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 중요성 일깨운 <델마와 루이스>



주간경향

공유하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X

  • 이메일

보기 설정

글자 크기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컬러 모드

  • 라이트

  • 다크

  • 베이지

  • 그린

양성평등 중요성 일깨운 <델마와 루이스>

입력 2013.12.17 15:52

선진국이란 무엇일까? 앞서 발전해 잘 사는 나라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조건은 무엇일까?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성숙한 게 그 조건이다. 이런 선진국의 조건에서 매우 중요한 것의 하나가 양성평등의 수준이다. 인구 절반을 이루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크다면 결코 선진국이라 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준 충고다. 그는 민주적 양성평등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 사회가 성찰적 현대화로 나아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웃 일본의 양성평등 수준은 서구 사회와 비교할 때 상당히 떨어진다. 서구 사회가 모든 측면에서 일본 사회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지만, 적어도 양성평등의 측면에서 일본을 선진국이라 하기 어렵다.

정부는 여성들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를 위한 보육 및 노인 부양 등 공적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 지난 2009년, 한 지자체에서 연 취업박람회에 아이를 업고 이곳을 찾은 주부가 취업게시판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 김순철 기자

정부는 여성들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를 위한 보육 및 노인 부양 등 공적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 지난 2009년, 한 지자체에서 연 취업박람회에 아이를 업고 이곳을 찾은 주부가 취업게시판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 김순철 기자

양성평등 문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델마와 루이스(Thelma and Louise)>다.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리들리 스콧 감독은 1991년 <델마와 루이스>를 발표해 다시 한 번 이목을 집중시켰다. <델마와 루이스>는 두 여성이 주인공인 로드 무비다. 강압적인 남편에게 주눅들어 사는 주부 델마와 일에 지친 친구인 독신녀 루이스는 기분 전환으로 주말여행을 떠나지만, 한 남자를 예기치 않게 살해하고 도망다니게 된다는 이야기가 그 줄거리다.

<델마와 루이스>는 발표되자마자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언론은 대체로 이 영화에 담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 대해 혹평했다. 치열하지 못하고 산만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생각은 달랐다.

영화는 여성의 관점에서 일과 사랑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데, 델마와 루이스의 삶은 가사 또는 일에 시달리는 보통 여성들의 정체성과 그 변화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두 여성이 벌이는 일종의 현대판 서부극은 새삼 우리 안에 놓인 가부장주의의 그늘과 양성평등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양성평등 수준에서 서구 사회는 동아시아와 비교할 때 나은 편이다. 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도 양성평등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다. 특히 1980년대에 등장한 신보수주의는 가족의 가치를 중시했다. 급변하는 사회 변동 속에서 가족의 존재는 중요하다. 하지만 가족 가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가부장주의를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델마와 루이스>가 공감을 얻은 이유 중 하나는 신보수주의 아래서 가부장주의 문화가 강화돼 온 배경에서 찾을 수 있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먼저 통계를 보면, 상반된 자료가 눈에 들어온다. 2011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성 격차지수(Gender Gap Index·GGI)에서 우리나라는 135개국 중 107위를 차지한 반면에, 유엔개발계획(UNDP)의 성 불평등지수(Gender Inequality Index·GII)는 146개국 중 11위를 기록했다.

성 불평등지수는 유엔개발계획이 발표해 오던 여성권한척도(GEM)와 남녀평등지수(GDI)를 대체한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여성권한척도인데, 이는 여성의 정치·경제활동과 정책결정 과정 참여도를 점수로 환산한 것이다. 2008년 여성권한척도는 우리나라의 경우 100여 국가들 중 68위에 머물렀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꾸준히 향상돼 왔다. 호주제 폐지를 포함한 일련의 법 개정이 이뤄져 왔다. 전문직에서도 여성의 비중이 빠르게 증가해 왔다. 하지만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여성의 지위는 여전히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두 가지 점이 특히 눈에 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스틸이미지. | 경향자료 사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델마와 루이스> 스틸이미지. | 경향자료 사진

먼저, 여성 간의 양극화 경향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커리어 우먼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온 반면, 다수의 평범한 여성은 취업 경쟁에서 배제되고 소외돼 왔다. 대학 안에서도 이제 막 입학한 여학생들은 더없이 당당하지만, 졸업을 앞둔 여학생들은 불투명한 미래로 풀이 죽어 있다. 공무원이나 저널리스트, 또는 문화 관련 기업 등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직장에 들어가는 것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부장적 문화는 여성 문제의 또 다른 그늘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여전히 대다수 사회조직과 문화는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다. 사회생활과 일상은 물론 각종 문화매체에서도 여성은 ‘볼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보여지는 존재’다. 강의실에서는 양성평등과 여성해방을 배우고 공감하지만 취업 면접을 위해 남몰래 성형외과를 찾는 여학생들을 보면 삶의 아이러니에 앞서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전략이 요청된다. 한편에서는 여성 전문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정책이 강구돼야 한다. 해당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이 아니라 ‘취집’을 한다는 것은 인력 낭비이자 국력 낭비다. 절반의 인재만으로는 세계화가 강제하는 국가 간 경쟁에 적극 대처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는 인권의 관점에서도 정당하지 않다.

다른 한편, 남녀 차별 해소를 위한 고용정책이 강화돼야 한다. 결코 적지 않은 여성들은 경제적 목적이든 자아실현 목적이든 일하기를 원한다. 또 일을 하고 있다 해도 상당수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여성들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이를 위한 보육 및 노인 부양 등 공적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

시각에 따라서는 나의 이런 주장들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오늘날 고용 창출이 결코 쉽지 않으며, 경제위기 아래에서 일단 가장부터 일자리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태도와 의지에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성 문제를 외면하기 시작하면 여성의 지위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남성의 시선 아래 놓인 타자(他者)화된 관점이 아니라 나의 딸, 나의 어머니라는 관점에서 여권 신장과 양성평등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델마와 루이스는, 비록 20여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들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지 다른 이유를 들어 그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양성평등을 성취하지 않고서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댓글