가 단 한 방을, 단 한 번의기회를 가졌다면,
지금까지 원했던 것을 단 한순간에 잡을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잡겠어? 아니면 놓아 버리겠어?”
</em>

에미넴의 노래 ‘Lose Yourself’(2002) | 경향 자료사진

에미넴의 노래 ‘Lose Yourself’(2002) | 경향 자료사진

에미넴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Lose Yourself’(2002)의 첫 부분이다. 그의 자전적 영화 <8 마일>에 나오는 이 곡은 빌보드 차트에서 12주 동안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누렸던 곡이다. 노래의 내용에는 에미넴 자신의 삶이 담겨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한 래퍼가 성공과 실패의 기로에 서서 느끼게 되는 감정을 솔직하고 격정적으로 전달한다. 랩 특유의 각운과 심장을 울리는 듯한 비트가 잘 살아 있는 곡이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사회 변동에 따른 예술양식의 변화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의 삶은 종교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삶으로, 그리고 다시 욕망에로의 끝없는 변화를 이뤄왔다. 지금 인류는 ‘욕망의 시대’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이 욕망의 대상은 화폐 또는 권력이기도 하고, 이 둘을 포괄한 사회적 성공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욕망의 시대의 만개가 비(非)가역적 경향이라는 점이다. 의미보다는 이미지가, 정신보다는 육체가, 가치보다는 욕망이, 과정의 진정성보다는 결과의 효율성이 절대 우위를 점하는 새로운 문명사적 도전 앞에 우리 인류는 서 있는 셈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조정원리가 이렇게 변화된 현재, 이 낯익으면서도 낯선 현실을 담아내는 데 랩은 분명 효과적인 형식이다. ‘서정의 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나, 욕망의 시대에 짝하는 ‘서사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음을 랩만큼 적절히 보여주는 음악 양식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em>“그 순간, 음악에 네 자신을 맡기는(lose yourself) 게 좋을 거야.
넌 가졌어. 그것을 그냥 보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단 한 번뿐이야. 보여줄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
이 기회는 인생에서 단 한 번만 오는 거야.”
</em>
‘Lose Yourself’의 반복되는 후렴이다. 삶에서 기회가 단 한 번만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인류를 끝없이 시험대 위에 세우는 이 욕망의 시대에 에미넴의 절규는 젊은 세대에겐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고 중얼거리는 마지막 구절은 욕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여러 생각들을 품게 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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